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초, 독서 토론에서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했다. 토론이 한창이던 중, 나는 우연히 표지를 봤다. 동그란 원안에는 빅뱅을 연상시키는, 붉은 계열의 폭발하는 듯한 이미지가 있었다. 너무 강렬했다. 매우 궁금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토론 틈틈이 그 이미지를 보면 생각했다. 그러다 번득 떠올랐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눈이. 그래서 눈동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토론이 끝나고 눈동자에 대해 검색했다. 그것은 눈동자, 더 정확히는 홍채였다. ‘그런데, 왜 표지에 홍채를 넣었지?’, ‘ 홍채와 내용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읽은 내용과 토론에서 주고받은 내용을 곰곰이 곱씹어봤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이유를 찾았다. 홍채와 책의 내용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본다’라는 행위가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이후 책의 표지를 예사롭지 않게 보게 되었다.
혹시나 해서 최근에 읽은 다른 책들도 찾아보았다. 몇 권이 있었다. 키워드와 관련된 책으론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있다. 표지에는 디젤기관차에 객차가 줄줄이 연결된 기차가 보인다. 이 기차가‘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다. 기차의 이름을 ‘소크라테스’로 지어서, 철학은 소크라테스가 이끄는 기차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책을 이끌어 가는 방법론이었다. 또 다른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다. 여기에는 에곤 실레의 ‘The self-seers 1’이라는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The self-seers 1’에는 쌍둥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분위기도 그로테스크하다. 책도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은 쌍둥이이고, 이들이 보여주는 내용 또한 그로테스크하다. 쌍둥이가 키워드였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불확실한 벽’의 표지는 전체가 진녹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중간에 사발 모양의 검은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다채로운 색상의 행성 띠 같은 것이 있다. 이는 '꿈을 읽는 이'와 그가 읽는 '꿈의 알'이었다. 이 또한 키워드였다.
이와는 달리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표지는 지향점이었다. 표지에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있다. 그림의 제목은‘Light Over Grey’ 즉, ‘회색을 넘어 빛으로’였다. 1990년대, 붕괴한 이념의 혼돈을 넘어서고 싶은 시인의 의지가 표지에서 느껴졌다.
또한 김훈의 ‘남한산성’의 표지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소설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입성한 이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표지에는 긴 행렬이 그려져 있고, 남한산성으로 향하고 있다. 남한산성 입성 이전의 이미지였다. 프롤로그였다. 반대로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는 에필로그다. 처음에는 표지가 좀 생뚱했다. 진지한 철학적 질문에 어울리지 않게 관광지인 산토리니 이아 마을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스케치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를 이해했다. 그 표지가 저자가 마지막에 하고자 했던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표지가 디자인적으로 책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거나, 책을 보호하는 기능을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은 이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 대부분은 책의 표지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키워드와 지향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표지의 존재 이유다. 표지에는 책에 대한 이런 정보가 스며있고, 이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봐주길, 들어주길 표지는 바라고 있다. 다만 우리가 외면할 뿐이다.
우리가 외면한 표지의 속삭임에 나는 귀를 기울이려 한다. 이 속삭임을 통해 표지와 책의 내용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소리가 너무 작아 왜곡될 수 있다. 왜곡으로 인해 연관성은 출판사 표지 디자이너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곡으로 인한 해석에는 나의 경험이 녹아있고, 그것이 표지와 책의 내용이 연결된 해석의 통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지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