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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Dec 31. 2021

퉁치다

퉁치다라는 말을 처음 배운건 중학교 시절, 집에서다. 소위 말해 우리 집에는 노다가꾼들이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른들은 의례 판을 벌렸다. 퉁치다는 화투판에서 등장하는 용어다. 난 중학교때부터 퉁치는 걸 숱하게 봐왔다. 


그러니까 이긴 사람이 기리(이 단어의 표준어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아무튼 화투를 무작위로 섞는 걸 말한다.)를 하고, 꼴찌가 화투장의 중간을 들어 바닥에 놓으는 걸로 화투판이 시작되는데, 퉁을 하게 되면 바닥에 화투패를 놓지 않고 바로 기리를 하게 된다. 어른들은 귀찮을 때, 또는 뭔가 변화를 주고 싶을 때 퉁을 쳤다. 간혹 힘이 들 때도 퉁을 치는데, 너무 힘들 때는 누워서 발로 화투패를 치면서 퉁하기도 했다.


퉁치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과 뭔가를 교환할 때도 많이 쓴다. 그러니까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게 있고 내가 상대방에게 줄 게 있는데 이럴 때 실물을 교환하지 않고 그냥 퉁침으로써 거래를 끝내는 걸 말한다. 예를 들자면, 친구가 나한테 잘못한 게 있어서 사과나 배상을 할 게 있었는데 나도 어느 날 친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때 퉁을 치면서 서로 없던 걸로 해결하는 것이다. 


잘못한 행위끼리 교환도 가능하지만, 친구에게 잘못한 행위를 좋은 쪽으로 갚는 경우에도 퉁을 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에게 미팅을 주선했는데 그 결과가 좋다면 친구에게 진 빚을 퉁칠 수 있다. 퉁칠 때 주고받는 교환가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그냥 쉽게 받아들이곤 한다. 퉁친다는 행위에는 정확한 교환가치로 교환되지 않지만 서로 없었던 걸로 하자라는 의미도 강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퉁치는 행위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혼자서도 퉁친다. 만약 나쁜 일을 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지난번 착한 일 한 게 있으니 그것과 퉁치면 같아질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나쁜 행위에 대해 핑곗거리를 찾는다. 또는 어떤 나쁜 일이 생기면 지난번에 좋은 일이 있으니 그것과 퉁친다면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혼자서 하는 퉁치기는 핑계이자 위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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