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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어느날 Oct 26. 2024

번외) 나의 어머니_01.

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1961년, 우리 어머니는 태어났다. 1989년에 내가 태어났으니, 우리 어머니는 28살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아주신 것이다. 얼마나 무섭고 겁이 났을까? 물론 지금과 그때를 비교하긴 어렵지만, 지금의 28살이라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사회초년생으로 모든 것이 신기해 보일 수도 있는 나이일 텐데 말이다. 당시의 사회 통념상 어머니도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셨을까?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인생에도 행복은 있었는지. 내가 엄마라고 부르던 한 여자의 인생에도 꿈이라는 게 있었는지. 내가 차마 볼 수 없는 곳에서 많이 우셨을 때처럼, 아무도 모르는 순간에 홀로 앉아 과거를 그리워하진 않았을지. 내가 지금 느끼는 인생에 대한 고민처럼, 어머니도 본인이 성취감을 느끼고 인생의 활력을 느끼는 순간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없었는지. 3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지금이라도 어머니의 인생을 상상해 보고, 내가 알고 있는 순간들을 회상하며 어머니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순간순간을 떠올리면 자꾸 감정이 흘러넘쳐 눈물이 터질 것 같지만, 분명 행복했던 순간도 있을 테니까. 못난 아들이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어머니의 인생에서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적이 있다면, 나는 그거면 될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가장 어린 시절은, 5~6살 때 즈음이다. '장안동', '진달래연립', '국제유치원', 이 세 단어가 내 의식 가장 처음에 자리하고 있다. 그 시절 아버지는 항상 일 때문에 얼굴 보기도 힘들었고, 주말이면 주중의 숙취 때문에 누워있거나 다른 술 약속 때문에 항상 밖으로 나가계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란을 피우는 나와 내 동생을 위해 라면을 끓여주셨고, 항상 물을 타서 덜 맵고 덜 뜨겁게 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오렌지 주스를 너무 좋아해서 물보다 주스를 더 많이 마셨다. 나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기억하는 '델몬트 유리병'. 그게 우리 집에는 너무나 많았다. 그만큼 주스를 좋아했던 나를, 아버지는 항상 혼냈고 어머니는 몰래라도 주셨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의 마음에 '아빠는 무서운 사람, 엄마는 내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그 시절 보통의 가정이 그랬듯이, 우리 집 또한 가진 것 없던 가정을 일으키고 돈을 잘 벌어오는 아버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이끌었다. 어린 두 아들은 아버지의 한마디에 벌벌 떨었고, 네 가족이 모인 저녁 식탁에서는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는 가끔 싸우셨고, 심할 때는 술 취한 아버지가 우리 앞에서 어머니를 때린 적도 있었다. 그때 느꼈던 공포가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주변 사람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떨어진 지역으로 이사 와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 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새로 지은 3층 짜리 빌라에 3층으로 이사 가면서, 이 전보다 훨씬 좋아진 집에 마냥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기억은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나는 지금과 같이 낯도 많이 가리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친구들을 사귀는 데에 오래 걸렸다. 다만 친해지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성격이라 학기말 즈음이면 친구가 많아졌다. 항상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는 내 모습을 어머니는 좋아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내 생일날에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생일상을 차려주셨고, 그때 십 수 명의 친구들을 초대했던 기억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가 30대 중반, 지금의 내 나이정도였으니까. 아마 온 에너지를 쏟아부어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셨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 정도의 이벤트를 하려면 큰 각오를 하고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것 같은데,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많은 순간이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시절에 웃음 지어지는 순간들이 짧은 영상처럼 기억과 마음에 남아있었고, 그것에는 다 어머니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머니와 같이 손잡고 시장에 갔던 순간들, 시장에 있는 신발 가게에서 운동화를 사고 좋아했던 기억들, 이모네 놀러 간다고 아침부터 기대했던 날들, 매일 저녁 동네 슈퍼에 콜라 심부름을 하러 갔던 기억들. 생각할 때면 미소가 지어지는 기억들이다. 아마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해지겠지.


아버지는 여전히 공포의 존재였다. 저녁 시간을 조금 넘겨서 들어오면 심하게 매를 맞은 적도 있었고, 주말이면 산에 가자는 불호령에 일요일 아침마다 비가 오기만을 기도했다. 술에 취한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았고, 점점 부부싸움의 빈도는 잦아졌다. 그때는 왜 그렇게 싸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10살이 되기 직전의 나는, 그저 ‘나 때문에 싸우는 건가, 제발 좀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방 안에서 떨면서 기도할 뿐이었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엄마 아빠가 서로에게 지르는 고함을 듣기 싫어서 귀를 막은 채 덜덜 떨었던 것은 꽤나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지금은 한 번쯤 묻고 싶다. 그때 심정이 어땠는지. 나는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참았는지. 그때는 다 참고 살았다는 그런 뻔한 대답 말고, 힘들지는 않았는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지금은 서로 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린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하냐는 그런 비수를 꽂는 말들 보다는, 마흔 살도 안된 나이에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던 순간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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