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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Jan 14. 2017

가벼운 여행

나의 손과 발, 그리고 오감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낀 가장 행복했던 여행

  내가 가본 곳 중에 기록하고 싶은 여행이 하나 있다.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한 달간 갔던 유럽여행도 아니고 결혼 전 온 가족 함께 갔던 유럽여행도 아니고, 신혼여행으로 간 하와이도 아니다. 국내였는데 부끄럽게도 지명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느낌만은 생생했다. 1박 2일 여행이었는데 겨울이었고 내 짐가방은 없었다. 무슨 용기가 나서 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그냥 귀찮았는지 칫솔 하나와 스킨/로션 샘플, 선크림 샘플, 클렌징용품 샘플, 미니 치약, 지갑, 휴대폰이 다였다. 정말 나에게는 파격적으로 적은 짐이었다. 그냥 파카 주머니에 이것들을 다 넣어도 시린 내 손을 쑤셔 넣을 공간마저 넉넉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내가 이렇게 여행을 왔더니 일행인 친구가 나에게 한마디 했다.


'야 너 진짜 멋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괜히 나 자신이 멋있게 느껴졌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량 같기도 하고 여행 내내 두 손이 자유롭고 발걸음이 가벼웠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숙소에서 눈을 뜨자마자 세수하고 양팔을 벌려 숨을 들이마시니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게 내 안에 들어왔다. 챙겨야 하는 짐 때문에 신경 쓰이거나 할 게 전혀 없었다. 나는 내 몸 전체와 오감만으로 모든 걸 흡수하고 있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이런 멋진(?)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가벼운 여행을 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한 달간 유럽여행을 간 것이 나의 첫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그 당시 나의 첫 유럽여행을 위해 아주 큰, 정말 정말 큰 캐리어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 안에 화장품들을 통째로 넣었으며 옷도 참 많이 넣어가지고 갔다. 한 달간의 유럽여행이라 들뜬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짐으로 한 달 동안 생활이 가능한지 가늠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 내내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대며 끌고 다녀야 했고 한국 지하철 시설이 세계 최고임을(적어도 유럽보다는 월등히 뛰어남을) 느끼고 돌아오게 되었다. 해외로 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나는 다른 의미로 유럽여행을 통해 유럽도 별거 아니구나를 느끼고 온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무거운 짐을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유럽여행에서 일상이었다.


  유럽 여행이 실망감만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해 준 것만은 확실했다.

그 후부터였나 보다. 나는 그 당시 유행하던 빅백들을 그 이후로 쓰지 않게 되었다. 빅백에 모든 짐들을 쑤셔 넣고 다니던 나는 자그마한 체인 백안에 메모지와 휴대폰 정도만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가볍게 다니는 것을 선호하다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게 되었다. 작은 백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사실 좀 불편할 때가 많다. 제일 좋은 건 나갈 때 주머니에 카드지갑과 휴대폰만 넣고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밖에 나가면 나는 온전히 나의 몸으로 모든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여행이 새로운 자극을 주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고 다녀와서도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하지만 나는 '가벼운 여행'을 경험한 이후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행할 때 너무 많은 '짐'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진작 즐겨야 할 여행지에서도 그 무게로 인해 맘껏 즐기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새로운 자극과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은 굳이 많은 짐을 가지고 떠나지 않아도 일상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일상에서도 '짐'없이 돌아다니는 것, 그것은 비행기나 기차를 타지 않고도 새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우리에게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가벼운 여행. 많은 이들과 그 경험을 공유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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