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합기도 1

어라, 여성분께서 비 오는 날 생뚱맞게 합기도장에는 어쩐 일로...

by 카인비


이직으로 당분간 친구네 집에 얹혀살게 되었고, 2분 거리에 합기도 수련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뜨고 있는 mma 같은 격투기 종목은 손목이라도 부러질까 두려운 마음에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웠고, 또 여성들의 호신술로 유명한 주짓수는 바닥에서 뒹굴면서 진행되는지라 조금은 어색 민망한 기분에 접근이 어려웠다. 내가 얼핏 들어서 알고 있는 합기도는, 뭐랄까, 먼저 공격하지 않는 젠틀함과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역으로 공격하는 우아함이 있는 무술이었다. 망설일게 뭐가 있나. 나는 곧장 집에서 나와 합기도장 쪽으로 걸어가며 문의전화를 걸었다. 비가 샤워기 물 틀어놓은 것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던 여름날이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꽤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목소리의 남성이었다. 그는 나에게 이것저것 어떻게 해서 합기도를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는지, 운동을 좀 했었는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 등등을 물어보았다. 나는 청소년기에 검도 2단을 땄었는데, 막대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경험과, 성인이 된 이후 체력이 너무 안 좋아져서 시작한 헬스를 너무 지루해서 오래 지속할 수 없었던 경험과, 1년 동안 열심히 한 요가가 별로 체력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바로 "성인반이 따로 있어요?" 하고 물었다.


"성인반은 따로 없.."

"아, 없어요?"


그는 차분하려고 노력하는 다급한 말투로

"아! 그게 아니라, 없지만, 중고등학생들이 시험기간이라 없어서, 하시게 되면 7시 반에 지금 전화 주신 분 혼자서 진행하게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네????? 저 혼자요???"

"아, 조금 어색하실 수는 있는데 어색한 것만 괜찮으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 장사가 힘들어져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목소리에 "놓치면 안 돼!!" 하는 마음이 너무 가득 담겨있어서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흥미로웠다. 혼자라면 오히려 이참에 1:1 과외 제대로 배울 수 있겠다 싶었다.


7시 반. 집을 나섰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안쪽으로 물이 새는 내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을 수 없어 300mm 사이즈는 족히 되어 보이는 친구의 아빠 슬리퍼(?)를 빌려 신고 젖은 맨발을 질질 끌며 도장으로 향했다. 도장은 새하얗게 깔끔했고 혼자 진행하기에 아주 광활한 크기를 자랑했다. 보통의 태권도 검도 특공무술 등 도장은 어린이들 위주라 유치뽕짝 하거나 원색 컬러들을 난잡하게 사용해서 조악해 보이곤 하는데, 신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도장답게 인테리어가 거슬리는 점 없이 깔끔하고 새것이었다. 선생님의 인상도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꽤 좋아 보였다. 자신감이 넘쳐서인가 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내내 신기하고 인상 깊었는데, 상대방은 뜬금없이 비가 쏟아지는 날 혼자 도장을 찾은 젊은 여성의 의중이 궁금한지 자꾸 내가 뭘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본인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들(몸 쓰는 거라면 거의 모든 것들이 가능합니다!)을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했고 말 끝에는 꼭 궁금한 거 있어요? 하고 덧붙였다. 내가 어떤 질문들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어떤 질문을 해도 "아 물론 할 수 있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간단한 질의응답 후 선생님은 몸을 풀어보자며 나에게 팔 벌려 뛰기 10회와 뒤꿈치 올려 차기?를 시켰다. 내 몸은 생각보다 더 쓰레기가 된 상태였다. 삐리 삐리 마른 몸이 왜 이렇게 무거운 건지. 나도 놀랐지만 선생님도 내 몸상태의 심각성에 좀 놀란 눈치였다.


이어서 몇 가지 호신술도 배웠다. 호신술의 기본은 내 몸을 지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청하는 것도 호신술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가장 간단한 반격 법(?)을 배웠다. 첫째로, 내 수중에 무언가가 있을 때.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나 볼펜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할 때 어떻게 하면 더 아프고 잔인하게(?) 손에 쥘 수 있는지, 또 어디를 찔러야 더 아픈지를 배웠다. 그리고 둘째로, 수중에 아무것도 없을 때 내 몸에서 가장 딱딱한 부위인 팔꿈치로 상대를 공격하는 법을 배웠다. 상대를 더 아프게 만들수록 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기에 가차 없이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사회화된 자의 눈과 마음에는 이 기술들이 어찌나 잔인하고 낯설게 느껴지던지. 조금은 어벙한 모습으로 "아..." "헐..." "네..." 이 세 가지 음절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그래도 선생님이 이게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열심히 알려주시는 과정에서 '너는 소중한 사람!'이란 식으로 배려받는 기분(?)도 약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몇 가지 생겼다는 사실이 꽤나 뿌듯하고 보람찬 시간이었다.


그렇게 맛보기 수업을 마친 후, 입관 희망서를 작성하며

"신청서가 아니라 희망서네요. 검토 후 승인이 나야지만 입관할 수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으핳, 아닙니다.... 이런 용어에 뭔가 예리하시네요. 관련된 일을 하시나요?" 하더라.


너무 첫 번에 나에 대해 조잘조잘 많은걸 알려주면 불편할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마 입관 희망서에 적은 내 생년월일을 보고 내 나이 정도는 파악했겠지. 친구 집에 들어간 지 하루도 안되어서 옷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고 투덜대며 맨발로 물에 젖은 쓰레빠를 신는 내 꼴을 보며 헤헤, 웃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선생님보다 내 나이가 더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