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잠을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바지런히 연필을 깎던 소녀에게.
당신은 온 몸이 딱딱한 가죽장정으로 이루어진 내 속에 항상 온갖 수다를 펜촉이 닳도록 박아 놓았다. 가끔은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굳세서 온 몸이 아릴 지경이었는데, 어느날이었던가 하교하자마자 나를 가방 안에서 침대에 던져 놓고는 쓰기 시작했다. 웬일로 수다가 안라, 어떤 가상의 이야기를 쓰고 앉아 있었다. 그것도 평소 그의 고지식하고 애어른다운 말투와는 안 어울리는 한낮에 꾼 꿈같은 이야기를.
“나는 여름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벌써 겨울잠 잘 것이 걱정된다 .”
아니, 잘 봐줘야 꿈결 같은 이야기라 말해 줄 수 있겠다. 기승전결이 도저히 없는 급작스런 잠꼬대 같은 이야기를 쓰려고 오후 내내 지는 해가 온 방을 물들일 때까 지 골몰하고 있었다니? 하여간 이 작은 꼬마 숙녀는 알다가도 모를 위인이다. 그날 이후로 정확히는 푹푹찌는 여름 하교하자마자 아니지, 고리타분한 모범생답지 않게 수업 중에도 무릎 위에 나를 앉혀 두고서 같은 이야기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급작스레 하나도 흥미로울 게 없는 생쥐같이 생긴 녀석들이 등장했나하니, 당신 이 오고가는 하교길에 지나치는 너도밤나무 큰 집에 다람쥐 가족들이 둥지를 틀었 다. 매번 신나게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온갖 몸짓발짓을 쓰는 당신이 언젠가 나를 잃어버릴 뻔 한 뒤로는, 얌전히 가방에 넣고 걷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그렇게 옆구 리에 끼고서 세상 구경을 시켜주더만. 그 당신의 부주의함 때문에 겨울이 가고, 봄 이 와서 어느덧 한 여름을 넘어 가을인지도 모르고 지나왔다. 오늘 휴일은 한가롭 게 나를 옆구리에 끼고 그 집에 들러, 주인집에게 다람쥐 가족을 보다 갈 것을 허 락받는 걸 보니,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왜 줄곧 이 시답지 않은 털복숭이들이 등장 했는지를. 나는 철저한 현실파로 무용한 상상을 싫어한다. 물론 그 애는 일기를 쓸 데에도 대체로 무용한 상상 반을 양념처럼 끼얹지만, 그래도 그간은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수다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다. 아니, 이런 휴일에 나와 함게 글을 쓰는 대신에, 망치질이라니. 갑자기 아버님 공구함에 난로가 장작더미서 나무를 주어오더니. 이 황금같은 학교 안 가는 날에 다람쥐 뒤치다꺼리 라니. 그 전날밤 밤을 세서 그린 미지의 도면이 고작 다람쥐용 벤치를 위해서라니. 대체 저런건 어디서 보고 들은 건지, 사다리에 낑낑대고 올라가 나무에 미니 벤치 를 만들어 걸어 두었다. 이제 이 자리에 해바라기 씨앗이니 포도알 같은 걸 올려줄 거라고. 이제 애칭을 불러주며 알뜰히 내 가죽 장정을 쓸어주던 그 애가 없다. 그렇게 다람쥐들을 위한 전용 브런치용 벤치를 만들어 주더니, 그만 정신이 딴 데 팔려있었다.
그 애는 이제 나를 폼으로만 가져다닐 뿐, 만년필이 사각거리던 일도 꿈인지 현 실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부지런히 어느 덤불숲에서 튀어나와 다시 너도밤나무로 올라오는 다람쥐를 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드디어 실증이 났는지,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의 벗은 이미 그 털뭉치들의 포로였다.
키디, 요새 동화를 써요. 주인공은 매일같이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일하는 다람쥐에게요. 실제로 다람쥐들은 겨울까지 열심히 도토리를 땅에 묻으면서 겨울잠을 준비한대요.
생각만 해도 귀엽죠?
-여기 늦여름, 온 몸이 노곤한 다람쥐. 이 애는 슬글 여름잠을 자고 싶었다. 아직 겨울잠에 들기까지 아직 한참인데, 대체 몇 날 며칠을 더 흙바닥을 헤집고 다녀야 할까? 한참 열매를 찾아 줍다가 문득 가늠할 수 없는 피로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만 배를 드러내놓고 나무 기둥에 기대어 낮잠에 빠졌다.
이후 낮잠치고는 꽤나 긴 시간이 흐르고, 옆집 친구 아롱이가 바지런을 떨며 코를 땅에 박고 열매를 찾다가 내리쬐는 햇 살 아래 꾸덕꾸덕 조는 다람쥐를 앞발로 건드려 본다. 정수리의 잔털조차 얌전하다. 당장 입안에 열매를 우물거려도 굶어 죽을 판에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기가 찼다.
꼭 이럴 땐 어디 보쌈해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그새 조금 주 운 열매들이 널브러진 것도 모르고. 마냥 행복하게 꿈속을 헤메이는 이 이는, 정작 바로 옆에서 몇 시간 동안 모은 열매들을 채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낮잠을 잤다. 겨울이 오기도 전에 이미 실컷 자 버렸다.
키티! 그만 너무 자 버려서 하루가 지나가 버린 거예요! 한참 추워지기 전에 모아야 하는데, 나도 낮잠이 많아 책을 읽다가도 손에 쥐고 스 르르 잠든 때가 한두 번이 아닌걸요.
다음은 좀 더 있다가 해줄게요! 그러니까 이...
이날도 결국 나의 친애하는 꼬마 숙녀는 게을러터진 다람쥐이야기를 짓느라 그만 골아떨어졌다. 아아, 꼬마야. 이러고 잠들면 어떡하니? 너는 마침표가 제대로 안 찍힌 글이 쓰이면 하루 종일 불안해 하는 걸, 너는 차마 모르겠지. 제발 쓰다가 말지 말아달라고 전하고 싶다. 그만 옆에 뉘인 만년필에게 그녀 스스로 적은 척, 맨 앞장 노트 수칙에 시작한 글은 반드시 끝을 낼 것이라 적어 달라고 부탁하려다 말았다.
그저 원체 게으름이라곤 부릴 틈이란 없는 근면한 종이로 이루어진 나로서는, 도저히 이런 나태한 털 뭉치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견딜 수 없었다. 내게도 피와 뼈와 살이 있다면 이런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야기에 온 몸이 흐물거렸을 거라고, 온 몸이 재가되어 흩어졌을 거라고. 이내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는데, 옆에 기대어 있던 만년필이 새침하게 덧붙였다.
-왜, 뼈와 살이 없는 지금도 홀라당 재가 될 수 있잖아?
아무래도 그간 우리 꼬마 숙녀의 악력이 쎄서가 아니라, 저 펜촉이 일부로 의도해서 종종 내 속지에 구멍을 낸 것 같다.
무용한 이야기에 이미 질려버린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애는 매일 같 이 열심히 한글자 한글자씩 눌러적었다. 같은 마을 다람쥐들은 언제나 무사태평해 보이는 그 녀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얼 믿고 저리 태연자약하게 나무기둥 아래서 졸 수가 있는가? 먹이가 될 수 있는 것들은 귀하고, 묻어놓는 것도 폼이 많이들며, 무엇보다 이를 다시 기억하는 것도 일이다. 실제 묻어놓은 것의 태반은 위치를 까먹고 다시 줍는데, 무엇보다 큰 문제 는 그 작은 몸에는 항시 큰 열량이 필요하다는 것, 덕분에 그들의 입안은 언제나 무언가를 씹고 있는데도? 그렇다 이 털뭉치 녀석들은 우물우물 볼때기가 터질 듯이 야무지게·손가락으로 한번 툭 건드리면 폭죽처럼 터질듯한 뺨따구를 가지고 언제 나 부지런해야할 운명을 타고났다.
매번 다음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땅을 파고 열매를 묻으면서 부지런히 열 매를 입안에서 씹어내야 한다. 아니면 땅을 파다 급작스레 열량이 떨어져 그대로 자기가 판 굴에 파묻힐 수가 있다! 이런 악전투고 끝에 이들은 열매를 찾고 땅을 파묻어둬 겨울잠을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사계절 내에 꽉 찬 시간표대로 바지런히 움직여도 먹이는 언제나 모자르다.
사실 다람쥐들에게 넉넉한 먹이는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 그래도 불안한 차에,이 불안을 증폭시킨 파란이 바로 작년에 벌어진 참이다.작년 가을, 동네 개구쟁이들이 한 다람쥐가 한곳에 묻어둔 도토리 웅덩이를 삽으 로 통째로 퍼간 일이 있었다. 그 성실한 다람쥐는 그런 예기치 못한 대재앙에 며칠 을 앓아누웠고, 다람쥐들 사이 인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연이어 분노조절장애 다람 쥐 하나가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바로 숲을 지나가던 행인을 문 사건이었다. 자기가 방금 뭍고 돌아선 도토리를 그네들이 캐는 모습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다 고. 당시 그 일대에 산책자들이 무슨 유행처럼 도토리를 주워가는 마당에 저장할 도토리가 부족해지던 중이었다. 물론 그 이가 평소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 다람쥐로서, 같이 도토릴 줍던 동료와 털을 곤두세운 적이 있대도 무지막지한 짐승은 아 니었다. 실제로는 그 산책자들도 놀라 자빠져 뒷머리를 돌부리에 살짝 부딪힌 거 외에 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소문이란 건 삽시간에 부풀려져서 눈이 벌개진 흡혈 다람쥐가 이미 이 일대에 퍼져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간 온순하던 귀여운 털복숭이들이 변한 건 모두 그 역병 때문이니 좀비 다람쥐를 소탕해야 한다는 방책이 나왔다.
이제 마을 주민들은 다람쥐를 귀여운 숲의 전령이 아니라 유해동물로 보기 시작했다. 그 작은 사건 하나로 두 종족의 사이는 영영 멀어진 것이 다. 이제 마을의 포수들이 들어와 귀여운 다람쥐들을 포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활동이 근방 숲을 숲의 전령이 대려 숲 안을 못 돌아다니 불상사가 발생했다. 지난해 충분한 비축이 부족했기에, 그만 겨울잠을 자다 배고파 깬 다람쥐들이 독 있는 구근 뿌리를 파먹어 졸도하는 일도 흔해졌다.
이런러한 연유로 이번 가을이 결전 의 날이었다. 다들 선잠을 잔 퀭한 눈으로 다 죽은 송장으로 도토리를 주우러 다니 던 가운데, 여기 이 녀석 하나만은 태평스러웠던 것이다. 늘어지게 하품까지 하면 서 도토리를 천천히도 주웠다. 지금 다들 지난 몇 달간 졸 시간도 없이 부지런히 뛰어다녀 참나무 밑 마을 공동창고에 이바지했는데, 이 녀석 혼자 천천히 낮잠이나 자며 도토리를 줍자니 모두의 얄미움을 샀다.
그 후로 이따금 조는 아롱이를 예전 처럼 친구들은 예전처럼 너그럽게 봐 줄 수 없었다. 마을에 그 사건이 있기 전에도 그 애는 한결같았음에도 이제 모두가 그 애를 미워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지?
아무래도 이 소녀가 사춘기에 들어선 것 같다. 요새는 뻔질나게 온 가족과 말싸움을 벌이더니.
참으로 좀체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는숙녀다.
키티, 그 전주에 마저 못 쓴 이야기를 말해줄게요.
명랑하게 고개짓을 하며 책상에 앉은 그애가 내게 말은 건다. 정작 청자는 그 어떤 열의가 없음에도, 이 어린 저자는 나름 비장하게 몽땅연필을 꼭 쥐고서 집필을 계속한다.
그 해 가을, 아롱이가 선잠에 깨어나면 어김없이 털린 바구니만이 남았다. 그래도 그 이는 별걱정 없이 기지개를 켜고 다시 흙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대며 도토리를 찾으러 가곤했다. 이 모습이 여러 다람쥐 둘의 원성을 샀다. 도무지가 이해할 수 없엇어요. 저 애는. 저토록 눈치 없고, 무시당해 분하다는 자각조차 없는 애는 어디서 나타난 다람쥐냐고.
이쯤에서 종잡을 수 없는 저자는 그 놈의 다람쥐 이야기를 멈추고 아예 이 종이가 자기 소꿉친구 마르고인만냥, 정변에 세워두고 한참을 노려본다. 이쯤이면 자기 자신도 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따분한 게 틀림없다. 초반부터 서사가 막힌게지? 그런데 이내 다시 사가사각, 글자가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세겨졌다.
그래요, 그 애는 완전히 실망하는 법이 없었어요. 그냥 매일 도토리를 주었죠. 지구 최후의 날에도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사람처럼요. 그 앞과 뒤의 일은 그이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세상은 복잡하게 보려면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하기만 할 뿐 그 어떤 해답 도 없어서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르지만요, 반대로 단순하게 생각하려면 한없이 단순해요.
내가 지금 당신에게 글을 쓰는 것처럼, 뭐든 쓰고 보는 작가처럼. 그냥 쓰면 되는 거예요. 내가 매일같이 가죽 커버를 넘기고, 연필을 갂고, 책상 위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듯이요. 아무리 부질없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난 그렇게 당신에게 글을 쓸 거예요.
키디, 말이 이상하지만 난 매번 가을내 창에서 보이는 너도밤나무에 사는 다람쥐 를 볼 거예요. 그 작은 녀석이 부지런히 허탈해하는 법도 없이 도토리를 물고 땅에 다시 묻고 또다시 잃어버리고 다시 줍는 다람쥐처럼 될 거예요. 곧 온통 하얀 세상이 올 거예요. 얇은 외벽 사이로 외풍이 느껴져요. 지금 당 장 밖에 나가서 자전거를 타고 싶어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계속 달리고 싶어요. 삶은 자전거를 타기와 같아서 계속 자전거를 타야 한다니까요. 바퀴를 움직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대요. 나도 곧 나가서 진짜 바퀴를 굴릴거예요. 일단은 바퀴 굴리기를 멈추지 말아야게어요.
이 고백을 마지막으로, 나는 골판지 어느 박스 안에서 깜깜한 어둠 속에 여러 날을 보내야 했다.새카만 어둠 속에서 내 다정한 꼬마 친구가 나를 벼룩시장에 판 줄로만 알고, 먼지 쌓인 속지를 끌어안 고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장이 열리고, 큰 타조 깃털 먼지털이가 온 몸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예전의 천진난만한 미소란 지워버린 그새 훌쩍 자라 버린 것만 같은 꼬마숙녀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중간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 물론 물을 수도 없다. 이제 매일 미우나 고우나 네가 가지고 다니던 만년필도 없이, 키가 작은 연필로만 이따금 메모를 한다. 글이랄 것도 없이, 몇몇 단어들만 나열한다.
차라리 다시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도 써주길 고대했다. 제발, 단어와 단어사이를 다시 이어달라고, 마침표는 안 찍어도 되니까. 완결된 결말의 글이 아니어도 되니까. 그러다 언젠가 네가 썼다.
키디. 이 작은 은신처에서 서로 보듬고 위로해줄 수 있는 존재는 서로일 뿐이면서도, 좀 자주 어머니는 얄밉고 아버지는 고집불통에 마고 언니는 나를 화나게 만드는 법을 너무 잘 알아요. 그래도 당신만은 내게 다정하죠. 메일이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언젠가 꼭 여길 벗어날게요. 밖으로 나가면 당신에게 보여줄게요. 우리가 창문 틈으로만 엿보던 밤나무 밑동이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그 고목에 올라가서 본 풍경이 얼마나 근사할 지를요.
우리의 밤나무는 확실히 지난해보다 그 다음 해에 더 아름다워지고 있으니까요.
-1944년, 5월 11일, 당신의 안네로부터.
이제 그만 나는 고리타분한 기록이 되어,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다. 하루에도 수만명의 어른과 아이들을 보는데, 그 중에 너같이 가만히 있는 와중에도 오늘은 또 무슨 재 미난 일이 벌어질까 눈을 굴리는 애는 없다. 그나마 들은 적은 있지. 꽤 최근에 방 송국에서 온갖 장비를 어깨에 짊어 메고 취재 왔을 때, 누군가 이야기를 했어. 그 애도 일기를 썼다나봐. 우리가 함께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 그 애도 그 곳에 있었대.
“나는 이제 기막히게도 이 삶이 불행하다 생각하게 된 나쁜 아이입니다.
그날 역에서 가축을 운반하는 열차에 유대인 가족과 노인,
아이들이 실려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시골로 가는 거라 했어요.
그 후로도 여러 번 시골로 가는 사람들 을 보았죠.
화물 기차 위로 보이던 그 많은 얼굴들을 다 헤아릴 수도 없어요.
앙증맞은 작은 얼굴에 새까맣게 짙은 눈썹의 정성스레 땋은 머리,
자기에게는 너무 큰 코트를 억지로 걸친 아이를 나는 멀뚱히 보고만 있었죠.
난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어린아이였어요.”
Audrey Kathleen Rustin 1929.05.04 – 1993. 01. 20.
“지금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쌍둥이 같죠.
심지어 어머니는 안네의 일기 1942 년 8월 15일 기록에서 삼촌 오토매틱이 나치에 사살됐을 정황도 찾아내셨죠. 당시 안네의 은신처는 당시 어머니가 피난을 왔던 동네 근처였는데,
두 사람은 서 로 알지 못했지만, 같은 시기 나치 점령기의 네덜란드에 있었죠.
어머니는 한 번도 자신이 안네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러고보니, 어쩌면 네가 숨죽여 보던 창가에서 나무 목마를 타던 여자애, 그 애일지도 모르지.
귀밑까지 똑 떨어지는 단발을 한 그 작은 여자애, 그애가 사촌들이랑 광장에서 연극 놀이를 했잖아.
우리는 함께 다락방 창가에 기대서 언제 다시 그 꼬맹이 배우가 광장에 나오나 기다렸지. 삐쩍마른데다, 또래 보다 키가 작아서 바람에 휘청 거릴까 걱정됐지만 언제고 우렁찬 목소리로 그애는 대사를 외웠어. 언젠가 한여름밤에 더위에 지쳐 함께 널부 러져 있다가, 그 애 목소리에 화들짝 깨서는찐뜩한 몸을 일으킨 적이 있었지.
그 대사가 뭐였더라.가만, 그래.
네가 아직 학교를 다닐 수 있던 시절에,
작문 시험에서 외워서 내게 써줬던 셰익 스피어의 한 여름밤 꿈에 나온 소네트.
그때 그 애가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외웠지.
우리 모두 영혼이고,
공기는 속으로 녹아들며,
눈에 보이는 바탕 없는 천 조각처럼 구름에 덮인 탑들,
멋진 궁전들,
엄숙한 사원들,
모두가 위대한 세상 그 자체로 모든 게 이어지고 ,
녹아 없어지며 사라지고 마는
공허한 야외극처럼
남기지 마라.
우리는 꿈을 꾸는 존재이고,
우리의 삶은 잠에 둘러싸여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