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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Dec 24. 2021

아놀로그의 반격

을지로 3가 지하철역 상가에 오래된 음반 가게가 하나 있다. 가게 앞엔 '폐업 처분 염가 판매'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데 그 가게 앞을 8년째 지나다녔지만 누구 하나 음반을 사는 사람을 못 봤다. '폐업 처분 염가 판매'라는 게 망해서 싸게 판다는 뜻이 아니라 다 팔려야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뜻인 양 그 음반 가게는 아직 잘 버티고 있다.  


음악 시장은 가장 극적으로 디지털 혁신을 경험한 산업이다. MP3가 등장하면서 불법으로 음원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음악 시장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아이팟과 아이튠즈가 등장하면서 합법 시장이 형성됐지만 몰락의 결정타를 맞이했다. 음악 시장이 디지털 혁신의 첫 희생자일 뿐 신문, 영화, 출판 등 거의 모든 콘텐츠 산업이 디지털 혁신을 피해 나갈 수 없다. 종이 신문 구독률은 20% 이하로 하락했고 수년 내로 종이 신문이 아예 사라질 거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영화, 출판도 쇠락의 길을 걷긴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게 디지털화되어가는 시대에 아날로그는 불편하고 왠지 앤티크(antique) 한 척하기에 좋은 취미로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기업은 디지털화=혁신으로 받아들이면서 디지털화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디지털의 아날로그 점령은 시간문제로 보이던 차에 LP와 필름 카메라가 다시 등장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하기만 했던 아날로그가 나름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데이비스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The Revenge of Analog)'에서 아날로그만의 매력이 있고 디지털 네이티브에게는 아날로그가 디지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들이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를 것으로 봤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의 시초를 제공한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일상생활에서 아날로그를 즐긴다고 한다. 빌 게이츠는 종이책의 빈틈과 여백에 마음대로 메모할 수 있는 종이책을 좋아하며 스티브 잡스는 불편하고 비싸지만 집에서 LP로 음악 감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오프라인으로 회귀하는 몇몇 스타트업을 봤다. 오프라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사용자경험을 주겠다는 게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디지털에서는 직접 만져보거나 나만이 소유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아날로그는 직접 만져보고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사람 간의 관계도 온라인에서 오래 알고 대화를 많이 나누고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오프라인으로 만나고 기쁨과 슬픔을 직접 느껴보는 게 인간 본성과 더 가깝다. 사람들이 그 가치를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 같다. 

세상이 디지털화된다고 해도 디지털 대 아날로그가 100:0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95:5를 넘어 파레토(Pareto) 법칙을 적용해 80:20까지는 지켜내지 않을까? 그 정도는 아날로그의 가치로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종이 신문을 생산하는 아날로그 회사에서 생계를 해결하고 한때 광적으로 음반을 사 모았던 취미생활을 했던, 그리고 여전히 책장을 넘기는 맛으로 책을 보고 있는 나로서는 아날로그의 반격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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