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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Dec 27. 2021

해어지다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소리로 보아 문제는 심각해 보였다. 고쳐서 조금 더 쓸까 이번 기회에 폐차할까 고민하다가 당장 차 없는 불편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고쳐 쓰기로 했다. 동네 자동차 정비소에 가서 '바퀴 쪽에서 심한 소리가 나는 거 보니 라이닝과 패드가 닳아서 그런 거 같다'라고 대충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폐차하려다가 정비해서 쓸 거라는 정비소 사장이 알 필요도 없는 말도 덧붙였다. 

내 생각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라이닝과 패드는 완전 녹슬고 닳아 거의 없어질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더 있었다. 정비소 사장은 정비소 일을 하면서 이런 건 처음본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이 지경까지 차를 놔뒀냐'라며 나를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나는 10여년 가까이 차를 거의 타지 않아 관리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2009년까지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했고 주말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매일매일 관리하고 상태를 파악하면서 조금만 이상해도 수리를 맡겼고 소모품을 갈았다. 하지만 출퇴근용으로 차를 쓰지 않고 아이들이 크면서 부모보다는 친구들을 찾기 시작할 때즈음부터 차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매일 쓰는 것보다 그냥 놔둘 때가  더 해어진다. 매일 양복을 입고 출근했었던 때엔 입을만한 양복이 몇 벌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양복을 입게 되면서부터는 입을만한 양복을 찾을 수가 없다. 옷장 속에 양복을 묵혀 두는 게 매일 입는 것보다 더 해어진 것이다. 집도 그렇다. 사람이 살아야 집은 집같아 진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은 금방 폐가가 되고 만다.

얼마 전에 만년필(라미 룩스)을 장만했는데 필기할 때의 딱딱한 느낌이 들어 '나랑 맞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더 싼 만년필(라미 사파리)이 필기감이 좋았다. 비싼 게 싼 것보다 더 나쁘다니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그 딱딱한 느낌을 참아가면 매일 쓰다 보니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길들어진 것이다. 

관계가 그렇다. 매일매일 쓰고 닦고 기름칠해야 부드러워지고 길들어진다. 아무리 돈독한 사이라도 방치하면 뻣뻣해지고 어색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물건은 해어지면 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람 간의 관계는 해어지면 헤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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