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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Dec 02. 2021

참 잘했어요

친구와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카톡으로 그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2호선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는 역 안에서 지갑 하나를 발견했다. 누런 베이지색의 닳고 얇은 지갑이다. 겉모습만 봐도 대충 누구의 지갑인줄 알겠다. 돈 없는 20대 남자들이 가지고 다닐 법한 지갑이다. 지갑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 예상했던대로다. 운전면허증을 보니 88년생이다. 


88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지갑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7이었거나 89였어도 나는 지갑을 찾아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88은 내가 대학을 들어간 해이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을 들어갔을 때 그가 태어났다는 얘기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잃어버린 물건을 대학생이 갖는다는 건 도덕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리고 88이라는 숫자는 몇 전에 유행했던 88만원 세대를 떠올리게 한다. 88만원 세대의 물건을 갖다 주지 않는다는 건 도덕적인 걸 넘어서 범죄행위다.  


조금 더 들여다봤다. 몇 장의 신용카드와 현금카드가 들어 있다. 역시 젊은 남자들은 2,3장의 카드로 모든 걸 해결한다. 그리고 중요한 돈을 확인했다. 만 원짜리 네 장, 오천 원짜리 한 장, 그리고 구겨진 천 원짜리 세장. 

'음 4만 8천 원이구나'

2년 전 15만 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린 게 생각났다. 그러니까 돈은 돌고 돌아 오늘에서야 그 일부를 찾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껏 내가 잃어버린 돈과 주은 돈의 총액을 생각해보니 이번에 주은 지갑으로 거의 맞아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지갑 주인은 얼마나 애타고 힘들어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찾아주자'

그런데 그의 연락처가 없다. 지갑을 잃어버릴 것에 대비해서 자기 연락처를 지갑에 넣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귀찮음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젊은 남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대신 그의 지갑에서 거래처인듯한 명함을 발견했다. 다음날 아침에 거래처 직원으로 추정되는 명함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ooo님 아세요?'

모른다고 대답해 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지갑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나는 거래처 직원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지갑 주인의 번호를 받아 지갑 주인과 통화했다. 그는 잃어버린 지갑 때문에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어디서 찾았냐, 왜 거기서 발견됐는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 그리고 사례는 얼마면 되겠느냐는 형식적인 질문, 그리고 정말로 정말로 고맙다며 지갑을 찾아준 사람에 대해 작은 보람을 느끼게 하는 멘트들을 한참 늘어놨다. 나는 그 장황한 이야기를 한참 들어야만 했고 그에게 퇴근하면서 우리 회사 안내데스크에 지갑을 맡겨 놓을 테니 찾아가라 하면서 겨우 통화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오늘 나는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를 받았다. 도장 몇 개 더 받아 천국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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