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건강을 챙긴다니...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귀’라고 하면 ‘특별히 건강을 챙겨야 하나?’ 싶은 기관이었다. 내 몸에서 건강을 챙긴다고 하면 무엇보다 오복 중 하나인 ‘치아’(먹는 것에 상당히 진심인 편...ㅋㅋㅋㅋㅋ)와 장 건강, 운동을 통한 근육량과 유연성 정도일까. 눈 건강도 건조할 때면 신경쓰이고 달리기를 하다보니 폐활량이 늘어난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소화가 안된 적은 없지만 먹는 것에도 신경쓰는 편이다.
그런데 귀는 잘 안들릴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노화로 인해 점점 어려워질 수 있겠지만 그건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는 먼 훗날의 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귀 건강에 대해 난생 처음 고민하게끔 해준 책이 바로 데이비드 오언의 <볼륨을 낮춰라>였다.
우리는 행복에서 청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귀는 단지 듣기만하는 기관이 아니다. 헬렌 켈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청각 장애의 문제가 시각 장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까진 아니지만, 더 심각하고 복잡하다. 청각 장애는 훨씬 큰 불행이다. 그것은 가장 필수적인 자극, 다시 말해 언어를 불어오고, 생각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우리를 인간이라는 지적 동반자 틈에 있게 하는 소리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듣기에서 배제되면 실제로 고립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 p. 17 <볼륨을 낮춰라>
이 부분을 읽다보니 내가 청각을 어떻게 나의 생활에서 다뤄왔는지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연애할 때도 지금의 남편몬인 남자친구를 매일 만나는 것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혼자만의 휴식 시간이 필요했던 나에게 어느 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라는 말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게 아니고 살고자 하는 외침이었다. 다행이 나의 그런 부분을 이해해주던 남자친구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다.
아이들이 생기면서 그런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이란 쉽게 오지 않았다. 방에 있어도 아이들의 칭얼대는 소리가 나에게 들렸고 엄마의 본능과도 같이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들리면 심장이 마구마구 뛰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일을 해야 할때면 음악을 듣는다. 모든 외부 환경에서 차단되고 싶다는 듯이 나는 나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청각이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시킬 수 있다는 얘기는 내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짜’ 차단되면 정말로 외부와도 고립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참 무섭고도 강력한 힘이 아닐 수 없다. 시각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청각은 이렇게 우리를 타인과 이어지게끔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나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가 진공상태라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어디를 밟고 있는지도 가늠이 안될테니 말이다. 의식하지 않았던 소리의 존재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청력 손실은 심지어 걷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 자신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발 상태를 잘 인지하지 못해서 더 자주 비틀거리게 된다. - p.21
소리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진동하는 것’의 일부라는 이야기는 과학에 대한 궁금증을 다시 불러오기도 한다. 우리의 몸 기관 중 작은 부위에 해당하는 귀는 우리의 몸에 정말로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말이다. 박쥐의 뛰어난 청각반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나방의 청력이 박쥐에서 잡아먹힐 위협에 대응하면서 발달한 것을 보며 '위협은 진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우리의 귀가 두 개있다는 것은 한쪽만 있어도 기능할 수 있다는 게 아님을 알게 한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으면 앞에서 나는 소리나 뒤에서 나는 소리나 별 차이가 없게 들린다. 누가 나를 부르면 사방을 둘러봐야 한다거나 어느 쪽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는지 모른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우리의 몸이 이렇게 생기게 된 건 다 그 필요에 의해서다.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
그렇게 소중한 청각을 우리는 혹사시킨다. 밤새 이어폰을 꽂고 잠이 들거나 음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또는 바쁜 하루를 어떻게든 쪼개서 정보를 넣기 위해서라거나 말이다. 음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스피커가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강도로 볼륨을 높이는 것도 우리의 귀를 혹사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해당안되지만 사냥이 취미인 사람들 역시 그렇다. 지금은 귀마개를 하겠지만 사격할 때의 소음뿐만 아니라 산업화로 인해 공장에서 나오는 소음은 그 당시에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과거 병사들에게 청각 장애는 일상이었을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두 손 두발이 멀쩡하다면 된거지라며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청각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대로부터 꽤나 시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그다지 다를 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 귀를 보호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우리의 청력은 단지 들리고 안들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균형을 잃지 않게 해주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하고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아름다운 새 소리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재잘거림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관이다. 늦은 다음에 후회하지말고 지금부터 챙겨야 한다. 비싼 대가를 치룬다는 건 돈을 많이 들이면 다시 그 이전의 청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귀중하고도 아주 작은 기관인 우리의 두 귀를 이제부터 신경쓰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