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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어느날 Nov 02. 2024

번외) 나의 어머니_04.

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무난했다. 적당히 공부도 잘했고, 친구관계에 크게 문제도 없었다. 나의 학교 생활은 문제가 없었지만, 우리 집안에는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즈음, 아버지는 부산에서 올라와 같이 지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하던 부산의 모텔이 폐업을 했기 때문이다. 가끔 내려가면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를 보았고, 가끔 서울로 올라올 때의 아버지 또한 항상 취해 있었다. 차라리 안 보고 살았을 때가 속이 편했는데, 매일 그 모습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던 기억이 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방에서 자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거실에서 아무 말 안 하고 앉아있었다. 어머니 지인들이 와서 담소를 나누실 때면, 제발 아버지가 깨서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곤 했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도, 아버지가 방에서 자고 있을 때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술 취해 몸도 못 가누는 아버지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따로 떨어져 살았을 때가 편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내가 어느 정도 집안에 대한 상황파악이 끝난 이후부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다. 괜히 어머니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제정신이 아닌 아버지와 무뚝뚝한 아들 둘이 있는 집 안에서, 아마도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약한 모습,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나 역시도 학년이 하나씩 올라가면서, 아버지를 대신해야만 한다고 모든 가치관이 방향을 잡아갔던 것 같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활짝 웃었던 순간이 있을까?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두 번이다. 첫 번째는 내 반삭발 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학생 때는 두발 규제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항상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녔다. 그러다 내가 처음으로 머리를 3mm로 빡빡 밀고 집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나를 보며 크게 웃었다. 두 번째는, 학부모 상담 때문에 학교를 방문하던 어머니를 만났을 때이다. 나는 친구들과 같이 하교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학교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크게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갔고, 반가운 마음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때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하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돈을 벌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의 정직원으로 들어가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다. 발에 굳은살이 잔뜩 생겼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일주일에 하루씩 쉬면서 힘들게 번 돈을 어머니에게 거의 다 드렸다. 보란 듯이 묵직하게 현찰로 찾아서 가져다 드렸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너무 고맙다고 하셨지만 환하게 웃음 짓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고생만 하는 어머니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을 뿐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돈을 받는 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겠지. 그때는 잘 몰랐다. 단순히 내가 번 돈으로 어머니가 좀 여유로워 지기만을 바랬을 뿐이다. 


솔직히 나도 힘이 들었다. 남들 한창 학교 다니면서 재밌게 지내는데, 물론 내가 원해서 한 일이지만 몸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몸이 좀 피곤해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엄마가 그런 나를 보며 '아들,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아니 아무 일 없어요, 일은 무슨... 출근해야지.' 


사실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투정도 좀 부리고 싶었다. 그랬으면 어머니와 나는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지금은 사라진 102 보충대, 그곳에 가는 날에는 아버지도 술에 취해있지 않았다. 두려움 반, 체념 반으로 보충대 안 야외 강당에 모여있을 때, 조교가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큰 절하고 싶은 장병들만, 선착순으로 아래로 내려오시길 바랍니다.'


나는 고민했다. 마음속으로는 내려가고 싶었는데, 워낙 무뚝뚝하고 감정표현이 없었던 우리 가족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조금은 낯간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조교는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장소가 협소해서 50명만 내려오겠습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스프링처럼 튕겨져 내려갔다. '에라 모르겠다, 마지막인데 인사는 해야지.' 정도의 심정이었을까. 막상 내려가보니 별 느낌 안 들었다. 낯간지럽지도, 민망하지도 않았다. 


조교의 지시에 따라 다 같이 큰절을 했다. 그리고는 가족들이 있는 곳을 쳐다봤을 때, 나는 너무 놀랐다. 


어머니는 펑펑 울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나 또한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고개를 떨궜다. 


'내려오길 잘했다.' 그때의 내 선택은 여전히 내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이다.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어머니도 여자라는 것을. 지인들이나 친척들과 있는 모습을 보면, 공감도 잘하고 대화도 많이 하는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 아버지 때문에 힘들 때면 울기도 했고, 못살겠다며 소리도 지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묻지 못했다. 힘들지 않으시냐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겠느냐고.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참아내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아들에게 의지하고 싶었을지도 그리고 좀 더 살가운 우리의 모습에 더 활력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강한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정신을 무장하며 살았기 때문에, 힘든 내 일상을 티 내지 않고 감추지 바빴다. 그렇게까지 했을 필요가 있나 싶다. 힘들다고 툴툴거리면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하긴, 그때의 나는 어머니가 모든 걸 털어놓기엔 너무 어렸고 나 또한 어머니의 눈치를 더 많이 보며 살았으니까. 서로에겐 최선의 배려를 하고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는 좀 변해보려고 한다. 

여전히 어머니는 아들의 전화 한 통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금은 살가워진 아들로부터 조금이라도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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