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고마워
한계란 존재할까?
처음에 나는 원서에 압도된 적이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압도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300쪽 짜리 번역서가 한계라고 느끼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600쪽 700쪽이어도 겁이 안난다는 건 정말 새로운 경험이다. 나 자신의 한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은 책의 쪽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 좋은지 나쁜지가 중요하다. 엄청 두꺼운 책이라도 쓰레기 책 3권읽은 것과 비교도 안될 정도의 양서라면 주저없이 잡는다.
책의 권수나 페이지 수에 매몰되어 좋은 책을 놓친다면 얼마나 아까운가. 별로인 책들만 100권 1000권 읽었다고 내 삶이 나아질까? 그건 그저 자기위안밖에 안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진 허영심 가득한 존재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책은 원서로 읽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엄두가 안났다. 그런데 이번에 또 원서에 대한 자극을 받은 깨달음에 대해 공유하고자 한다.
영어 잘 못해도 원서를 사는 이유
나는 어려운 책일 수록 원서를 산다. 이유는 영어는 매우 직관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꺼운 책을 원서로 보면 시간은 더 걸릴 수도 있지만 페이지 수는 번역서보다 압도적으로 적다. 기분이 남다르다.(ㅋㅋㅋ) 한글로 풀면 말이 더 길어진다는 얘기다. 그리고 paperback이 더 저렴한 경우도 종종있다! 이런 경우 정말 ‘개꿀’이라는 말밖에 안나온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한건 각 챕터 제목이 다르다는거였다. 원서는 좀 더 짧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용을 목차만으로는 유추해내기 힘들다. 하지만 번역서는 대략적인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어서 원서 목차와 번역서 목차 비교해보기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읽고 싶었지만 못읽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늦어서 고마워> (원제: Thank you for being late)의 목차 비교를 지금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Part 1. Reflecting / 제1부 통찰을 위한 시간
1. Thank You for Being Late. / 제1장 멈추어 생각하다
Part 2. Accelerating. / 제2부 가속의 시대
2. What the Hell Happend in 2007? / 제2장 기술의 변곡점, 2007년
3. Moore’s Law / 제3장 무어의 법칙-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컴퓨팅 기술
4. The Supernova / 제4장 슈퍼노바-연결하고 통합하고 한계를 넓히는 클라우드의 힘
5. The Market / 제5장 대시장-폭발하는 세계화
6. Mother Nature / 제6장 대자연-검은 코끼리가 나타났다
Part 3. Innovating. / 제3부 혁신의 시대
7. Just Too Damned Fast / 제7장 역동적 안정성을 유지하라
8. Turning AI into IA / 제8장 인공지능을 똑똑한 도우미로
9. Control vs Kaos / 제9장 통제냐 혼돈이냐
10.Mother Nature as Political Mentor / 제10장 대자연이라는 정치적 멘토
11. Is God in Cyberspace? / 제11장 사이버 세계의 신
12. Always Looking for Minnesota /제12장 태풍 한가운데에서 춤추기
13. You Can Go Home Again (and You Should!) / 제13장 사회적 혁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Part 4. Anchoring / 4부 신뢰의 닻
14. From Minnesota to the World and Back / 제14장 이상적 공동체를 위하여
원서에는 없는 부분은 선물
원서에 없는 부분은 아래와 같이 저자가 한국독자에게 전해준 이야기와 대담 부분이었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
- 대담: 가속의 시대, 태풍의 눈에서 춤을 추어라
이 부분들을 읽다보니 원서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리고 일단 3부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독자들에게 쓰는 서문에서 운 좋게 칼럼의 세 가지 기본 요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 당신이 고취하려는 철학과 가치는 무엇인가?
둘째, 당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바꾸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인가? (큰 힘 = 주제와 연결된 콘텐츠, 예로 들어 ‘대기계’ 등등)
셋째, 당신은 사람들과 문화에 관해 무엇을 배웠는가? (이 큰 힘은 사람과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사람과 문화는 반대로 이 큰 힘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이 세 가지를 잘 엮으면 독자의 머릿속에 불을 밝혀주거나 가슴에 불을 지펴주는 좋은 칼럼을 쓸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세계를 바꾸는 가장 큰 세 가지 힘을 ‘대시장’과 ‘대자연’ 그리고 ‘무어의 법칙’으로 요약한다.
- 대시장 : 페이스북, 페이팔, 알리바바, 트위터, 아마존, 무크와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표현되는 디지털 세계화의 가속화
- 대자연 :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의 훼손, 인구 증가의 가속화
- 무어의 법칙 : 마이크로칩의 속도와 힘이 약 2년마다 두 배로 불어난다는 이 법칙은 끊임없는 기술 발전을 상징한다
기술발전은 이 세 가지 힘이 함꺼번에 가속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빠르게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에 개인이 이 속도를 따라간다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생각임을 느꼈다. 우리는 모두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 하고, 더 많은 기술을 빠르게 배우려고 하고 뒤쳐지지 않으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서문을 읽은 것만으로도 그 생각이 와장창 깨졌다.
이런 가속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이 변화를 따라잡는 게 아니라 토머스 프리드먼같은 저자의 훌륭한 책을 읽으며 큰 숲을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큰 숲을 보게 해주는 <제로 투 원>도 생각이 났다.
+추가) 대기계 부분에서 갑자기 스케일도 생각이 났다. 스케일도 원서로 사놓고 못읽은 책 중에 하나다 ㅠㅠㅜㅠ 읽어야 할 책이 많아 행복하면서 시간 부족에 약간 조바심이 나고 ㅠㅠㅠ
게다가 저자역시 이제는 ‘평균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시 좋은 책들은 다 연결이 되어 있다.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과 <다크호스> 아직 못읽으신 분들은 꼭 읽으세요. 꼭 꼭 읽으세요.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더 많은 기술을 습득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폴리매스가 되는 걸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어야 하는 책인데 여기서도 이어진다. ㅠㅠㅠㅠ 좋은 책들의 주제들이 이어지는 걸 찾아냈을 때 짜릿함. 이건 좋은 책들을 읽고 글을 써서 내 것으로 만들고, 그리고 내 삶에 ‘적용’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결국 추구해야 하는 것
일자리는 ‘찾아야’라는 것이 아니라 ‘발명해야’하는 시대에 와있는 지금, 우리는 더 빨리 무언가를 해야하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춰서 더 큰 숲을 봐야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다. 당장 주말에 이런 책들을 읽어야 한다. 아니면 출퇴근길에 이런 책을 5페이지씩이라도 읽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최고의 일자리는 ‘공감형 기술직(STEMpathy job)이다. 이는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과 인간의 오래된 공감 empathy 능력을 결합하는 일이다. 요새는 STEM에 Art까지 결합이 되어 STEAM이라고까지 한다.
가장 잘 나가는 기업들의 공통점 역시 한국독자들에게 풀어내주었다.
첫째, 매일 아침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흐름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 흐름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내고 최악의 충격을 줄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둘째, 지치지 않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편집증적인 면모를 보인다.
셋째, 영감을 주는 리더들이 있다. 멘토의 존재!
넷째, 평생 학습을 요구하며 이를 위한 자원을 창출한다.
그리고 한국 젊은이들에게 해주는 따뜻한 조언까지...
‘낯선 땅에서 기회를 찾는 이민자처럼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가져라.’ - 토머스 프리드먼
늘 베타 테스트 상태에 있으라는 리드 호프먼(링크트인 공동창업자)의 말처럼 우리는 언제나 끊임없이 개선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유일한 욕설은 ‘끝났다finished’라니 정말 놀랍다.
가장 작은 피쳐feature들을 먼저 만들고 테스트하면서 수정해나가는 애자일 경영이 떠오른 말이었다. <The nature of Software Development> 저 책을 홍석희님 <제품의 명수> 독서모임에서 읽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원서에서 찾은 또 다른 재미
재미있는 건 원서 목차에서 쓰는 표현들이었다.
What the Hell happend in 2007?라든지,
Just too Damned fast.라든지 말이다.
또한 원서 내용을 직역하는게 한국독자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네소타에 대해 우리가 아는게 없으니 말이다. 그대신 ‘태풍 한가운데서 춤추기’라는 식으로 바꾸면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궁금증도 일고 문맥상 이해도 수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한가지는 그저 Anchoring 이라고만 되어 있으면 본문 내용이 이해가 안가는데 번역서에서는 신뢰의 닻이라고 표현해서 신뢰에 대한 이야기구나를 유추할 수 있었다.
원서를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읽으려는 마음에서 가볍게 읽으면서 뇌리에 때려박아보자라는 마음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챕터 하나씩이라도 읽고 <늦어서 고마워>의 서평을 여러 개 써봐야겠다.
이제부터 다른 원서도 이렇게 원서와 번역서의 목차 비교를 통해 좀 더 수월하게 접근해보려고 한다. 앞으로의 나의 성장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