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장난감 가게에서 동화처럼.
언젠가 꿈을 꾼 적이 있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먼 곳에 오래, 오래 그리워한 사람이 있다고. 실제는 몸종들에게 둘러싸여 아무 일도 없는 삶을 살던 중이었지만, 어떤 믿음이 있었다. 나조차도 내가 왜 이런 기이한 망상을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잠시 그런 상상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싶었지만. 아이들은 아이만의 꿈을 간직한다니까 뭐. 이제나저제나 볕을 쐬어본다.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아무리 볕이 좋다 해도, 이 정도는 몸이 상하십니다.
다정하지만 너무 걱정이 많은 사람.
사람이 나이가 드니 더더욱 노심초사해 졌다.
-자네는 아주, 너무 걱정이 많네, 햇볕이 좀 강한 거야. 이 나라서 어디 하루 이틀인가?
이 땅에서 나만큼 보호받는 사람도 다 있다고 무슨.
이제는 쇠잔한 노신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다. 자네도 그만 나 같은 치를 보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어도, 이놈의 성미가 본디 이래놔서.
-자네, 어머님 정원의 올리브는 받고 가지, 뭘 그리 빨리 가나?
실없는 사람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뒤로 물러난다.
그럼 그렇지, 저 양반이 평소 살가운 적이 있었나.
-그런데 왕자님.
이미 가 버린 줄 알았는데, 어느새 어깨 뒤로 다가와 그이가 조심스레 말을 건다.
-뭐야, 무슨 사람이 그리 발소리도 안나? 유령이라도 되나 보지?
-다름이 아니라, 주위를 무르고 드릴 말씀이라,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던 시종들이 부채 부치기를 멈추고, 일제히 뒷걸음친다,
- 아예, 물리소서.
이제 훤한 곳에 노신과 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려는 건가싶지만 인사치고는 그이의 얼굴이 자못 심각하다. 그리고 뜬금없이 무릎을 꿇는다.
-자네는 무슨 놈의 인사를 이리 소란스럽나?
- 왕자님.
뭔가 싸하다가 직접 이름에 호칭까지 붙여 날 부른 적이 그전에도 있었나, 어린 시절부터 늘 그림자처럼 봐오던 사람이 저리 각을 잡으니 범상치가 않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뭘 그리 정색을 하고서.
-본의 아니게 보았습니다. 용서하소서.
-아, 혹시 자네 이미 노망이 와서, 고향으로 내려간다 청한엔가?
그렇다면, 피차 나 또한 할 일 없이 한가한 것은같은 처지이니, 내가 자넬 책임지지.
-언제부터 모으신 겁니까?
정말 무얼 알고 저러는 건가?
-다시 여쭙습니다. 그 이전에도 시도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 무얼? 자네 입으로 똑바로 말하게.
-자하 방에 숨겨두신 각종 독약 말입니다.
-아, 새삼스레 내 취미네만, 언제 들어라도 가봤나? 주인 허락도 없이.
-알현할 적마다 바닥에 뜨는 부분이 언젠가부터 느껴져 그만.
하, 얼마 전 뭔가 지하방 사다리가 꺼진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자네였군.
-별거 아니네, 봤다시피.
수심에 찬 얼굴로 올려다보는 그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만 가시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여전히 물러가지 않았다.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 뭐, 지금에 와서 무얼 말한대도 자네의 꺼림칙함은 못 걷어내겠지.
원래 자네, 사람이 좀 고지식하니. 허니 내가, 자네에게만 말해주지.
면전에 조아린 그의 얼굴을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대단한 선언이라도 하듯이.
-안쓰러워할 필요 없어. 그 처음부터 내 유일한 꿈은 모든 걸 그만두는 거네,
그 착한 둘째 형님도 급사했다는데, 창창한 나이에 지병으로.
-차라리 도망을 치십쇼.
그간 좀체 감정이라곤 드러내지 않던 사람의 얼굴이 한낮의 고비 사막의 사막처럼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차분해진 그이가 모든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나는 졸지에 다른 세계로 가는 우물에 자진해 몸을 담가 여기에 와 있다.
이 이야기를 한다고 누가 나를 믿을까? 당장 내 옆에 앉은 버니 인형이 털만 풀풀 날리며 내 머리를 쥐어박고 있는데, 그 노인은 하여간 부작용은 항상 말을 안 해줘?
내 상황에서 이건 밑져야 본전이라 이건가?
-두고 보자 하니까, 야, 구체관절 인형아?
어디 관절이 좀 구부러진다고 지가 사람인 줄 아나보네?
-그러게, 넌 그냥 인형이야! 어디서 왕자고 아라비아고 사기를 쳐?
야, 요새 우리도 건너 건너 만화도 다 봐, 너도 천일야화 보고 왔냐?
-내가 너희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나는 다른 나라에서 왔다 하여간.
-하여간? 하여간? 보자보자 하니까, 그러든 말든 자세나 고쳐 앉아.
그렇게 거만하게 드러누워서는 시답지 않는 자세로 누가 사가겠냐?
낮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켜지면, 쌈짓길이랬나, 어디 작은 골목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나는 저렴하게 전시되어 있다. 손님들이 몰리는 시간이 되면 때가 탈까, 플라스틱 케이스에 갇혀 전시된다. 무슨 이유에선지 최초로 이곳에서 눈을 뜬 뒤로, 빛이 들이차면, 온몸이 마비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깊은 물에 잠긴 것처럼, 오직 밤이 되어서야 팔과 다리 손끝이 차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간 여기서 지내 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그렇단다.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햇빛이 드는 날에는 입까지 안 움직인다고.
아니, 그럼 그 주인들에게 우리가 움직이는 게 보이나? 주인이 생기면 다시 자유롭게 어느 시간대든지 움직일 수 있나? 나는 해가 좋으니, 햇빛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싶다 하니, 심히 무례한 버니가 대꾸 한다.
-아이고, 니가 무슨 해바라기냐? 꿈도 야무져.
순간,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고, 나도 억하심정에 응수해봤다.
- 자네는 어찌 그리 말을 하나하나 얄밉게 하는가?
항시 그리 말하니, 그 털까지 삐죽삐죽 얄밉게 보이네만.
그래서야 어디 누가 데려가겠나?
순간 버니가 거대한 앞발로 내 터번 끝을 훽 잡아채더니, 내 뒷통수를 쥐어박는다.
-어이, 거기 구체 관절씨, 댁이나 살갑게 말해. 어디서 지적질이야?
얼굴은 그리 귀엽게 생겨서는 하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아치다. 풀린 터번을 다시 말아 올리면서 눈물이 찔끔 나는 걸 숨겼다. 그나마 친절한 포세린 인형이 떨어진 장식 솔을 주어주며 알려준다. 자기들도 공장에서 나와 주인을 만난 몸 움직이기에 적응한 지 얼마 안 가 버려져 잘 모른다고, 직접 경험한 바로는 새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녁에만 움직이게 설정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니 대체 누가 그런 설정을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순간 기함을 해버렸다. 그럼 인형은 자유의지도 없는 거냐고? 이 발끈하는 성미 탓에 또 일이 생겼다. 다들 나를 이상하게 씩씩거리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게 무슨 발끈할만한 일이냐는 듯이.
- 야, 그래서 누구한테 가서 따지게?
일단 여기 너무 오래 자리만 차지하다 악성재고 되잖아?
그럼 너는 바로 그냥 화형이야 화형!
미화원이 쓰레기봉투에 찹찹 묶어서, 어느 통에다 묶어 버린다고!
- 지가 왕자라고 온갖 똥폼 잡을 때부터 알아봤어, 저런 애들이 꼭 안 팔리더라.
눈과 귀는 순하게 쳐져서는 막말의 달인인 스누피 인형이 삿대질을 한다.
- 눈에도 화장을 무슨 너구리만치로 스모키하게 해서는, 쯧쯧.
너 그거 못 지우냐?
이제 하다하다 남의 얼굴로 인식공격하다니, 서럽다. 여기서는 또 안 끝나지, 꼭 그 흰 개 옆에 앉아서 말 하나 덧붙이는 쪼매난 노란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먼지를 흩뿌린다,
- 저기 왕자님,
이렇게 밤에 보면 얼굴이 괴상해요, 거울 좀 보고 다녀요!
- 왕자야. 근데 말이야, 그 눈 화장 진짜로 안 지워져?
어디서 갑자기 온몸에 때가 탄 곰돌이가 나타나, 무턱대고 얼굴에 손을 갖다 댄다.
참으로 무례하다. 어디 남의 얼굴에 허락도 없이 막 들이대는가? 이게 무슨 과한 요구나 응대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 상식적으로, 그래 그냥 말을 말자. 나는 그저 앞발을 피해, 때맞춰 돌아앉았다. 이 좁은 선반에서 어디 넘어갈 데도 없고.
아무래도 낮에도 몸이 안 움직이는 게 영원히 나을 성싶다. 움직여봐야 이런 말들이나 무슨 죄인처럼 들으며 앉아 있어야 할 게 뻔하니.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다른 인형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그 온갖 수난을 몇 달째 겪고 있자니, 어느 순간에 익숙해지다 못해 적응해 버렸다. 저들도 작은 찻잔에 갇혀 스트레스로 날이 선 것이지, 풀 데가 날이 선 말뿐이라 그렇겠거니 넘겨오던 중 그 애를 봤다.
우리 가게가 아니라 맞은편 헌책방에 드나드는 아이를. 매일 같은 시간에 교복을 입고 혼자서 서점 바깥에 펼쳐둔 좌판에 머물다 간다. 얼마간 숱 많은 곱슬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가 귀밑에 떨어지는 단발로 변해있더니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왔다. 생에 처음으로 눈이란 것도 봤다. 곳곳이 사막인 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안 했던 새하얀 알갱이들이 하늘에서 펑펑 날렸다. 그렇게 얼마간 쇼윈도 유리판에 붙은 서리가 되어 시야를 가렸다. 밤에 미리 움직여 거울을 헌책방이 잘 보이게끔 비쳐놔도, 별 소용이 없었다. 날이 너무 추워서인가, 그 애가 통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쇼윈도 밖 수많은 사람 중에 그 애에게 눈이 가는 걸까? 매번 좌판에서 찾아가는 책들이 달라서? 어차피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았음에도 책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에이 모르겠다. 지금 내 처지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이렇게 뒷모습만 보아오던 아이를 기다리는 게 어떤 치밀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걸까? 그저 마음이 가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내가 온 세계에서나 여기서나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노 시종에게도 나와 같은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우물을 통해 다른 나라로 넘어갈 기회가. 물론 어떤 모습으로 영혼이 옮겨갈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운 좋게 한 번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도서관을 지키는 이로 살 수 있었다 한다, 얼마간은 실제 사서로 도서관을 들르는 사람들도 구경하며 지냈었다고, 그런데 왜 다시 돌아왔지? 그것도 천한 몸으로 살아야 하는데도?
하여간 싱거운 양반이다. 나처럼 뽑기 운이 잘못 걸려, 팔리기만을 기다리며 진열장 속에 갇힌 것도 아니고, 뽑기도 잘 걸렸구먼. 어디 뽑기 운이 좋아 노비도 아닌 자유인으로 딱 맞는 직위로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가지 않았다는 건 그대로 핑계 같지만.
오늘도 맞은편 가게에 오랜만에 들른 그 애를 봤다. 마음 한구석이 자연스럽게 따듯한 파도가 일렁거린다. 끊임없이 점으로 종종걸음으로 지나 골목 사이로 사라져가는 그 애를 쫓아본다. 어쩌면, 핑계가 아닐지도. 그 어리석은 노인네.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창가에 그 전날 잡은 자세대로 창가에 기대앉아 있던 어떤 날,
그 애가 헌책방에서 곧장 우리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창창한 모빌소리가 울리고 가게 현관문이 열리고, 겨울 코트를 목 위까지 잠근 아이가 해맑게 들어온다. 고개를 돌아앉을 수가 없어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생생히 느껴졌다. 지금까지 정면으로 마주한 적 없대도 오래간 집중 해서 봐왔으니까. 언젠가 만날 수도 있다고 믿었으니까. 나를 제일 미워하는 버니 인형이야 콧방귀 끼다 못해 내 근거 없는 망상에 분노하겠지만. 그 애가 곧장 진열장으로 다가와 나를 안아 들었다. 별 망설임도 없이 나를 구매해 자기 가방 안에 넣었다. 지퍼가 닫히는 찰나에, 버니의 다홍색 털이 삐죽 서는 걸 보았다. 우리는 낮에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들인데, 얼마나 놀랐으면 털이 먼저 반응할까? 그것참 꼬시다. 꼬셔.
이제 내게도 머무를 곳이 생겼다. 그 애가 침대 옆 스탠드 옆에 나를 놓아두고 나가면, 다시 혼자지만 나름 친구도 생겼다.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필요한 살림살이만 있는 하얀 방에는, 그 애의 반려묘 깜대 이와 내가 있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털에 반짝이는 에메랄드 눈을 가진 고양이는 말이 없어도 온몸으로 상냥함을 표현하는 요물이다. 그새 친해져서 내가 살짝 휘파람을 불면 그대로 달려와 콘솔 밑에 대기한다. 그럼 나는 폴짝 뛰어내려 그대로 그 녀석 등에 타서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 애의 집은 혼자 살기 딱 좋게 단출하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아늑한 집이다. 너른 거실 위에 냥이와 나란히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가끔 이대로 둘이 해가 질 때까지 잠든 적이 있어서 그 애가 집에 들어와 놀란 적이 있다. 아무래도 냥이가 방 안에 들어가 물건을 함부로 물어 온 걸로 안 모양이다. 그 이후로 얼마간 냥이는 기가 죽어 내게 오지 않았다. 그래서 좀 쓸쓸했으나 그 사이, 그 애와 나는 조금 더 친해졌다. 그 애가 자기 전 나를 머리맡에 두고 읽어주는 책들이, 물론 그 자신을 위해 소리를 내 읽는 것이겠지만,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꼭 나를 동등한 친구로 두고서, 조곤조곤 정성 들여 이야기해주듯이, 가끔 오늘 하루 있던 일들을 덧붙여 이야기해줄 때면 정말 그 애와 진짜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나이든 노신 외에는 아무도 없던 내게 두 친구가 생겼다. 인생은 뭐 아니면 도라더니, 일단 미친 말일지라도 속는 셈 치고 넘어오기 잘했다. 영원히 이곳에서 살 수 없대도, 일단은 좋다. 지금이 좋으면 된 거지 무얼 더 바랄까?
하지만 이제는 더 큰 욕심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그 애가 나를 움직이고 나만의 생각을 하는 생물로 인식해 주기를 바랐다. 그전에는 아늑한 곳에 누구의 방해 없이 혼자서 고른 햇볕을 쬐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는 그 애와 말을 하고 싶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나는 오늘 무얼 했는지 말해주고 싶다. 집 안에서 냥이와 함께 별일이란 없지만, 베란다에 나가 사람들 구경한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혹시 그 애가 나를 겁내면 어떡할까? 혹시나 내가 말하는 인형인 걸 알면, 저주가 들린 물건이라고 겁에 질리면 어쩌지?
똘똘한 우리 까망이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갸르릉 거리며 내 얼굴을 앞발로 쓰다듬어 줄 뿐 별말이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그 녀석이 만약 너를 분리수거장에 버리면, 내가 한두 번쯤은 도로 물어다 준다는 말이었다, 근데 너 밖에 나갈 줄은 아느냐고 되물으니, 아주 우아하게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저것은 냥이 특유의 허세인가, 아니면 정말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너무 얕잡아 보아 짓는 표정이었나? 실로 분간이 안 갔다. 그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상이 지나가고, 나는 이제 낮에 움직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지가 오래되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척 연기를 했다. 가끔 그 애가 나를 옆에 두고 소파에서 잠이 들 때 떨어지려는 안경을 잡아 준 적이 있었지만, 그 애는 눈치채지 못했다. 차라리 우연히 그 애가 알아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던 어떤날, 소파에 멀쩡히 앉아있던 내게 다가와 터번을 물어 당긴 적이 있다. 마침, 주방에 마실 걸 가지러 갔던 그 애가 반사적으로 터번을 잡아당기는 나를 보고 말았다. 이제 모든 게 끝이라고, 나는 어느 포대기에 버려져 사라질 거로 생각했다. 순간 억울해서 눈물 콧물이 나더니 온몸을 웅크리고 엉엉 울어 버렸다. 당황한 까망이가 달려와 얼굴을 핥아주는데, 그 애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 애는 놀라지도 않은 눈치다. 차분히 감다 반 내 터번을 야무지게 꽁지까지 묶어주었다.
- 네가 밤마다 까망이 등에 타고 움직이는 걸 봤어.
-그런데도 내가 무섭지 않아?
그 애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이건 대체 꿈속의 꿈인 걸까?
-사실, 어릴 때부터 사물들이 말하는 걸 들어왔어.
저 창가의 화분들도 까망이 말도 다 들려 나는. 물론 나도 들키면 안 돼.
유치원 때 그걸 엄마한테 말했다가, 귀신이 들렸다고 전국팔도 유명한 점집에 더 굿도 지내고, 정신과도 수시로 다녔어.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진짜 친구가 됐다. 우리 까망이와 너랑 나랑.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끼리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을 보내며, 어느 날부터 나는 네가 나가고 난 집을 가꾸고,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다. 매일 내가 넘기면서 밖으로 나가는 일력을 보고, 나도 나만의 일력을 만들었다.
제목은 오늘의 행복한 일력, 오늘 네가 나가 있는 동안 보낸 나의 하루를 그림으로 그날 하루하루를 그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네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파는 가게에도 같이 다녔다. 가방 안에 담겨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으면, 너는 디저트를 먹고 평소 가지고 다니는 책을 꺼내 읽으면, 나는 창밖을 구경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이 집의 작은집요정이 되어, 까망이가 흘린 털들을 열심히 굴려서 작은 털 인형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그걸로 아예 동물농장을 만들었는데, 처음엔 그 털 뭉치를 경계하던 까망이도 이젠 그걸 굴리고 우당탕 신나게 논다. 그 중 일부는 키링에 달아서 네 가방에 메어주었다.
이제 나는 다른 나라에서 다시 살게 된 것을, 어떤 모양으로든 숨 쉬게 된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됐다. 그전의 권태로운 감옥에 갇힌 영혼이 해방된 것만 같다. 이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봐야 겠다. 아직 제약이 많지만, 소리 내지 않고도 너와 대화할 수 있는 걸 새로 발견한 것처럼, 또 새로운 기술들을 찾아봐야지. 일단 까망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건 허세가 아닌 사실이었으니까.
어느새 봄이 다 와가고, 아파트 화단에 까망이랑 가서 씨앗을 심었다. 만약 새순이 나면, 우리 집 베란다 쪽으로 식물이 보이는 자리에.
영원을 말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오래 이곳에 머물고 싶다.
오래오래 이토록 나른하고 별일 없이도 설레는 일상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