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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곳

by 초연

서윤은 눈이 어지럽다. 봄 채색을 입은 꽃과 함께 뒤섞여 흩날리는 무채색 꽃들이 보인다.

눈을 어지럽히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서윤은 쉼 없이 정원의 꽃을 짓는다.


무채색 꽃들은 바람 이끌림을 따라 이리저리 날리는 제철에 피는 꽃들과는 달랐다. 서윤은 손을 뻗어 그것들을 잡아보려 하지만, 허상인 듯 손에 닿기 무섭게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져 버리기를 반복한다.

잡았다고 생각하고 움켜쥔 손에 남아있는 건 채색 짙은 꽃잎뿐이다.


그렇게 서윤은 무채색 꽃들이 보이는 이유를 눈에 이상으로 의심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해 보기도 하고, 어제의 피곤함이 이상을 일으킨 것으로 애써 외면했다. 내일은 병원을 방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당장은 꽃구경을 즐겼다. 불안이 감춰질 만큼 골목엔 채색 짙은 꽃들이 가득했다.


봄 생명이 짙어지고, 꽃잎의 흩날림이 많아질수록 무채색 꽃들이 확연하게 늘어났다. 병원에선 안구 건조증 이외는 이상이 없다며 처방해 준 인공눈물을 눈에 넣어 보지만 눈에 잠깐의 부드러움을 허락할 뿐, 채색이 입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도리어 눈 문제이길 바랐다. 서윤에게 만 보이기 시작한, 날마다 늘어만 가는 무채색 꽃. 두려움에 휘감기는 자신을 보았다.


정윤에게 전화했다. 안부도 묻기 전에 무채색 꽃 이야기부터 했다.

“언니가 저승꽃을 보는구나.” 정윤은 반응이 의외로 담담하다. 놀라지 않은 척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을 연기했다. “방법이 있을까?” 정윤은 ‘저승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승길 안내자들은 ‘저승꽃’을 뿌려 데려가야 할 이승 사람들을 찾기 쉽게 하는 꽃이라 했다. 본인 같은 하늘이 내리는 소리를 듣고, 보는 무당들에겐 흔한 일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눈으로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보통 사람들은 얼굴에 핀 ‘저승꽃’을 보고 가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뭔가 큰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곤 엄마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서윤은 전화를 끊었다.


서울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엄마와 살고 있는 서윤은 골목의 낮 풍경을 좋아했다. 가파른 오르막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숨이 가쁘다. 가끔 기능을 상실한 가로등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내린다. 어두운 모습과 달리 낮 골목 봄 풍경은 겨울을 밀어낸 눈꽃이 장관이다. 그렇게 잘 채색된 꽃들 사이로 무색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서윤은 엄마의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하루 종일 꼼작도 하지 않았고,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거나, 갑작스레 허공의 무엇을 본 듯 팔을 휘젓고 응어리를 토해내듯 한참을 소리친 뒤에야 진정되곤 했다. 그러곤 다시 자리에 누워 미동도 없이 며칠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적막이 가득 찬 밤은 조용히 잠든 엄마 콧잔등에 손가락을 살포시 올려 숨기운을 느낀 뒤에나 안도 섞인 한숨을 쉬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엄마 얼굴에는 눈에 띄게 ‘저승꽃’이 늘어만 갔다.


정윤이 전한 말이 맴돌기 시작한다. 서윤은 사라지지 않는 꽃을 짓는다. 생명을 나눠주고 지지 않는 꽃을 짓는다. 그리고 엄마의 꽃단장을 잊지 않는다. 안간힘만큼 정원은 풍성해진다.

지지 않는 정원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제 정원을 신비해하지 않는다.

“여기는 뭔가 모르게 섬뜩해….”하고 혀를 차며 돌아선다.


봄이 끝나 초록이 짙어지는 여름의 초입이다.

한낮의 해는 제법 내뿜는 열기로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선언한다.

정윤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짧게 묻는 정윤이 질문했다. 망설이지 않고 서윤은 대답한다.

“올해는 더 많은 꽃을 지어야겠어!” 정윤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그렇게 서윤은 정원으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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