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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May 29. 2016

결핍을 사랑하는 방식

불완전함에 대한 고백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자기 문제일 때는 좀처럼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인이 같은 문제로 내게 고민 상담이라도 요청해오면 아주 쿨하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다 지나가." 하고 덤덤히 대답하며 어깨 툭툭 두들겨주면 끝날 일도 막상 내 문제가 되어 다가오면 아무리 떨쳐내려 애써도 떨쳐내 지지 않는 법! 그렇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려 애쓰던 방식과 맞물리게 되면, 내가 문제를 고민하는 것인지, 문제가 나를 지배하는 것인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지경에 도달하기도 한다.


2014년부터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하며 이 길이 나의 어떤 가치관을 반영하는지 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물론 영어와의 싸움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박사 과정으로 유학 올 정도이면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것일 텐데 뭘 그리 고민하느냐며 한심하다는 눈짓을 보내기도 한다. 즉흥적인 선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나브로 여기까지 흘러왔노라 대꾸하면, 그 선택들도 결국 너 자신이 한 것이라고, 그냥 지금 과정이 힘드니까 투정 부리는 것 아니냐는 핀잔이 보태진다. 말을 멈춘다. 그저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물며 살기로 다짐했던 것이 공부를 시작하고는 흘려보낼 수 없는 순간들로 하루하루가 점철되고 있는데, 미래의 무엇을 위해 나의 현재를 희생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는데, 그래도 나 이대로 계속 사는 것이 맞을까.



"공부가 재미있습니까, 괴롭습니까?"
"공부를 재미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괴롭기만 하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공부가 괴롭다는 사람도 합격은 행복하다고 말하죠. 그럼 공부해서 합격해야 행복할까요, 공부하는 게 행복해야 할까요? 합격은 행복하고 공부는 괴롭다는 말은 산에 오르는 건 괴롭고 산꼭대기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것만 좋다는 말과 같습니다. 꼭 정상에 오르는 것만 등산이 아닙니다. 꼭대기까지 오르면 좋겠지만, 중간까지 갔다 와도 실패가 아니죠. 운동이니까 내가 한 만큼 좋은 겁니다. 공부하는 즐거움은 없고 합격하는 즐거움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정은 없고 결과에만 집착하는 겁니다.


법륜 스님의 책에서 보았던 내용이 물음표를 그리며 한동안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 머무는 것이 공부하는 즐거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합격하는 즐거움을 위해 그저 버텨내고 있는 것인지 구분 짓기 어려웠다. 그저 학위를 취득한 이후의 뿌듯함을 그리며 지금을 버틴다고 하기엔 순간의 즐거움들이 분명 존재했고,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선택한 것이라 하기엔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저 게으름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고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해 보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그리고 내가 사랑받으며 존재하는 방식은 유년 시절에 형성된 '공부 잘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좋은 성적을 당연하게 여겨 내게는 잘 했다 칭찬 한 번 해주지 않던 부모가 남들 앞에서 은근히 나를 추켜 올려 세울 때, 아- 기억한다. 웃음을 참느라 입가가 간질거렸던 것을.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며 곤두박질친 성적은 나를 부모로부터 단단히 단절시켰다. 그 당시 친했던 친구 한 명이 엄마가 왜 이렇게 성적이 떨어졌냐고 꾸중을 하면, '엄마 닮아 머리가 나빠서'라고 대답한다는 이야기는 우스개 소리라기보다 생전 겪어보지 못할 인생 최대의 부러움이었다. 성적을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늘 팽팽했던 우리 집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화였다.  


장남으로 태어나 온 집안의 기대를 한껏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나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슬픔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더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어깨가 사춘기 시절 나의 그것과 너무 닮아 몇 번이고 울컥했다. 부모라고, 어른이라고 그런 책임들이 쉽게 감당이 되는 것은 아니겠구나 싶으면서, 그 순간 내 어깨가 여전히 가볍지만은 않은 까닭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가 되는 부모로부터 온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기던 사춘기 시절, 그때 나의 결핍을 채우고 싶은 욕망. 아무도 내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선택하며 끝맺지 못한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책상에 앉아 있으니 생각이 많아질 법도 했다.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선택의 이유들이 조금씩 명확해지자, 즉시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부모로부터 비롯된 인생을 멈추고 새롭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성실히 하던 숙제를 마무리 지을 것인가.



내게 '공부'는 지금껏 채워지지 않은, 어쩌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우물 같았고, 때로는 나를 신화 속 시지프스로 만드는 굴레 같기도 했다. 마침내 내가 원하던 곳에 다다랐을 때 마주하게 되는 낯선 진실 - 내가 어디에 다다르긴 한 것일까? 그저 중간 지점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적한 바를 달성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저 멀리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목적지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또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더글라스 케네디의 어느 소설 속 구절처럼 '우리 모두가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 일지 모른다. 그의 말을 계속 빌리면, 그 확인은 결국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두 서툴다. 사랑을 표현해야 할 시기를 놓치고, 적절치 못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때로는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오해를 사기도 한다. 사춘기 시절 내 부모가 내게 사랑한다고 표현했던 방식 역시 그러했다.  


나는 지난 시간의 결핍을 채우려 공부를 택했다. 결국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려고 공부를 택한 셈이다. 내 밑바닥에 퉁퉁 불어 터져있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유아기적인 존재 방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니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밀려왔다. 여전히 원인을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서른다섯의 내가 이토록 미숙하게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으로 내 부모 역시 나를 완전한 방법으로 사랑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했다.


나의 결핍을 사랑한다.

나의 불완전함을 사랑한다.

나의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사랑한다.

나의 정제되지 않은 사랑의 언어를 사랑한다.


인정하고 나니, 놀랍게도 공부의 무게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다. 정답을 알고 하는 숙제는 더 이상 어렵지도, 괴롭지도 않다.


2016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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