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중학교 때부터 우리 가족의 환경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3층짜리 빌라 제일 윗 층에 이사 간 후에 그 빌라 전체를 매입했던 기억까지 있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됐다. 물론 같은 동네에 새로 지은 빌라여서 그 당시 나는 좋아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빌라를 통으로 팔고 이사를 갈 만큼 뭔가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부모님의 싸움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훨씬 컸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던 적이 많았다. 물론 어린 나는 그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 좋았고, 아버지가 더 이상 무섭게 변하지 않아서 좋아할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중학생 때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중학교 2학년 초반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이 주인이던 빌라에 살 때는 1층에 모셨었는데, 외할머니는 무언가를 쌓아놓고 버리지를 못하셨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우리 어머니는 싫은 소리를 너무 많이 했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좀 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새집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 갑자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는데, 처음으로 숨지 않고 거실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어.' 두 눈이 부은 채 나에게 말을 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왜인지 모르게 당혹감과 불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어... 어 알아요.' 하고 빠르게 밖으로 다시 나갔던 기억이 선명하게 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말해주셨다. 어머니가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는 다섯 명의 남매를 두고 어디론가 혼자 떠났다고. 보호자 없이 악착같이 살아남아, 성인이 되어 돌아온 외할머니를 어머니와 막내 이모가 번갈아가며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맘 속에 쌓인 상처와 원망을 가늠할 수 있을까? 외할머니한테 싫은 소리 하는 것으로 그친 게 어딘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혼자서 울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다정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을 테니까.
역시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도 타지로 떠났다. 말없이 떠난 건 아니지만,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간다며 어느 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산 고모네는 기장에서 작은 모텔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을 관리해 주기로 했다며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니던 회사를 나와 개인 사업체를 차리고, 살던 집을 팔아 다른 집으로 이사 가고, 아버지가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갈 때까지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술을 점점 더 못 이길 정도로 많이 마시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거나, 연말이면 우리가 부산으로 내려가거나 하는 것이 가족이 전부 모이는 순간이었다. 서울에 온 아버지도, 부산에서 본 아버지도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그때 즈음부터 나는 항상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가 미워졌고, '제발 아빠가 술 좀 그만 먹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건, 더 이상 무언가 던지고, 깨지고 때리는 부모님의 싸움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공격, 아버지의 무대응. 그러다 금방 끝나버리는 싸움. 어쩌면 더 최악일지도 모르는 일방향의 싸움이, 어린 시절의 공포가 자리 잡은 나에겐 너무나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동생이랑 같이 아산 병원에 처음으로 병문안을 갔던 기억이 있다. 병원 잔디밭에서 동생과 생각 없이 뛰어놀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때의 아버지는 아직은 40대라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고, 입원기간도 길지 않았다. 물론 점점 최악의 상황으로 나아갔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오는 두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서로 무슨 대화를 하셨을까.
학원 수업이 갑자기 취소되어 집에 빨리 들어갔던 어느 날, 나는 거실에서 건장한 남자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바로 방으로 들어갔는데, '현대 캐피털', '연체' 등의 단어가 선명하게 들렸다. 아마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을 거다. 그러나 이후부터 그 단어들을 너무 많이 듣고 집으로 날아온 명세서 같은 것도 자주 봐서, 돈을 빌리고 못 갚고 있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게 모두 아버지가 받은 대출이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고.
그 시기에 어머니가 파출부일을 시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시시콜콜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았지만, 크게 숨기지도 않았다. '일하는 집에 사모님이 줬다.', '거기 애기가 이걸 좋아해.'와 같은 말을 종종 하셨고, 가끔은 방문 일정을 조정하는 통화를 했기 때문에 유추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2년 새에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 아무런 심각성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나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어머니도 혹시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들 둘 있는 무뚝뚝한 집에서 힘든 마음을 위로받은 적이나 있었을까?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내가 밉다.
그럼에도 우리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셨다. 우리 집이 많이 힘들다고, 점점 무너지고 있다고 느낀 적도 크게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도 않았고, 그런 분위기를 체감할 정도로 부족하게 자라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가 한 살씩 먹어가면서 스스로 눈치를 챘을 뿐이다. 나와 동생은 모르도록 티 안 내고 모든 것을 혼자서 감내하고 있었겠지.
그 힘든 세월을 오랫동안 버텨왔을 어머니에게, 나와 동생은 작은 기쁨이라도 준 적이 있을까? 자식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의 크기를 물론 가늠할 수 없지만, 우리가 상처를 주거나 미울 때면 어머니의 마음을 어땠을까? 본인의 비극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됐는지 한없이 슬퍼했을 수도 있겠다. 그때의 나는 어떤 아들이었을까? 어머니의 대한 기억을 꺼내면 꺼낼수록 죄스러워지는데, 이 과정이 끝날 때면 나는 이전과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