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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Feb 11. 2022

배운다는 것

나의 드럼 실력은 공연을 하고 연주를 즐기는 수준은 된다. 이 수준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 그쯤에서 고민이 끝날 줄 알았는데 정작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조금 더 큰 산 중턱에 오를지, 아니면 지금껏 배운 것을 밑천으로 그 산 중턱에서 즐길지를 고민했다. 여기서 더 배운다고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까?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설령 내가 여기서 조금 더 잘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조금 더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야 할까? 과연 그렇게 투자해서 조금 더 높은 곳에는 갈 수 있기나 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따라다녔다.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러서도 어렵다. 배우자니 투자 대비 효과는 떨어지고 멈추자니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간 배운 것을 밑천 삼아 써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면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그 산 중턱에서 그저 즐기기만 하고 가지고 있던 밑천으로 버티는 건 어쩐지 나 자신을 속이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나이가 들수록 배움의 고통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써먹으려고 하는 달콤함에 빠져든다. 논쟁에서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계속 말한다.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는 사람은 배움의 고통을 견뎌내고, 그 배움을 바탕으로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들은 다른 사람 말을 주위 깊게 들으려 한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훌륭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배운다는 건 무언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는 것이다. 필요를 느꼈다는 것은 현재 나에게 부족한 것과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부족과 결핍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부족과 결핍은 특정 환경에서만 생기는데, 나이가 들면 편해지려고 하고 귀찮은 것을 싫어해서 부족과 결핍 환경을 아예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젊다는 것은 배움의 자세에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려고 한다면 아직 젊다는 것이고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미 늙은 것이다. 


로키산맥 동쪽에 위치한 아이다호 주, 벅스피크라는 곳에서 모르몬교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타라 웨스트오버는 9세까지 정식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았고 16세까지 정규 공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그런 그녀가 브리검 영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배움의 발견>은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과정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이다. 책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배움의 여정에 들어선 후 훌륭하게 차근차근 이뤄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인생 자체가 배움의 한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서태지와 양현석이 같은 클럽에서 일할 때였는데, 서태지는 김종서와 락밴드를 함께 했었고 양현석은 박남정과 댄스팀을 함께 했다. 서태지가 어느 날 양현석에게 춤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고, 양현석은 탐탐치 않게 생각했다. 양현석이 어디 클럽 가면 춤을 배울 수 있다고 건성으로 말했는데, 실제 서태지가 그 클럽엘 한 달 동안 찾아간 것이다. 한 달 동안 춤은 못 배우고 구경만 하다가 다시 양현석을 찾아 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고, 양현석은 석 달치 수강료로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인 450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양현석은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한 달 밖에 못 가르치고 떠나게 됐다. 서태지는 그때부터 록음악이 아닌 힙합, 랩에 관심을 가지고 춤을 배우러 갔던 것이다. 락 했던 사람이 춤을 배우겠다는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걸 배우기 위한 노력도 대단하다. 서태지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서태지와아이들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과 경험, 행동의 경계를 허물고 더 크고 깊고 넓게 나아가기 위함이 배움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배움을 통해 더 편협하고 더 틀에 갇히고 더 단정 짓게 되지 않나 돌아봐야 한다. 그런 지식의 저주에 갇힌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배움의 가치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자체가 배움이다.


배운다는 건 용기 있는 행동이다. 알을 깨는 고통과도 같다. 배우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이며 배움으로 인해 새롭게 인식될 세상에서 사는 것도 고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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