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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Dec 28. 2021

약속 지키기

점심에 지인과 낮술을 즐겼다. 오후에 인터뷰가 잡혀 있어서 인터뷰 시간 때까지 술이 깰 정도로 숨겨둔 보약처럼 아껴 마셨다. 하지만 최근의 정세를 논하고 역사 문제까지 얘기되자 아껴 마시기가 힘들어졌다. 술없이 마시기 힘든 반찬도 자꾸 술을 불렀다. 오후 약속이 클라이언트와 한 게 아니라 인터뷰였기 때문에 좀 마셔도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난 얼추 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낙엽처럼 불그스레해졌다.  

오후 인터뷰 약속 시간이 다가왔지만 얼굴은 여전히 가을 낙엽이었고 술도 덜 깼다. 취중 방송이 욕먹는 것처럼 취중 인터뷰도 나쁜 일이다. 그건 취중 합주와 취중 섹스와는 다른 문제다. 방송과 인터뷰는 엄연히 공공적인 일이고 비즈니스다. 나는 최대한 빨리 술을 깨기 위해 최소한 얼굴색만이라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연방 물을 마셔댔다. 하지만 생각보다 술은 깨지 못했다. 


이럴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첫째, 술이 깰 때까지 약속 시간을 미룬다. 이게 가능한 것은 상대방 사무실에서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을 늦춰도 그는 사무실에서 자기 일을 하면 된다. 물론 양해를 구해야 함은 당연하다.

둘째, 아예 약속을 캔슬 한다. 어쨌든 약속을 늦는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늦는 것보다 아예 캔슬하고 다음에 잡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셋째, 술이 덜 깼지만 인터뷰를 못할 정도는 아니니 약속 시간을 지킨다. 약속 시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였으면 세 번째 안을 선택했을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약속 시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정한 약속 시간은 무조건 지킨다. 10년 넘게 합주했지만 단 한번도 합주에 나가지 않거나 늦어 본 적이 없다. 나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엔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약속에 너무 연연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경직되게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약속 시간 지키는 것에 급급해서 약속 시간은 지켰지만 제대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시간을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내 상태가 안 좋으면 미팅도 제대로 못할 것이고 회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친구도 재미없어 할 것이고 합주도 잘 안될 것이다. 

일종의 절충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해만 구할 수 있다면 약속 시간을 조금 늦춰 상황을 좋게 한 다음에 그 약속을 이행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이번에 약속 시간을 조금 늦춰 술을 깨고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상태이고 시간도 많이 늦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인터뷰는 무사히 마무리 됐다.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약속을 미룬 건 내 잘못이다. 점심때 술을 조금 덜 마셨다면 분명 약속 시간까지 술을 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낮술은 정말 뿌리치기 힘든 유혹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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