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에 걸리지 말자, 조그만 버티자라고 했지만 결국 마지막을 버티지 못했다. 4월 4일의 일이고 4월 5일 266,208명의 확진자 통계에 1을 보태게 됐다. 이로써 나는 대한민국의 14,267,401번째로 확진됐다. 그 후 거짓말처럼 확진자 수는 계속 줄어들어 글을 쓰는 오늘 기준 일일 확진자 수는 5만 명 아래까지 내려갔고 2주 사이에 200만명이 더 확진됐다(누적 확진자 수는 16,353,495명). 정부도 2년 넘게 지속해온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전 해제했다. 마치 내가 걸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처음에는 왜 내가 걸렸지라는 자책이 들었다. 그리고는 언제 어느 순간 때문이었는지 추적했다. 그리고 알게 된 진실. 그때 조금만 조심했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 순간을 피할 수 없었는지 복기했다. 이미 결과를 뒤집을 순 없는 노릇. 격리생활을 잘 끝내는 수밖에.
일주일은 내 인생에 블랭크다. 혹시 내가 100년을 산다해도 일주일의 블랭크는 1/5200다. 짧다면 짧지만 영화 <인타임>에서 처럼 시간을 사고판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난 내 인생의 0.02프로를 허비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3차 백신 접종을 맞은 것보다 덜 아팠다. 확진자 선배의 말로는 확진되고 2,3일 내에 엄청난 아픔에 시달릴 거라고 했는데 엄청난 아픔은 없었다. 이 정도 아픔을 가지고 일주일씩이나 격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재수할때 결핵에 걸렸었는데 격리하진 않았었다. 결핵도 국가에서 관리하는 전염성이 큰 전염병이다.
대신 얇은 감기 기운이 계속해서 날 괴롭혔다. 격리기간이 끝나고 1주일은 더 갔다. 집에서 쉬었던 격리기간보다 더 힘들었다. 출근해서 일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픔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는 건가 싶다. 결국 집중해서 아프다 빨리 나을 건지, 아니면 얇게 아프면서 길게 갈 건지의 문제다.
집에서 그것도 한 공간에서 7일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했다. 나는 하루 이상 집에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다. 하지만 자포자기해버리니 맘은 편했다. 격리기간 중에 히가시노 게이코를 포함해 4권의 책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코 소설을 영화화 한 영화 몇 편을 봤다. 비틀즈의 중기 앨범을 들었다. 그때 마침 프로야구가 개막된 건 나에게 행운이었다. 야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주일치를 온전하게 감상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책 읽다 지치면 영화를 보고 영화보다 지겨우면 좀 자고 그러다 프로야구가 시작하면 프로야구를 봤다. 격리기간중 내가 응원하는 팀은 단 1패만 했다. 나의 격리생활을 응원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일주일 내내 가족들이 먹을 것을 챙겨줘 내 평생 3식 3끼를 온전히 먹는 일주일로 기록됐다. 3식 3끼를 온전히 챙겨 먹었던 적은 군대생활이 유일하다.
일주일을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오히려 마지막 날은 아쉬움까지 들었다. 0.1프로의 시간은 나름 유용했다. 인생에서 그 어떤 시간도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 일만 없다면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렇게 휴가처럼 쉴 날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격리생활에 봄햇살과 벚꽃을 보지 못하는 건 고통이었다. SNS에서는 만발한 벚꽃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우리 집 고양이 영심이는 나의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란다에서 마음껏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영심이가 부러운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격리 전까지는 코트를 입고 다녔는데 격리 해제하고 첫 출근에는 자킷만 입어도 더웠다. 겨우 일주일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나는 격리 해제하고서 제일 먼저 회사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서 마음껏 햇살을 즐겼고 벚꽃을 지겹도록 감상했다. 햇살은 마치 내 몸 안에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하나하나 죽이는 것 같았고 벚꽃은 시든 내 감성을 일깨워 주는 듯했다. 그날 본 벚꽃이 올해의 마지막이 됐지만 하루만 늦게 격리 해제됐으면 그것도 못 볼 뻔했다.
지인이 나로부터 전염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다. 확진받기 전 날 밤 모처럼 가족 외식을 했는데 모두 확진되지 않았다. 이건 대단한 행운이다. 가족 중 한 명만 걸려도 온 가족이 걸리는 판인데 우리는 식사까지 같이 했어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숫자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확진자는 나오고 있다. 이러다가 결국 사회경제활동 인구의 대부분이 확진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좀비가 되지 않으려 애쓰다 마지막에 좀비에 물려 좀비가 되고 마는 운명인 것이다. 좀비 영화 볼 때마다 저렇게 고생하느니 초반에 편하게 물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버티고 물리는 게 나을까?
확진자 선배에 의하면 아픔은 몇 주 뒤에 불쑥불쑥 찾아온다고 한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