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터 두께의 벽이 내게 남겨준 것
졸업을 두 달 앞둔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동아리방에서 치킨을 뜯어먹고 있는데, 평소 말수 없던 박선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야, 너 3D 모델링 잘하잖아. 돈벌이 하나 해볼래?"
그동안 과제할 때만 써보던 3DS로 용돈을 벌 수 있다니. 솔직히 혹했다. 당시 편의점 야간알바로 한 달에 20만원 벌고 있었는데, 더구나 새벽시간 알바는 나처럼 아침형 인간에게는 정말 고역이었거든.
"뭔데요?"
"대학원 선배님이 다니시는 곳에 손이 좀 필요한데... 건물 모델링 작업이야. 가서 한번 얘기 들어봐."
그 다음 주 월요일이었나. 강남구 어딘가 꾀 높은 건물에 자리한 'D건설 기술연구소'를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전부 각자 뭔가를 열심히 하는 분위기로 열기가 가득했다.
"박군이 추천해준 학생이구만.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맡은 일이 좀... 특이해서."
그러더니 A4 용지에 뭔가 특이한 모양의 도형을 그려서 보여줬다.
"이거 뭔지 짐작 가?"
사실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 네, 대략은요"라고 했다. 취준생 기본 소양이랄까. 대답은 했지만 그냥 평범한 건물 모양은 아니였다. 창문도 없고, 완전한 블럭 모양의 못생긴 입체 도형이였다.
"지하 구조물 인데, 3D로 만들어서 보여줘야 해.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고, 보수는 100만원 정도."
100만원이라니! 편의점에서 밤새워서 버는 돈에 비하면 엄청난 보수 였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벌써 그 돈으로 뭘 할까 싶었다.
막상 작업에 들어가니 예사롭지 않았다.
콘크리트 벽 두께가 1.2m였다. 처음엔 내가 잘못 봤나 싶었다. 보통 건물 벽이 20-30cm 정도인데, 이건 그 네 배가 넘었다. 천장은 아예 2m가 넘어갔고.
'와, 이거 진짜 폭탄 터져도 멀쩡하게 만드려는 거네.'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 누군가 살아남으려고 만드는 최후의 보루를 내가 설계하고 있는 건가?
연구소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서 작업하면서, 자꾸 이상한 상상이 들었다. 혹시 이 벙커에 엄청 중요한 인물이 피신할 건 아닐까? 아니면 무기 보관 시설? 집에 가는 길에도 계속 '내가 지금 국제적으로 중대한 일에 관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어떤 어느나라의 어느 도시인지, 용도가 뭔지, 그 어떤 정보도 알려주는게 없었다.
제일 골치 아픈 건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는 거였다.
도면엔 기본 골조만 있고, 실제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화장실은 어디다 둘지? 침실은 몇 개나 만들지? 비상구는? 전기 시설은?
"그런 거까지 세세하게 할 필요 없어. 적당히 그럴듯하게만 해줘. 외형이 중요하거든"
선임연구원인 그분 말은 항상 이랬다. 결국엔 구글에서 '지하 벙커'를 검색해서 영화 장면들 보고 대충 짐작해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밤 11시까지 매일 작업하다 보니, 내가만든 이 공간에 점점 애정이 생겼다.
실제로 누군가 여기서 살 텐데 불편하면 안 되잖아. 그래서 침실에 작은 책상도 넣고, 식당엔 6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도 놓았다.
친구들이 "요즘 뭐해?"라고 물어보면 "비밀 일이야"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비밀이기도 했고. 사실 내가 아는것도 없었다.
한 달 뒤, 마침내 최종 파일을 넘겼다.
선임연구원이 3D 모델 작업한 걸 마우스로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응, 괜찮네. 수고했어"라고 했다. 그때 느낀 뿌듯함이란. 그리고 사흘 뒤 통장을 확인했을 때,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입금 : D건설기술연구소 1,000,000원'
백만원이 정말 들어와 있었다. 한 달 동안 내 혼자 힘으로 만든 가상의 건물로 벌어들인 첫 월급이었다.
그날 저녁엔 처음으로 혼자서 제대로 된 고기집에 갔다. 한우 등심 300그램에 소주 한 병.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고기가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 벙커가 실제로 지어졌는지는 끝내 알 길이 없었다. 그 선임연구원도 그 뒤로 연락이 끊어졌고, D건설 기술연구소도 몇 년 뒤엔 없어졌다.
하지만 그 한 달이 내 인생을 바꿔놨다. '내 손으로 뭔가 만들어서 돈을 벌 수 있구나'라는 첫 경험. 그리고 '혼자서도 뭔가 완성해낼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 그리고 컴퓨터로 작업하는걸 좋아했지만, 이런 걸로 돈을 벌수 있다는 신기함.
가끔 중동 관련 뉴스가 나올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혹시 저 어디 지하 깊숙한 곳에 내가 모델링한 구조물이 있을까? 누군가 그 안에서 안도의 숨을 쉬며 세상과 떨어져 있을까?
아마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공간일 거다. 그래도 괜찮다. 내 사회생활은 그 상상의 지하 벙커만큼 단단한 바탕에서 시작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