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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o Apr 11. 2021

작자미상 05-검은 개

-밤이란 이름의 나무로 둘러 쌓인 동굴 어딘가

 #1 

 이제는 희미하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더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웅크린 개처럼.
 이미 홀딱 털이 젖어서 칼바람에 오들오들 떠는 비 맞은 개처럼 덤불숲 안으로 숨어있을 때, 정원에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험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형체가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원체 빠르게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웅크린 개를 할퀴고 가버린다. 개는 그만 자신의 털을 우악스럽게 잡아 뜯는 무언가가 바람이라 생각한다. 귓속에 천둥소리 비슷한 게 한동안 쟁쟁인다. 쉬지 않고 바람이 일렁인다. 웅앙웅앙 속이 울렁거리도록 잠시 눈뜰 새도 없이 우악스럽게. 태풍의 눈은 굳이 그 덤불 하나를 꼭 집어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그냥 이대로 그 주위에서만 몰아친다. 너무 많은 시간 동안 태풍의 눈 속에 갇혀버렸다. 속절없이. 이제 그만 온전할 수 없을 거야. 이젠 어쩔 수 없어. 검은 개는 몸을 한껏 말며 떤다.


 무슨 우화처럼 폭풍의 눈 한가운데 갇혀버린 정원 속 그런 개처럼. 어쩌면 그 개보다 더 딱한 덫에 걸린 것 같다. 시간이 너무 많으면 독이 되는 것처럼,더 이상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피폐한 감정이 전신에 퍼진다. 그때부터는 어떤 대안이 없는데 함께 한다고 믿었던 주변 사람들이, 우정이란 판타지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정다운 사람들이 어느 순간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마치 인종 자체가 불결하다 소문이나 게토 안에 격리된 유대인들처럼, 내가 이동하는 곳마다 격리실이 새로 생기는 듯했다. 이제 옷도 편하게 입고 화장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얼굴을 가린다고 믿어 쓰지 않던 안경까지 쓰고 내가 생각해도 내가 변했다. 그전에는 화장이 사회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만의 원칙을 그에 맞추고 내 역할을 연기해 왔다. 꽤 오랫동안 손에 익지도 않는 펜슬과 브러시를 쥐고 씨름했다. 

 과연 무엇이 이토록 끈질기게 마음을 잡아끌었을까? 어떤 무언의 압력이 적성도 아닌 화장에 전전긍긍하게 만들었을까? 거기서부터 출발이었다. 블링 블링한 여성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방법을 실험하기 위해 머리도 단발로 커트하고, 안경을 쓰고, 민낯에 살랑살랑한 옷 대신 움직임이 편한 옷을 고른다. 그러자마자 사람들이 미리 약속한 듯이 주위로 흩어졌다. 마치 홍해 갈라지듯이. 이제는 내가 변해버렸다면서. 구제불능이라고, 이상한 데 빠졌다는 불편한 눈길로 흘겨 볼 뿐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모든 기대와 친근함이 부질없다. 그간 들인 모든 시간이 대화들이 따듯한 눈길들이 모두 가짜라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수업이 끝나면 딱히 만날 사람도 없다. 그 누구와도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 꼬박 수 천년을 이미 사람들에게 시달린 것만 같다.


 그래,지금부터는 진짜 나만의 길로 가는 거다. 누군가 손가락질하면 우르르 초원 위에 몰려서 보더콜리견 같은 양치기 개에게 몰임을 당하는 양이 아니라, 양 떼 안에 고만고만하게 섞인 아무 생각 없는 양이 아니라, 양치기가 파수꾼이 되겠다. 절벽으로 자신들이 추락하는지도 모르고 몰려가는 양 떼들이 아니라. 그런데 그런 나만의 길을 내 소꿉친구는 독단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너는 내 혼란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헤아려 줄 수 있을지 알았다. 그래도 너만은 조금은 헤아려 줄지도 모른다고. 그런 애틋한 망설임을 담은 청원에 너는 내가 지금껏 본 얼굴 중 가장 험악한 얼굴로 선언했지. 아무래도 내 생각은 불온한 것 같다. 


 빅 라지 사이즈 아메리카노도 바닥나고 얼음 빙하가 녹아가는 동안 오직 표정만으로도 다양한 욕을 할 수 있다는 걸 이미 증명한 너의 말들이 차가웠다. 이쯤에서 그만하지 싶다.한때 친구라는 사람의 그 무신경함에 서운했다. 그냥 이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청했다. 마음속은 이미 천 불이 나지만 지킬 건 지켜야 했다. 상대를따발총 같은 네 말을 멈춰세웠다.



“그냥 돌려서 말할 필요 없어.
 너도 더 이상 나하고는 연락할 필요를 못 느낄 거,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조금 비틀렸다는 거야. 그 생각의 방향이, 초점이 조금 빗나갔다고.”
 
 “그래. 뭐,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
 
 “아니, 나는 네가 세상과 싸우는 방법을 잘못 골랐다고 생각해. 그러니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만약 네가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편하게 만날 수는 없겠지. 예전처럼은.”
 
 “그럼 더 할 말이 없네.
 나는 네가 절박한 내 투쟁의 방식을 이해해주려고도 안 했다고 생각해.”
 
 
 “그래. 잘 알아들었어.”


  한때 친구라는 사람의 그 무신경함에 서운했다. 그냥 이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청했다. 마음속은 이미 천 불이 나지만 지킬 건 지켜야 했다. 상대를 그 자리에 두고 내 감정을 바가지를 씌운 채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방금 전까지 서늘하게 진행되던 파고를 뚫고 고요하게 밖을 나섰다. 그리고 너와 헤어지고 돌아서는 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점점 깊은 땅굴 속으로 내려가는 길에 조금은 울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지만 정말 끝이니까. 이제 정말 그 대단한 우정도 끝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수다 떨 수 있었는데 너랑은, 이제 그 편안함조차 모두 가짜가 되어버렸다.
  이제 긴 기억이 얽힌 사람들보다는 당장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만나는 사람들이 계속 겹치고, 다양하지 않게 되는 난점이 있지만 별도리가 없다. 세상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고 악의 축으로까지 묘사하는 마당에 차라리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과 모여 있는 게 단조롭지만 편안하다. 


 최선의 삶을 산다는 게, 이렇게까지 배척받고 기이한 사람으로 취급돼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채식주의자들이 어딜 가든 밥 한 끼 내 돈 주고라도 편하게 식사할 공간이 드문 것처럼, 이제 나도 특이한 식성을 가진 별종으로 취급된다. 내 식성을 조금이라도 내보일라 치면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진다. 예전에는 그런 배척에 더 분이 나서 더 세고 큰 소리로 이 떳떳한 개인의 취향을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젠 차라리 숨기는 쪽이 더 편하다는 걸 잘 안다. 왈가불가 하 봤자 그 싸늘한 시선이 인정으로 바뀌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저 때를 기다려야지. 절벽에서 쉼 없이 떨어지는 공을 언덕 꼭대기까지 굴려 나르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어떤 신처럼.


 나는 그저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한 뼘만 더, 

두 뼘만 더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찾아오고 싶었을 뿐이다. 


 어느새 방향도 없이 굴절하는 분노가 차곡차곡 마음속 깊은 우물가에 쌓였다. 요새 유행하는 아니, 프로이트 시대부터 장안의 화제였던 심리 상담을 받아봤다. 시간당 몇 만 원씩이나 하는 야근해서 모은 피 같은 돈을 지불했다. 일말의 가능성을 두고 수혈을 받아보고자 질렀다. 드디어 결전의 날, 작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심리 코디네이터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매스를 든 집도의처럼 내 표정을 요기조기 뜯어본다. 동시에 좀 티가 많이 나게 내 조각난 말들을 여기저기 헤집어보고 나름 맛까지 보았다. 실제로 이야기를 듣는 듯도 했다. 

 하지만 온갖 호의와 순수한 기대를 가지고 눈빛을 반짝인 지 십오분 내에 직감했다.시간 낭비란 걸. 메스를 가진 외과의는 오직 자기가 말의 주도권을 몰고 갈 타이밍을, 준비한 대사를 끼워 넣을 타이밍을 알아보고자 하는 때를 기다렸다. 초반과 달리 초점을 잃고 갈 곳 없이 부유하는 눈빛에 주의를 준다.


“이미 내담자께서는 부정적인 기운이 온몸에 가득 차 있는 상태에요.
  방금 전에도 제가 한 질문들을 모두 비관으로 스스로 몰고 가시잖아요.”
 
 “아니 저는 그냥 제 고민을 말씀드린 건데요. 걱정이 많은 게 걱정이에요.”
 
  자기가 처방해 줄 테니 증상을 말하래서 요새 불안이 불안에게 스스로 답하는 증세를 말한 건데, 그거 자체가 잘못됐다니 맙소사.
 
 “그러니까요. 마음의 준비가 되셔야 저도 도울 수가 있죠.
 아까 이미 말뿐인 상담은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아니요. 시간 장소 맞춰서 여기까지 온 건요, 말을 통해 도움을 받고 싶어서 온 건데. 

그게  아니면 돈과 시간을 들여서 굳이요?”
 
 “그러니까 그런 귀한 시간을 내신 건데 왜 계속 집중을 못 하세요?
  자꾸 이 한 번의 상담으로 모든 게 해결하려 하세요? 
  그렇게는 될 수가 없어요.”


 코칭 하는 이에게는 지금의 나의 불안이 제거해야 할 종양으로만 보이는 것 같다. 본래 자가 면역질환은 직접 살을 찧고 제거하는 종양 제거 시술과는 치료 방향이 다를 텐데도, 무조건 낭종을 째고 고름만을 빼내려고만 한다. 순간 스스로 억한 심정이 들었다. 나는 지금 왜, 이 자리에 다 죽은 시체처럼 앉아 있나. 꼭 중죄를 지은 수감자처럼.
 
 “계속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긍정적으로 건실한 쪽으로 생각을 돌리라고 말해주시는데,
 그 구호요. 그건 흔한 자기개발서에도 나오는 말이지 않나요?”
 
 “보세요. 또 비관 쪽으로 스스로 끌고 가시잖아요.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죠. 여기까지요.”


#3

 오랜만에 화석 현장에 들렀다. 로그인 연동이 풀린 지 오래라 비번도 기억이 안 났지만, 기어코 열었다. 정말 이젠 쓰지도 않지만 또 지우기는 아까워서 뒀는데 이걸로 뭐 하지? 뉴스피드를 위아래로 넘기다 알람이 떴다. 잘못 봤나 했다. 네 이름에 걸린 낯선 사진들. 원래 사진 같은 건 계정에 안 올렸는데 너는.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된 사진들이 즐비하다. 어색하다. 오랜만에 봐서 긴가민가한 그 애의 웃는 얼굴을 순간, 괜찮은 척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도 같다. 정말 네가 그 몇 년 새에 이렇게 변했을 리가 없어. 스스로 콤플렉스 덩어리이던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말이야? 스스로 도는 힘을 가진 것처럼 득의양양하게 승리자의 얼굴로.


 초등학생 때부터 너는 외모에 큰 콤플렉스가 있었다. 유난히 작은 실눈이 문제였는데,내가 보기엔 그냥 조금 눈이 작은 거지 그게 뭔 대수인가라는 생각했다. 눈이야 다들 가지각색이고 우리가 무슨 광고에 알맞은 스타가 될 것도 아닌데, 이미 백옥 같은 하얀 피부를 가진 네가 부러웠다. 내 피부는 두껍고 항상 까만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사람 얼굴에서 가장 먼저 보는 눈이 이렇게 실눈이라 좋을 게 없다 했다. 그래도 다들 자기 몸에 싫어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저 그런 푸념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때, 같은 반 남자애가 네 눈을 타깃으로 삼아 놀리기 시작했다. 낭랑한 초등학생이 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창녀라는 단어를 입말처럼 불렀다. 너는 무슨 애가 창녀처럼 얼굴이 더럽게 생겼냐고. 반 아이들은 그 애를 무시했고, 담임 선생님은 경악했으며 당장 그 애를 잡아다 주의를 주고 부모님까지 불려 오셨다. 하지만 그저 그때뿐이었다. 무슨 저질 오입쟁이에 빙의한 것마냥 상스러운 말로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게 자신의 유일한 과업인 것처럼 기회만 생기면 네 옆으로 가서 돌림노래를 불렀다. 

 그때는 그냥 재가 미친놈이니까 네가 무시해라고 말해 주었는데, 매번 미친 말을 하는 그 애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게 다였는데, 더 적극적으로 그 막말을 막아주었어야 했을까 하는 회환이 남았다. 정말 박치기라도 해서 싸우기라도 했어야 했을까. 애초에 너무 말도 안 돼서 분노하기도 어이없었다. 너는 그냥 무덤덤하게 그 말들을 넘겼다. 급식시간 그 애와 마주치면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 외에 그에 대해 별말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굽이굽이 흘러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회한 날, 너는 이제 갖 여섯 살 난 조카 이야기를 해줬다.


 “야, 요새 애들은 영악해. 누가 어린이가 순수하대?
 과자 사러 집 앞에 나갈 때도 우리 언니 있을 때만 같이 가자하고, 내가 대려 간다 하면 그 쪼끄만 게 뭐라는지 알아?”
 
 “왜, 더 비싼 거 산대?”
 
 “막내 이모는 못생겨서 같이 나가기 싫대. 안 나간데 나랑은 창피해서.”


 세상에 그런 허무 개그 같은 말이 다 있냐고, 원래 아이들이 그렇게 짓궂나 아리송이 한 채로 넘어갔다. 그 푸념은 그저 푸념으로 넘겼다. 그때가 아이의 편애가 강한 시기니까 네가 이해하라고 넘기고 몇 달이 지났을까?

 너는 갑자기 전화해 선언을 했다. 그 누구보다 결의에 찬 엄중함으로.
 
 “나 다음 달에 눈, 코하게. 상담도 다 끝냈어.”
 
  너는 자신이 정지해 있는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고 믿는 너에게, 그때는 자신 있게 해줄 말이 없었다. 나도 언제나 정체된 고인 물 같았고, 그 어떤 주목도 받을 일이 없는 어중이떠중이 중에 하나라 믿고 움츠려 있었으니까. 

 어쩌면 스스로 불리한 조건을 타고났다고 의기소침해하는 너를 얕잡아 봤을지도 모른다.무슨 애가 나이가 다 차서 저렇게 줏대가 없냐고. 내 머릿속에 성형이란 반드시 죽을 병이나 입이 안 다물어지는 턱관절 장애 같은 중대한 상황에서만 허락되는 수술이었으니까. 그런 완고한 편견 때문인지 너도 변했다는 내 멋대로의 실망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사는 곳도 학교도 달라서 자연히 멀어진 것인지 나는 굳이 너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점차 연락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러워졌다. 그 후로는 일 년 즈음 지나서였나? 언젠가 메일로 보고 싶다고, 내가 보고 싶다고 새 번호를 모른다고 연락 남겨주란 정성 들인 메일도 씹었다. 그냥 그때는 사람 자체가 불신이고, 부질없다 생각해 차라리 학창시절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지나왔고 이제는 아애 연락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지난 몇 년과 달리 인싸가 아니다.



  그저 세상과 불화하는 불온한 자. 아픈 인간. 스스로를 심술궂고 매력적이지 않으며 비관적이며 미신적인 자신을 그렇듯 형편없는 인간이라 말하는 도스토옙스키처럼. 나는 자주 꿉꿉하고 퉁명스러우며 세상을 향한 불만이 많은 투덜이다. 이런 입만 삐죽 나와서 갑자기 무슨 변덕에 휴먼 상태 직전인 페북에 접속했다. 그런데 어쩌다 끌려온 그 화석 안에서 너의 계정에 최근 메시가 떴다. 어라 요새 누가 페북을 쓰나? 일단 인스타가 아니라 페북에 새 메시지가 뜬 것도 신기 한데, 생전 프사나 셀카는 찍는 법이 없던 네가 꾸준히 일상 사진을 업로드하는 중이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정말 너무 오래 산 느낌이 든다. 이제 너는 여러 사람들과 그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새삼 환한 얼굴로 실로 여러 배경 속에 등장한다.  정말 열심히 여러 곳을 여행하고 들리고 웃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년 전만 해도 너는 목성 같았다. 끝없는 암흑물질로 퍼진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뜬 목성. 목성은 헬륨가스만 너무 많아서, 수소와 헬륨이 골고루 배합되어 땅이 있는 화성과는 다르다. 어쩌다 운이 안 좋아서 목성은 그 어떤 우주선도 정착할 수가 없다. 행성 전체가 하나의 온전한 별이 되기에는 가스만 자욱해서. 초등학생 때만 해도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뛰어다니면서 학교 후문 앞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놀던 네가 가졌던 아기 복숭아 같던 발그레한 뺨따귀를 기억하고 싶었다. 어쩌다 사람이 그 빛을 잃고 그토록 음침해졌는지 그 진실은 이미 나 자신이 버거운 나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분명 너는 뽀얀 요정 같았는데, 어느새 맨틀조차 형성되지 않은 가스로 가득 찬 목성으로, 우주선이 착륙하기에는 질량이 어딘지 모자란 억울한 목성이 됐다. 나는 이 별에서 뿌리박지 못한 나무로, 너는 저 멀리 대기권 밖으로 튀어나간 가스 행성으로. 영영 떠돌아다닐 것만 같았다. 친구는 닮는다고 그렇게 함께 영영 떠돌아다닐 것 같았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네가 성형수술 한다고 결의에 차 선언하던 그 겨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십년까지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뀔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나는 그냥 내 안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정작 너도 지나왔을 그만큼의 시간을 체감 못했을 뿐이지. 그렇게 한참을 박제된 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나를 잡아 불러도 못 알아볼 낯선 얼굴을. 하긴 너도 나를 못 알아보겠다. 그때만 해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돼서 한참 볼 터치에 뷰러로 쳐진 직모 눈썹을 한껏 올리는데 열중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당장 서로를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겠지. 

 일상 사진 속 네 표정이 말 그대로 환하다. 아무리 모두가 SNS용 사진 안에서는 새삼 완벽하게 밝다지만, 지금 너는 정말 스스로 내뿜는 빛을 가진 것 같다. 내가 사진 하나만으로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변했다. 너는 무언가 변했다. 바뀐 눈이나 코가 아니라 그냥 눈빛부터가 달라져있다. 괜히 속이 상한다. 너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는데, 세상 모든 또래들이 나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뒷걸음질 치는 것 같다. 지질하게 자기 자신의 발자국만 뒤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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