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내가 군에 입대한 직후에 아버지는 홀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곳에서 소도 키우고 농사도 짓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어머니는 막지 못했다. 그곳에 할머니도 계시고, 큰아버지 가족과 친구들도 있으니 그나마 좀 낫겠다는 희망으로 아버지를 내려보냈다. 사실 못 막은 게 아니라, 안 막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안 보고 지내는 것이 어머니 본인과 남은 아들들을 위한 삶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대에서 전화를 종종 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술 취한 아버지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와 신세한탄을 하셨다. 고향에 내려간 아버지를 술로부터 통제할 사람은 없었다.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고 병원에 가는 횟수도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런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자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아질 기미 없이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에, 나까지 우울해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느껴 본능적으로 전화하는 횟수를 줄였다. 휴가를 나가 어머니와 동생을 볼 때는 참 반가웠지만, 아버지를 보러 갈 용기는 선뜻 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알콜중독은 사회악으로 분류된다고 하지 않던가. 집안에 알콜중독자가 있으면 모두가 고통을 받는다고. 우리 가족이 그랬다. 술을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은 십수 년간 끊임없이 망가지고 있었다.
내가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어머님은 나에게 아버지를 따라 내려가겠노라 선포했다.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동생도 대학에 들어갔으니, 점점 죽어가는 아버지를 그냥 둘 수 없어 큰 결심을 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까?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분노가 가득한 한탄을 내뱉다가도, 마지막에는 '그래도 네 아빠가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였다. 그때의 나는 '도대체 왜 아빠를 불쌍하다고 하는 거지...?' 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20대 초반 어린 아들에게 아직 알려주지 않은, 아버지에게도 수많은 상처와 슬픔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나에게 아버지는 가족을 망치고 있는 환자일 뿐이었다.
22살 군대를 전역한 직후,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생활비를 마냥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등록금으로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내 대학 생활은 학자금 대출로 진행했다. 조금이나마 어머니에게 보탬이 되고자, 학기마다 생활비 대출을 받아 그대로 다 보내드렸다. 나 역시 어린 나이에 벌써 수 천만 원의 빚이 쌓였지만, 그것보다 내가 아들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는 책임감이 더 컸다. 돈이야 나중에 갚으면 그만이니까.
알콜 중독자의 당찬 포부가 결실을 맺었을까? 전혀. 소를 키운다고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아 축사를 크게 지었다. 처음 몇 개월은 열심히 하는 듯하다가도, 점점 술에 취해 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 그때 깨달았다. 술기운을 달고 사는 사람에게 신뢰가 있을 리가 없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축사를 누군가에게 팔아버렸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죽어가는 남편과 쌓여가는 빚만이 남은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썩어 들어갔을까?
그럼에도 우리 어머니는 요양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삶의 역경을 이겨내며 평범한 듯 살아나가는 어머니를 보면 항상 존경심이 든다. 그럴수록 나 또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이 더욱 심해졌다. 아버지는 끝났으니, 내가 어떻게든 이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내 무의식에 자리 잡았다. 술 취한 아버지를 친척들이 무시하지는 않을까? 내가 봐도 한심한 아버지를 주변에서는 어떻게 볼까? 하는 불안감도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적어도 우리 어머니한테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강한 아들이어만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가 실망할까 봐 말한마디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원한 건 그런 모습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에서 해방된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술 취한 아버지도, 힘들어하는 어머니도 내 일상에는 없었으니까. 그저 내 삶에 충실하면 됐었다. 어머니에게 연락도 많이 못했다. 어떤 대화를 나눌지 너무 뻔했으니까. 가끔씩 전화가 올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나를 지배했다. 어머니에게 모든 어려움을 떠넘겼다는 죄책감도 심했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느끼는 고통과 불안을, 큰 아들인 나는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어머니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사람 구실을 하지 못했다. 항상 취해있었고, 활동이라는 것은 하지 못한 채 늘 누워있었다. 어머니가 보는 광경은 매번 그랬다. 한 번은 전화가 와서 '야, 일 끝나고 집에 들어왔는데 네 아빠가 숨을 안 쉬는 거 같아서 진짜 무서웠어...'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오만가지 감정에 휩싸였다. 고작 대학생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나도 무서운데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공포와 죄책감에 하루가 망가졌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를 알코올 클리닉으로 입원시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곳에 가면 알코올 기운을 빼기 위해 침대에 묶어놓는다고 한다. 금단 증상으로 인한 발작이 있기 때문이다. 약에 취하면 멍해져서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고 한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면회를 가면, 술기운이 빠진 아버지는 초점도 흐릿한 바보와 다름이 없었다. 우울한 마음과 절망스러운 감정에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가고 나면 다 잊고 내 인생을 살면 되니까. 남아있는 어머니에게 살가운 한마디 건넬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나 스스로 판단해 버린 게 너무 많았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어머니는 울지 않을까?'
'괜히 어머니의 상처를 더 깊게 하면 어쩌지...?'
두려웠다.
'나도 힘들어죽겠는데, 어머니의 이야기까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는데, 괜히 이야기 꺼내는 거보다... 그냥 내가 빨리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게... 그나마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이 맞겠지?'
외면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우리 엄마가 실망하겠지?'
'나는 항상 흔들림 없는, 가족의 대들보여야만... 하겠지?
속단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고통과 상처밖에 없을 거라고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강한 아들이 되어 빠르게 자리 잡고 어머니를 돕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힘듦과 고통은 당연한 것이기에, 이를 표현하면 어머니가 실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결국 나 스스로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평생을 희생했는데, 무엇보다 우리의 행복을 빌었을 텐데, 나는 내 삶을 행복보단 고통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결국 내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으며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을 때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무 내색 없이 무뚝뚝하던 아들이 갑자기 무너져버렸을 때, 어머니가 받았을 상처와 슬픔은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