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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Mar 31. 2016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기

아빠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은퇴 후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라 내 안위가 가장 중요했고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을 너무나 잘 보내시는 분이기에 걱정할 게 없었다.


아버지와 나의 대화는 저녁을 먹는 동안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냥 대화는 아니고 어떤 주제에 꽂히면 논쟁처럼 되거나 내가 분해서 일방적으로 씩씩거리며 울다가 아버지가 그만하자는 말을 꺼내면 끝이 났다. 사실 그만하자고 하면 내가 바로 그만두는 것은 아니었고, 내가 울었기 때문에 이 논쟁을 끝내는 건 안된다며 나는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다고 물고 늘어질 때도 많았다. 나는 아버지와 대화할 때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뭔가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나도 모르게 나오는데, 그것 때문에 이 논쟁에서 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 더더욱 분했다. 나는 지금 흐르는 건 눈물이 아니라 땀과도 같은 것이니 계속 논쟁을 이어가야 한다며 떼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러운 방식이었지만 내게 있어 그 당시에 절실한 무언가이기도했다.


내가 어떤 일를 잘 했거나 일반적인 기준으로 칭찬받지 않을까 하는 상황에서 항상 아버지는 '잘했다' 한마디뿐이셨다. 뭐 그렇게라도 말해주는 게 어디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항상 부족했다. 하지만 못했을 때 왜 못했냐고 다그치는 분은 아니셨던 것 같다.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없었지만 잘했을 때도 당연하다는 듯 무심한 '잘했다'는 참 서운했다.


그래서 더더욱 칭찬받고 싶어 하고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나 사이의 논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좋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거의 양극단 진영의 의견 대립처럼, 아니면 어떨 때는 이런 생각마저 든 적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내놓은 의견의 일부러 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건 아닐까 하고. 가끔 '그래 좋은 말을 했다' ' 좋은 이야기다'와 같은 말도 듣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대부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듯한 말을 들으면 발끈했고 내가 어떤 얘기를 논리적으로 해도 아버지라는 큰 벽에는 아무 영향을 못 미치는 느낌이 들곤 했다.


논쟁의 탈을 쓴 말다툼을 반복하던 저녁 식사자리를 가지기 어렵게 된 것은 5년 전 부모님이 중국에 가게 되시면서부터였다. 성인인 자식 둘을 한국에 두고 부모님이 독립하시는 것과 같은 특이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아버지와 두게 된 거리가 우리 관계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거리를 둠으로써 함께 살 때보다 안부를 훨씬 더 자주 물었고, 울며 불며 싸우게 되던 논쟁은 Skype 화상 통화 상태가 안 좋아지면 강제적으로 종료되곤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자연스레 기력 소모적인 논쟁은 되도록 안 하게 되었다.

나의 내면에서는 거의 이 정도 수준으로 목숨걸고 한 논쟁들이었다.


한국에서 함께 나누던 논쟁을 못하게 되자 나는 좀 더 깊은 이야기의 경우 메일을 통해 아버지와 주고받게 되었다.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이것이야 말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필요했던 것임을 깊이 깨달았다. 예전의 나는 항상 아버지의 의견 패턴들이 익숙했기에 들어본 적이 있는 얘기다 싶으면 중간에 끊었고, 그런 나를 아버지는 못마땅해하셨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언성을 높이면 대화를 중단하시는 아버지가 싫었다. 하지만 메일을 사이에 두고서는 그 누구 하나 흥분하거나 상대의 말을 끊는 상황은 없었고 나는 그제야 아버지 말씀들의 의미를 예전보다 깊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메일로 주고받던 중,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다. 


'나는 요새 한 중국 경제학자 책을 읽었는데 그것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나의 인생 책으로 삼아 읽고 또 읽으려 한다. 너는 바빠서 못하겠지만 만약에 기회가 된다면 그 책을 너도 읽어보기 바란다. 혹시 아니? 그것으로 인해서 너와 나 사이에 대화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을지.'


그 얘기를 듣고 '너는 바빠서 못하겠지만'이라는 부분에서 발끈한 내가 있었다. 나는 왜 아버지의 말투에서 나를 약 올린다는 느낌을 항상 지울 수 없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대놓고 약 올리시는 경우도 있고 엉뚱한 면도 있으시긴 하다. 그 부분에서 발끈한 나는 짧은 중국어 실력임에도 지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번역을 하면서 읽어갔다. 그러다가 너무 양도 많고 내용도 어려워 금방 포기해버렸지만.


그러다가 그 중국 경제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된 게 그로부터 1년 후인 얼마 전이었다. 나는 요즘 '내 우선순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꽤 높은 순위에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중국 경제 책 읽기가 포함된 것에 나 스스로가 놀랐다. 어쩌면 앞으로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날이 한 20년 남았을까라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내가 틈틈이 할 수 있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꾸준히 할 수 있지만 그때에도 부모님과 지금과 같이 좋은 의미로 티격태격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중국 경제 책 번역이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나와는 겪어온 시대도 환경도 전혀 다른 아버지를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어느 중년 남성을 이렇게까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꼰대'로 불리는 중년의 어르신들과는 대화가 전혀 되지 않는다고 거의 무시하거나 외면하기 일쑤인 청년과 그들 사이에 따뜻한 이해가 싹틀 수 있는 가능성은 여기에서부터가 아닐까 하는 오만한 기대를 해본다. 나와 다름을 틀림이라고 치부하고 적대시하는 게 아닌 서로 이해하고 웃고 상생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내가 이상주의자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용감하게 겁도 없이 그대로 현실에 부딪혀보는 현실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한 발자국을 지금부터 조금씩 내디뎌보려 한다.



내가 모르는 중국

내가 아버지와의 논쟁에서 간격을 좁힐 수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겪어온 환경에 대한 무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을 겪으셨다.


1966년 8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백만인 집회가 열렸고, 이곳에 모인 홍위병()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였다. 그래서 마오쩌둥 사상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 대혁명 [文化大革命] (출처:두산백과)


사실 이렇게 백과사전 출처로 딱딱한 정보를 읽고 있으면 별 느낌이 와 닿지도 않고 재미없던 국사나 세계사 공부하던 학생 때 생각이 나지만, 이 사건이 나와 가까운 사람이 경험한 일이라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학교를 폐쇄하고...

실제로 아빠와 엄마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학교를 다니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멀쩡히 다니던 학교가 내일부터는 '문화혁명'때문에 폐쇄된다니... 그때 중학교 2학년생이던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분했을까? 얼떨떨했을까? 학교를 안가 신났을까? 모두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해야 할 일을 했을까?


갑자기 학교를 못가게 되는 상황이라니...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께 영상 통화를 걸어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당시에는 모두가 혁명에 따라야 되는 것이라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했다. 더 깊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두 분은 동아줄로 사다리를 만드는 중이라며 내 질문에 그다지 귀 기울여 주지 않으셨다. 나의 첫 번째 대화 시도는 이렇게 실패했다. 내가 타이밍을 못 맞춘 것도 있지만 항상 아버지는 바쁘시다. 퇴직하기 전에도 논문을 써야 한다며 바쁘다고 하셨고, 퇴직 후에는 반년은 중국 선전에서 반년은 한국 남해에서 강태공과 같은 생활을 하느라 바쁘다. 여러모로 바쁘신 분이다. 함께 살 때도 멀쩡한 가구들을 늦은 밤에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시던 분이니 뭐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말이다.


어쩌면 당신의 인생을 사느라 바쁘신 아버지가 나은 걸지도 모른다. 퇴직 후 자식들 참견하고 심심해하시는 것보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한결 편하니까. 아버지의 그런 생활을 보고 자란 나 역시 나 자신이 행복해야 가족 모두가 행복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 아이들에게 이래저래 참견하고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게끔 꿈을 자식에게 밀어붙이는 숨 막힌 부모가 아니라, 부모 스스로도 하고 싶은 건 해내고야 마는 그런 삶. 그런 면에 있어서 어릴 적에 거의 방임에 가까운 교육으로 부모님께 서운했던 감정이 현재는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감사하다는 마음을 먹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문화혁명 시작으로부터 10년 후인 1976년 마오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친 것은 학교가 폐쇄된 중2 시절로부터 15년 뒤였다. 그 사이 군대에서 5년간 시간을 보내고 제대 후에는 농민으로서 공동농장에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29세에 아버지는 독학으로 북경대 경제학과에 합격을 했다.

십여 년간 학교를 못 다닌 상태였다가 북경대에 합격했다는 것 자체에서 인간극장이나 나와는 먼 자기계발서 느낌이 나는 성공담이라 내가 더 아버지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자수성가한 고지식한 아버지와의 대화가 쉬울 리 없다. 뭘 해도 나는 아버지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나는 북경대라는 벽에서 이미 쫄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북경대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해내야 아버지를 뛰어넘은 게 될까.


아버지를 뛰어넘는 게 그리 중요한 건가 싶지만 그래야만 아버지가 인정해줄 것이라는 이상한 마음이 자식들에게는 있는 듯하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잘했다는 한 마디면 될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하시는 걸 보면 인정받은 걸까. 그 기준조차 애매한 골대를 향해 점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중국에 대해 알게 되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될까. 아버지는 항상 중국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한국인이 거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어쩌면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부모님의 모국은 중국이지만, 나는 중국에서 실질적으로 생활한 기간이 다 합쳐봐도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대화만으로 이 커다란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오늘 바쁘다며 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화할 기회조차 만들기 쉽지 않겠다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은퇴 후의 아빠

문득 아빠가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젊은 시절, 그리고 우리들을 키우며 은퇴하기 전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아빠. 힘든 일도 많이 겪으셨겠지만 아빠는 그저 묵묵히 우울감 따위는 느낄 새도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오셨다. 아빠는 '사람이 왜 우울해하니? 우울할 새가 있니?'라고 하실 만큼 섬세한 나를 이해 못하셨다. 우울한 감정에 빠질 틈을 주지 말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할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말씀이셨겠지만 아빠처럼 나는 그러질 못했고 그런 나를 아빠는 '너는 너무 마음이 약하다' 하셨다.


은퇴하신 아빠와 엄마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중년부부보다 마음 편하고 신나게 살고 계신다. 돈이 많아 으리으리한 곳에 산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 소박해도 자유롭고 자기가 그 삶을 만족한다면 행복하다고 믿고 계신 것처럼 그 기준에서 본다면 우리 엄마 아빠는 아주 많이 행복해하시기 때문이다. 


아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추진력을 가지신 분이라 나는 아빠가 내년에는 또 어떤 일을 벌이 실지 궁금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캠핑카를 갑자기 지르시지 않나, 그러다가 남해에서 작은 집에서 텃밭을 일구며 낚시를 하시다가 또 추운 겨울이 되면 남해를 떠나 따뜻한 중국 하이난의 아주 작은 집에서 반년을 지내신다. 요새는 캠핑카로 돌아다니시는 것보다는 유유자적 남해에서의 반년과 하이난에서의 반년을 즐기고 계시는데 뭔가 예전만큼의 추진력을 아빠한테서 찾기가 어려워 개인적으로 슬퍼졌다.


예전에 아빠가 당신이 가진 모든 재산과 젊음을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바꾸고 싶다는 말을 하셨다고 했을 때 엄마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하셨던 게 생각난다. 그 얘기가 생각나면서 나 역시 마음이 찡했다. 아빠는 은퇴 후 아빠가 원하던 자유를 얻으셨지만 곧 70이 다가오고 건강하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음에 속상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뭔가를 하고 싶으신지 여쭤봤더니 이젠 제2의 인생이니 새로운 시작이니 이런 말들이 싫다고 하셨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싫다고 하셨다. 아빠는 번아웃 상태이신 걸까. 자유를 얻었고 그 온전한 자유를 깨트리는 부담스러운 어떤 활동조차 하기 싫다고 하셨다. 새로운 활동이 경제적으로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라 하더라도 거부하겠다고 하셨다. 그만큼 돈보다는 시간과 자유가 아빠는 중요하다 하셨다. 나는 내가 80세가 되어도 여전히 뭔가에 도전하며 경제활동을 하고 싶다고 항상 말해 왔지만 그 나이가 되어서도 그런 마음이 들지는 나 역시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집에만 있는 걸 답답해하시는 아빠, 아직도 뭔가 새로운 걸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아빠는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실까. 아빠의 지금 마음이 어떠실까 너무나도 감정 이입이 되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60대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60대의 나는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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