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처음으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은 10살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회사를 나와서 개인 사업체를 세워 새로운 시작을 했다.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작은 사무실에 데려갔던 날, 그때 몇 명의 직원들과 업무를 보고 나왔던 그 짧은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이후부터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고, 부모님의 싸움 또한 더욱 잦아졌다.
한 번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갔을 때, 문을 열자마자 집 안에 전화기, 화분, 거울 같은 온갖 집기가 깨져있던 적이 있다. 그 장면을 보고 겁먹어서 아무 말 못 한 채 문 앞에 한참을 서있었던 순간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아랫집에 사시는 아주머니와 울면서 이야기하고 있었고, 무서워서 떨고 있던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근처에 사는 막내 이모를 불렀다. 이모는 급하게 달려와 나를 데리고 나갔고, 이모와 손잡고 이름 모를 시장을 계속 돌아다녔다. 유사한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이 순간은 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이 한순간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또다시 밤중에 엄마 아빠가 큰소리로 싸우던 어느 날, 그날은 아버지가 먼저 싸움을 멈추고 내가 자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이불도 깔지 않고 바닥에서 주무셨다. 처음으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항상 나던 술냄새가 그날만큼은 나지 않았고, 엄마가 화나가서 소리치는 것에도 아버지는 크게 대꾸하지 않았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구나.' 하는 깊은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아빠가 많이 착해졌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뭔가 더 큰 비극의 시작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돌보기 위해 그 당시에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셨다.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선생님 가져다 드리라며 봉투를 주셨고, 그게 촌지라는 생각을 그 당시에는 하지도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항상 반장이나 부반장을 했는데, 학교 운동회가 열리면 어머니는 항상 학급 전체에 햄버거 세트를 돌렸다. 그때는 단순하게 '우리 엄마 최고!' 하며 좋아했을 뿐, 그것이 우리 가족 형편에 얼마나 부담이었을지는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다.
6학년 때는 반에서 정기적으로 독후감 쓰기 대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항상 상을 받았다. 때문에 그때 나는 내가 글을 정말 잘 쓴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본인 차를 같이 타고 우리 집에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차 타고 집에 간다는 생각에 신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 우리 엄마는 선생님 차에 김장 김치가 든 큰 통을 몇 개씩 담아주었다. 물론 그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20살이 넘어서 문득 그때 생각이 났을 때, 그런 우리 어머니의 소위 '뇌물'들이 나에게는 '독후감 상장' 같은 것들로 돌아왔을 수도 있겠다고 깨달았을 뿐.
그래도 독후감 대회 상장은 '뇌물'에 대한 보답이 아니길 바란다. 나는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어머니 덕분이다. 8살 때부터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고, 일주일 용돈 2천 원을 모아서 매주 토요일이면 '드래곤볼'을 한 권씩 사모으는 것이 내 그 당시 낙이었다. 그때는 동네에 하나씩 있었던 만화책방에 살다시피 했으며, 한 권에 100원씩 하는 만화책을 나는 매일같이 빌려보았다. 집에는 용돈을 모아 사들인 만화책이 백 권이 넘었고, 생일 선물로 친구들에게 대놓고 만화책 사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더 심했다. 그 당시 만화책 대여료보다 다섯 배는 비쌌던 무협, 판타지 소설들을 빌려보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만화책 사듯 사모으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책과 관련된 것에는 조금의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한 번은 어린 내가 뜬금없이 어머니도 책 한 권 보게 해주고 싶었는지, 책방 아주머니한테 '엄마가 좋아할 만한 소설 좀 추천해 주세요.' 하며 이름 모를 소설책 한 권을 빌려다 주었다. 어머니는 그 책을 끝까지 다 읽었고, 너무 재미있었다며 나를 칭찬해 줬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어머니는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집안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래도 아들이 엄마 생각해서 빌려왔다고 기특한 마음에 재미도 없는 책 한 권을 다 읽어낸 건 아닐까.
대중교통을 혼자 탈 수 있게 된 시절부터는, 혼자 큰 서점에 놀러 가서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책 한 권을 들면 미친 듯이 읽어대는 독서광은 아니었지만, 그저 서점의 그 편안한 분위기가 좋았나 보다. 온갖 책들을 구경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시간도 곧잘 지나갔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가 집 대문 앞에 서면 항상 느꼈던 불안감. 문을 열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서 느끼는 안도감. 그 요동치는 감정의 삶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40대의 우리 어머니도 정말 치열하게 그 순간을 살았다는 것을. 나와 내 동생을 키워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연습을 했다는 것을. 물론 찢어지게 가난한 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 집안 경제는 한 가정을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꿨을 것이다. 본인이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고, 먹고 싶은 것에 돈을 아끼는 것에는 엄청난 절제와 노력,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안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그것들을, 그 당시 어머니는 피나는 노력으로 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술에 절어사는 아버지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그려낼 수 있었을까. 아버지와 싸울 때면, 본인이 가장 무섭고 힘들었을 텐데 울면서 떨고 있는 두 아들을 보는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도 큰 아들인 내가 반장도 하고, 상장도 받아오는 것에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셨을까. 그래도 딴짓 안 하고 만화책보고 책 사서 읽던 내가 조금의 안도감을 주긴 했을까. 지금 나는 내 마음 하나 중심 잡지 못해 방황하는 데, 내 나이 또래였던 그 당시 어머니는 무엇으로 버텨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