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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May 13. 2016

나의 존재 증명

연결성의 위로, 친구에 부쳐


어른이 되면 끝날 줄 알았다. 이 지겨운 '나의 존재 증명' 시간이. 하지만 어른이 되자 더 복잡하고 미묘한 자기 증명의 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이제 나는 '너를 증명하라'는 각종 명령어에 무뎌지려고 애쓰는 중이다. 내가 쓰는 글, 내가 만드는 인연,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곧 '나'를 천천히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여울, 그림자 여행]




가끔은 내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쫓으며 사는지 잊는다. 그것은 온전히 지금 & 여기에 잘 머물고 있어서가 아니라, 잘하고픈 욕심이 내가 가진 실력을 이겨먹고, 시간 관리와 체력 관리에 패배한 까닭이다. 직장에 다닐 때만큼 시간과 장소에 메어있지도 않으면서 더 많은 순간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잊는다는 것, 매 찰나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으면서도 이렇다는 건, 조금 많이 서글픈 일이다. 


부끄럽게도 나이 서른셋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하루에 2-3시간씩 자는 것으로도 살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욕심과 자존심도 시시각각 다른 모양으로 치솟았다. 박사 과정을 시작한 것이 나의 내면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나의 외면에 또 다른 껍데기를 씌우기 위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순간순간 나를 사로잡는 두려움에 잠식당했다. 도망가고 싶을 때면 이 길이 나와 맞지 않다는 비겁한 합리화를 시도했고, 그러면서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에 제동을 걸지 못할 때면 나이 탓을 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사실대로 고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나의 존재를 증명해줄 무언가가 오로지 공부, 공부를 이어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속한 무언가로 정체성을 규정짓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었다. 유학 준비를 하던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백수로 지내며 그것은 내가 선택한 또 하나의 나의 존재 증명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홀가분했고, 차츰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집착이 사라지니 나의 무수히 많은 결핍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빈자리를 발견했으니, 그곳을 채우면 그 뿐이었다. 도전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빈자리를 발견하는 것일 뿐, 절대로 내 행복을 쥐고 흔들 대단한 무언가는 아니라 여겼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전이 합격으로 이어지자 마음이 또다시 욕심과 불안함으로 복닥거렸다. 아직 채 거머쥐지도 못한 것들을 놓칠까 두려웠고, 잘 해보자는 마음이 날카롭게 치솟아 여기저기 생채기를 냈다. 나를 증명할 것 하나 없다고 여기던 그때,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증명하던 그때가 되려 나 답다는 것을 두 손 가득 놓지 못할 무언가를 쥐어보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을 또다시 내려놓기 위해, 비워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를 반복하고 있다. 아, 인생이여! 


문득 돈을 벌기 위해 잠시 꿈을 뒤로 미뤄두었다는 친구의 마음 위로, 오로지 꿈만 보고 내던진 사직서 한 장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닌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지금 내가 머무르는 순간들에 켜켜이 쌓여가는 소중함도 알아차린다. 현재 내가,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누군가의 상실로부터 비롯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결국 하나가 무너지면 우르르 줄 지어 쓰러지고 마는 도미노 조각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이어진 기분이다. 


이어져있다는 것은 때로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아주 작은 결정이라도, 그것을 위해 온 우주가 응원을 보낸다는 코엘료의 어느 책 속 구절이 유독 마음에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 가깝고도 긴 여정 속에서 오늘도 숱하게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는 나의 자아를,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모양으로 반복하고 있을 너에게 보낸다. 우리 각자 홀로 된 싸움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 일정 간격 떨어져 서 있을 뿐, 결코 홀로일 수 없기에. 나를 떠돌아 찾아 헤매며 나에게서 멀어져 있던 그 시간, 나보다 더 나와 가까이 있었을 너에게, 더욱 열심히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기로 마음먹은 나의 오늘이 너에게 나비효과처럼 전해지기를. 비록 지금 우리의 주머니는 얄팍하기 그지없지만, 그것마저 함께 나눌 수 있음이 감사하다. 


2016년 5월 12일  



가장 먼 길 

(글. 유영일) 


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 길이 

그리 멀 줄을

누가 알았으랴.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한없이 그리운

당신,

내 안의 나.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그 길

돌고 또 도느라

수고하고 애쓴 

수천 생애의 눈물을

이제야 돌아와

햇빛에 널어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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