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새벽 비는 차가운 칼날. 전날 저녁과 당일 아침의 계절을 가차 없이 갈랐다. 가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추위가 왔다. 첫추위는 그 해 겨울에서 가장 추웠다. 뒤이어 오는 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그랬다. 다른 추위는 심리적으로 준비된 상태에서 맞이했으나, 첫추위는 심리적 무방비 상태에서 맞이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시 비가 내린다. 저녁 근무 들어가기 전, 한 시간 여유가 있어 근처 카페에 간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한 모금 마신다. 따뜻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출근길에, 몸에 스민 한기가 녹는다.
남한산성의 표지를 본다. 하얀 여백에 긴 행렬이 보인다. 긴 행렬은 표지의 앞과 뒤를 잇고 있다. 앞표지에는 뒤표지보다 말(馬)도 많고, 인물들도 상대적으로 크다. 원근법이 적용되었다. 뒤표지의 인물들은 작아져 끝내 사라진다. 여기서 역사를 본다.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정치사이고, 정치는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여정이다. 여정을 이끄는 이들은 대부분 지배계급이고, 지배계급을 이끈 인물 몇몇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래서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인물사이기도 하다. 역사는 화석에 비유될 수 있다. 화석은 뼈로 존재하고, 이것으로 시대의 많은 것이 판단될 수밖에 없다. 뼈를 감쌌던 살과 근육은 지층과 시간의 압력에 의해 사라졌다. 역사에서 백성이 바로 뼈대를 감쌌던 살과 근육이다. 이들도 선택적으로 기록한 붓끝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붓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붓끝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역사의 뼈가 되고, 이들과 관련된 사건이 뼈대가 되어 정치사가 되었다. 뼈가 된 인물들이, 뼈대가 된 사건이 앞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뒤표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점으로 사라지고 있다.
커피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온기를 느껴본다. 겨울비가 창을 두드린다. 다시 표지를 본다. 표지의 공간을 채운 하얀 여백에서 시린 한기를 느낀다. 행렬 머리 위로 검은색에 가까운 먹구름이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한기는 먹구름에 막혀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서린다. 한기 서린 생명은 소리도 얼어 말(言)이 없다. 모두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이다. 한기에 얼어붙은 침묵이 두꺼운 빙하처럼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행렬은 산성을 향하고 있다. 프롤로그였다. 이미지가 끝나는 곳에서 산문(散文)이 산성의 문을 열고 행렬을 성안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47일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병자년 12월, 인조가 몽진하려던 강화 길이 막혀, 급히 가마를 돌려 들어간 남한산성은 생과 사를 비정하게 가르는 칼이 되었다. 성안은 냉기에 메말라가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바스락거리는 죽음마저 장엄함으로 덧칠하고자 했다. 성 밖은 삶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말(言)들이 있었다. 냉기에 실린 죽음이 서서히 스며든 성안에는 능욕을 견디며 삶을 이어 가야 한다는 비루한 말(최명길의 경우)과 죽음을 견디며 껍데기뿐인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부질없는 말(김상헌의 경우)이 있었다. 항복과 함께 청과 군신의 맹약을 맺고, 굴욕적인 의례를 자신의 임금에게 요구해야 했기에, 그 주장의 말은 비루했다. 쓰러져 가는 명에 충성하고, 강대한 청에 대항하자는 결사 항전의 요구는 허약한 현실을 외면했기에, 그 주장의 말 또한 부질없었다. 그리고 비루한 말과 부질없는 말 사이에서, 양비론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서 더욱 드러난 비굴한 말이 있었다. 말들 사이에서 인조는 자기 말을 내지 못했다.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왔을 때, 그 무방비로 인해 그는 심한 한기가 들었는지 모른다. 한기로 마음이 얼어붙었기에, 자기 말을 낼 수 없었는지 모른다. 끝내 인조는 비루한 말로 얼어버린 자기 말을 대신했다. 서문을 열고 치욕의 길을 걸어 삼전도에서 능욕을 감내했다. 비굴한 말은 시류에 편승하며 부질없는 말을 포박하여 심양으로 보내, 비열한 말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쨌든 삶은 이어졌다.
사심 없는 진심으로 말을 이끌고 실천으로 그려낸 비루한 말과 부질없는 말은 성 밖을 나오고 나서, ‘비루한’과 ‘부질없는’이라는 단어를 떼어냈다. 47일간 벌어진 말의 전장에서 비열한 말과 부질없는 말에는 진정성이 녹아있고, 그 말을 행동으로 드러내,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실천이 되고, 실천은 평가될 삶이 되어 사람을 드러냈다. 그러나 비굴하고 비열한 말에는 진심과 실천이 없었기에, 성 밖에서 ‘비굴한’과 ‘비열한’이라는 단어가 말에서 떨어져 나갈 반전의 기회는 없었다.
요즘 여기저기 말들이 넘쳐나고 있다. 넘쳐나는 말 중에서, 실천으로 옮겨져 책임을 다하는 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실천과 책임을 외면한 말들은 공허하여, 가벼이 공간을 부유하며 시류에 편승한다. 그 시렸던 남한산성의 비열한 말이 된다. 지나온 시간 속에 뿌려진 내 말들은 꼬리를 떼지 못한 비루한 말과 부질없는 말은 아니었는지 또는 말들 사이를 방황하며 오가는 비열한 말은 아니었는지, 생각을 벼려본다. 서늘한 칼 같은 찬비가 광장에 서 있는 나무의 몇 없는 죽은 잎들을 사정없이 베어내고 있다. 생기 없는 말을 자르고 싶다.
책을 덮자, 긴 행렬이 다시 보인다. 앞표지와 이어봤던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긴 행렬이 아니다. 뒤표지만 보자 그 행렬은 청으로 향하고 있다.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돌아와 환향녀라 손가락질받던 공녀들 그리고 포로가 된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백성이 행렬을 메우고 있다. 남한산성에서 벌인 전장의 말은 추상(抽象)이었다. 백성들은 말의 추상을 육화 하여 오랜 시간 이렇게 모욕의 길을 걸어갔다. 에필로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