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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Mar 20. 2022

그날에 대한 생각

최초의 '그날'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때다. 우리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격리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도대체 여자들끼리 모여서 뭘 하는 걸까 궁금했다. 여자들끼리 뭔가 재밌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비밀스럽게 해야 할 정도로 특별한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남자들의 방해 같은 것을 받지 않고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에 몰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끝끝내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랬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이 여자들만이 하는 것이라고. 그날은 이름이 없이 그냥 그날이라고만 불려졌다. 여자들도 그날이라고 불렀고 TV 광고에서도 모두들 그날이라만 했다. 대학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주장해야 한다며 그날을 기념하고 그날을 위한 자판기를 학내에 들여놓자는 주장이 한참 얘기됐었다. 무려 30년 전 얘기다. 최근에서야 그날에 생리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그날을 뭐라 부르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대학원 다니던 어느 날 후배의 여자 친구가 드디어 그날을 시작했다며 온 가족이 모여 파티를 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 어이가 없었다. 별걸 다 파티하는 할 일 없는 집안이구나 생각했었다.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 일뿐이어서 그들과 함께 술 마시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하는 데 있어 그날은 나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거나 혹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날은 나와 상관없는 날이었다. 


그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제대로 된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부터다. 매일 같이 지내다 보니 그날이 언제인지 자연 알게 됐고 그날에 따라 데이트 코스가 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여자 친구와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면서 그날을 적나라하게 숱하게 봐왔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날은 더욱 현실적인 일이 됐다. 처음에 갑자기 아프다며 조퇴하겠다던 여자 사원을 보면서 '요즘 얘들은 참 끈기가 없어'라며 몇 번을 혼내고서야 나중에 그날을 눈치챘다. 요즘은 여자 사원이 아프다고 조퇴하겠다고 하면 군말 없이 바로 조퇴시켜 줄 정도가 됐다.

     

그날이 뿌듯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섭섭했던 때는 딸의 그날이다. 애엄마로부터 딸아이의 신체 변화를 처음 들을 땐 당황했다. 언젠가 올 일이지만 최대한 늦게 오기를 바랐는데 드디어 온 것이다. 센스 있는 멋진 아빠라면 뭔가 기념이 될만한 세리머니도 해줄 텐데 난 그러지 못했다. 딸아이보단 내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샤워를 할 때 훌쩍훌쩍 옷을 벗고 다닌 것도 문제고 같이 끌어안고 잤던 것도 문제다. 그것을 더 이상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슬퍼졌다. 신체적인 변화는 관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는 원심력을 가지면서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또래 여자들이 조금씩 지쳐가는 걸 보기 시작한 건 몇 해 전부터다. 그날이 끝나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제3의 성을 살아가는 친구도 있었고, 그날이 끝나자 급격한 신체 능력의 쇠퇴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지는 친구도 봤다. 남자들보다 더 빠르고 더 격하게 몸의 변화를 겪은 내 또래 여자들은 그렇게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날의 시작만큼 그날의 끝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만큼의 변화는 아니지만 여자의 그날이 시작한 것에 맞춰 남자들도 신체의 한 부분이 실해지는 것을 경험했고 여자의 그날이 끝나가는 것에 맞춰 이번에도 남자들은 신체의 한 부분이 허해지는 걸 경험하고 있다. 조금씩 그녀들과 함께 신체적인 쇠락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날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날이 아니다. 어머니, 여동생, 딸, 그리고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사람의 반은 여자다. 그들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 세상의 반은 그녀들이고 그녀들과 함께 살아왔고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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