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잃어버린 친구에게 편지를
나만 이 세상에 홀로 방치된 기분이 든다. 대체 언제 야근하며 야금야금 먹는 박봉으로 힘을 내서 늙어가고 시간을 판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나? 하다못해 새삼 불쌍해 보이던 그러니까 저런 신경질적 성향으로 겨우 한 줌의 악마적 재능을 얻었겠거니 하고, 연민했던 도스토옙스키조차 이 비굴한 쫄보 보다야 팔자가 좋아 뵈인다. 생각보다 더 빨리 불시에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쓰던 이의 고독이 들이닥쳤다. 지하를 넘어서 심해 해저 부를 뚫고 수면 위를 달리듯 질주한다. 그 청새치들이 사정없이 이 어설픈 뱃사공에게 달려든다. 그 어떤 자비도 없이 양 뺨 귀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송곳 부리 주둥이를 날름대며 스쳐 간다. 그 와중에 나는 그저 방정맞은 비명만 질러댄다. 배 갑판에 찰싹 붙어서 울며 소리 지르며 이내 배가 뒤집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요새는 회사 출퇴근 외엔 무기력해서 팬 같은 건 쥘 힘도 없지만, 아니 애초에 팬을 든지도 언제인지 둔탁한 액정판 키보드의 진동만이 미세하게 남았지만. 그대로 오늘은 쓴다.
그래, 오늘은.
애초에 보내지도 않을 편지를. 오랜만에 메일을 보내보자는 핑계로 쓴다.
단 하나의 독자에게
언젠가 밤이란 이름의 나무를 심고 언덕을 넘어왔다.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어.
잠시라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어.
우주야. 나는 네 이름이 좋아. 아포리즘처럼 이름 그 자체로 다른 이야기로 확장되는 너의 이름을 좋아했어. 그리고 여전히 나는 아포리즘이 좋다. 여전히 너의 이름을 좋아하는 것처럼. 새 학기 한동안 계속 우주를 지구라고 바꿔 불렀었는데 기억나? 그건 버릇이라서 중학교 때도 그랬어. 새로 전학 온 베프가 있었는데, 주희를 희주라고 계속 바꿔 불렀어. 그런데 너는 아주 옛날 노래 제목 하나, 가수 이름 하나 정확히 매칭해서 기억했잖아. 디제이처럼 대충 가사만 얼버무리면 인간 빅스비처럼 찾아줬었지. 그땐 네가 기어이 찾아내주는 노래의 이름들이 아포리즘이었어. 흩어진 말들이 언제나 하나로 모아졌지.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경구들이 온전한 언어가 아니라고, 원전의 앞뒤 문맥을 싹둑 잘라버리고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뽑아낸 텍스트 읽기는 진짜 독서가 아니라지만 말이야. 여기저기 조각난 언어들이 제각기 다른 말투로 수다를 떠는 게 좋아. 꼭 나같이 스스로 말하다가 사례 걸리고마는 투 머치 토커처럼,어쩌면 나보다 더 한 사람들이 수다를 떠는 걸 보면 위안이 되거든.
무엇보다 그런 옛날부터 말이야, 사람들이 저마다 살면서 느낀 후회들이 세세한 모래알들이 해변가의 파도로 밀려와 그 알싸한 느낌이 좋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말로 표현해내지도 못할 이상이 있지만, 애초에 유토피아의 어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니까. 그 세계로 갈 일말의 희망이라도 발가락 한쪽이라도 들이밀어 볼 가능성이 있다면 그 위안으로 살 텐데 요새는 그마저도 없는 것 같아.
다들 대체 무얼 바라서 꾸역꾸역 사는지 중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주말에도 아르바이트하다가 문득 영 앤 리치인 뮤지션이 자살했다는 속보에 허탈할 때처럼. 저런 잘난 사람도 가는데 이 어중이떠중이는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아둥바둥일까 말이야.
엄마는 그래서 내가 자신을 어떤 순간이든 안 미치고 오래 살 거란 덕담 아닌 덕담을 해줬어. 자기합리화 하나는 아주 치밀해서.
누가 투 머치 토커 아니랄까 봐 이러다가는 괜한 A4용지 한바닥을 더 채워야 성싶다. 아무리 글이란 게 말과 달리 청자가 없이도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가는 세월 제한 없이 쓸 수야 있다지만, 이러다 호접몽처럼 꿈꾸는 내가 나인지 내가 나인지 분간이 안 갈 것 같아 이만 멈춘다.
이번에는 얼마 전 손절당한 주희,아니 희주에게 쓴다,
너에게 쓴다.
작년에 니가 강추한 소설 이제야 읽었다.
너만 당할 수 없다는 심보였냐, 무슨 생각으로 끝까지 읽어도 줄거리가 심란한 걸 읽으랬어?
작가자체는 이력이 특이한건 맞어.
듀나반스.
1900년대 태어나 거진 100년을 살았는데, 아니 1890년대 태어났나 하여간.
네가 유난히 과거의 사람들에게 생물연대가 100년은 넘어가야 재밌어하는 건 알지만.이건 천일야화급이다. 물론 천일야화야 미친 왕한테 잡힌 공주가 왕의 비위를 맞추며 목숨 걸고 하는 이야기다보니 주제가 삼천포로 계속 가는 거지.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주제를 바꿔야 하니까! 그런데 이건 무슨 이야기가 줄거리가 없냐. 나는 오직 책을 재밌으려고 읽는데.
그래도 책 띠지에 붙은 평은 나름 간지다. 그녀는 어둠에 대해 쓸 수 있었던 작가 다란 말. 본론보다 그게 더 꽂힌다. 실제 밤에 대한 이야기는 맞지. 제목도 그녀 자신이 만든 단어를 사용하잖아. 밤이란 나무. 밤이란 이름을 가진 나무. 어두운 밤거리를 쏘다닐 수밖에 없는 낮에는 주로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천일야화. 그들은 밤에만 무대로 나오는 자들, 평범함 안에 속하지 못하는 자들이지. 하지만 껌껌한 밤의 숲에서 개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굳이 발버둥 치지 않아.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그냥 그곳에 존재해. 나처럼 유난 떠는 기질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대려 다 읽어도 줄거리조차 알 수 없는 글이, 대려 사실적인 것 같아. 너무 조밀하고 완벽하게 서사가 구축돼서 그 생생한 인물에 스며들어 가랑비에 옷 적든 읽는지도 모르는 소설보다 더 삶 같아.
나는 요새 안 죽으려고 운동을 해. 허리 안 아프게 책도 보고 사는 맛을 느끼려면 몸부터 살아야겠더라. 그런데 일하면서 등산가기 애매할 때가 많아서, 기부의 늪으로 유명한 명소에 갔지. 나는 다를 테니까, 남들은 의지가 약한 거지. 그간 피땀 눈물로 모은 거금으로 피티까지 끊었어, 일단 안 하는 것보다야 하니까 몸이 나아질 거라고만 생각했지. 무슨 경기하듯이 피티를 했어. 한 번은 열정 과다로 무리하게 동작을 따라 하다 응급실에 실려갔지. 그런데 그날은 무슨 날인가 나와 같은 동지들이 정형외과에 천지인 거야. 너무 흔해서 발에 치일 정도로. 알고 보니 그 해에 티브이서 유행하는 웨이트 운동을 너도나도 뼈가 나간 동지들이었지. 건강이란 명목하에 교묘하게 평균적인 몸만들기에 빠져버린 우리들.
그 후로 나는 뼈가 쿠크다스가 된 채로 운동은 반년을 쉬었어. 예전에 통도사에 가서 같이 찾은 목각 모빌처럼. 대웅전 천장에 매달린 그 아기 중생처럼, 그 도자기 모빌처럼 매달리기만 했던 거야. 그 운동을 하는 목적을 홀라당 잊어버리고.
뜬금없는 비유지만 요새 하도 마르크스 탄생 100주년이라 여기저기 그 사람 일화가 유령처럼 떠돌아. 요새는 계속 그 한 장면이 떠올라. 낡고 오래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전당포 말이야. 마을 사람 모두가 아는 없는 물건이 없는 전당포.
당시 가난한 독일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그곳에 마르크스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 자본이 가진 태생적 불능에 대해 쓰면서, 정작 자신이 그 시스템에 얻어맞는 중이었지.당장 기술자들이나 사업가처럼 성과를 내지 않는 연구자는 돈을 벌 수가 없어. 그나마 부자 친구 엥겔스한테 빌붙어서 연명하는데, 죽기 몇 달 전 겨울에 그렇게 추웠는데 코트 하나 없었대. 매번 생활비 대용으로 전당포에 맡겨서 코트는 언제나 가출 중이었지. 하지만 그 짓을 한두 번도 아니고 거진 십 년은 넘는 시간 동안 그가 죽기까지 반복됐지.
가끔 멍 때리면 그때의 전당포에 간헐적 코트 맡기기랑 이 모든 일들이 같은 사태란 생각이 들어. 저당 잡히고 다시 찾아오고 다시 잡히고 빙판으로 언 거리를 종종 걸음 치는거지.
오늘도 별이 세도록, 누군가에게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쓴다.
아니, 썼다 지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