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10분 청량리역. 6시 22분에 출발하는 강릉행 KTX를 탄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좌석을 찾아 앉는다. 컵 홀더에 커피를 놓고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요즘 트렌드는 분명 아니다. 돈과 관련된 재테크, 즉 인간의 외부 조건에 모두가 시선을 둘 때, 인간 내부로 시선을 집중하는 철학은 아무래도 한물간 고리타분한 유물이다.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심정으로 책을 본다. 겉표지엔 낡은 클래식한 객차를 디젤기관차가 끌고 있다. 열린 창에 위험하게 팔을 걸친, 중절모를 쓴 에릭이 보인다. 그의 애견 파커도 보인다. 열차 밑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고 궁서체로 쓰여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책의 이름이면서, 아마 철학이라는 디젤기관차가 끄는 열차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
승차 안내 방송이 나온다. 출발하기 5분 전이다. 잠깐 생각해 본다. 기차 이름이 왜 소크라테스일까? 철학의 시작과 관련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자연이 아닌 인간 내부로 철학의 시선을 옮긴 최초의 인간. ‘진정 중대한 철학상의 문제는 오직 하나 밖에는 없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것이다.’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시각으로 바꾸면 ‘진정 중대한 철학의 대상은 오직 하나 밖에는 없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시각의 전환으로 제기된 인간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전의 자연철학은 자연에 대한 궁금증에 나름대로 여러 해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해답이 아닌 질문만 끝없이 던졌다. 이렇게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외침’이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부터 철학은 시작되었다. 에릭은 말한다.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의 사상 같은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수단만 있을 뿐, 그 끝은 없었다. ’라고. 바로 그 유명한 대화법.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내용이 아니라 방법에 있다. 아테네 시민 한 명, 한 명과 행했던 대화, 그 자체가 그의 철학이다.
책은 시나리오처럼 형식화되어 있진 않지만, 많은 대화로 가득하다. 에릭과 철학자들과의 대화, 에릭과 그의 딸 소냐와의 대화 그리고 에릭 자신과의 대화. 대화들은 쉽게 이해되지만, 절대 시시하지 않다. 철학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도, 그도 각자의 철학을 일방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혼자 떠드는 독백이 아니라 주고받는 대화다. 이를 통해 뭔가를 변화시킨다. 사물이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다. 이런 변화를 유도하는 대화가 철학으로 가득한 책을 관통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표지에 그려진 기차가 철학의 은유라면, 대화법은 기차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기차에서 소크라테스는 엔진이다. 그런 엔진을 장착한 기차의 이름에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당연하다. 소크라테스 엔진을 단 기차는 여러 대의 객차를 연결하여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각 객차에는 에릭이 엄선한 사상가, 14명의 이름이 붙어있을 것이다. 이들 사상가는 그가 아카데미에서 글로 만난 이들이 아니다. 그가 또는 딸 소냐와 함께 그들이 살았던 공간에 가서 몸으로 생생하게 경험하며 만난 이들이다.
아우렐리우스
KTX가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KTX가 천천히 움직인다. 현대식으로 잘 빠진 역사를 벗어나고 있다. 저속인 시내 구간을 빠져나오자, 속도는 순식간에 높아졌다. 그리고 정속주행.
그런데 첫 장이 왜 아우렐리우스일까? 철학의 여명을 열었던 소크라테스가 아니고. 소제목은 말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이라고. 하루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나야 한다. 이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불속에 계속 누워있으면 시간은 가도 개인의 하루는 여전히 오밤중이다. 일어나지 않고 어떻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까? 새벽에 이불의 유혹을 이겨냈기에 나 또한 지금 KTX를 타고 있다. 그 일어남의 고단함을, 하루를 여는 힘겨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잠깐, 알겠다. 목록을 다시 본다. 1부 새벽, 2부 정오, 3부 황혼. 이건 시간이다. 하루라는 시간. 좀 더 주의해서 세부 목록을 본다. 문득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생각났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라는. 오이디푸스는 맞췄다. ‘인간’. 그렇다. 에릭은 인간의 삶을 하루라는 시간 속에 녹아내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은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아이가 나오는 것에 대한 은유다. 한 인간의 인생이 시작되는 탄생의 순간부터, 1부 새벽은 아이들이 하는 기초적인 행동들-궁금해하고, 걷고, 보고, 듣고-에 대해 그와 철학자들이 주고받은 대화다. 2부 정오는 인생의 황금기로 즐기고, 관심을 기울이고, 싸우고, 베풀고, 감사하는 것에 대해, 3부 황혼은 인생이 저무는 시기로 후회하지 않고, 역경에 대처하고, 늙어가고, 죽는 방법에 대해 그는 철학자와 대화하고 있다. 형식은 하루의 시간이고, 내용은 인간의 삶, 여러 시기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으로 이것들을 얼기설기 엮었다.
익스프레스
속도가 서서히 줄어든다. 기차가 양평역에 정차한다. 몇 사람만이 탄다. 시간은 6시 47분. 청량리역에서 양평역까지 25분 걸렸다. 에릭은 기차가 아닌 기차 타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경험이다. 오로지 기차로 이동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광활함과 아늑함의 희귀한 조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기차에서 다른 것을 본다. 기차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한다. 기차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달리면서 공간들을 빠르게 연결한다. 이를 위해 기차는 시간을 소비하며 앞으로 달린다. 인간의 삶도 시간을 소비하며 앞으로 달린다. 연료로 소비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재생되지 않는다. 되돌아오지 않을, 인생의 여러 시기를 거치며 나아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차는 인생의 은유다. 나에게 기차는 형상화된 인생이다.
기차는 다시 출발한다. 기차의 속도로 인해 창밖의 풍경은 윤곽이 흐려지며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속도는 조급함을 낳는다.’라고 에릭은 말한다. 조급함 속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다. 속도와 조급함은 등치가 된다. 한때는 빨랐으나, 지금은 느린 표지의 디젤기관차에 타서 창밖을 보면, 사물은 KTX보다 좀 더 명확히 보일 것이다. 기차의 속도에 따라 사물의 본모습이 보이기도, 안 보이기도 한다. 인생의 속도도 각자 다르다.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라는 그의 말을 통해 질주하는 인생이 좋은 것은 아님을 느낀다. 이젠 브레이크를 밟을 때다. 속도를 줄이고, 생각과 달리 변해있을지 모를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크로노스, 카이노스 그리고 철학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느리다. 기차마다 속도는 다르다. 다른 속도 때문에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시간도 다르다. 빠르거나 느리거나. 공간은 그대로 있고 시간만 변한다. 그래서 기차에서 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흘러간다. 에릭은 시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가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노스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이 KTX는 크로노스다. 6시 22분 청량리 출발, 8시 05분 강릉 도착. 이 기차를 타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저마다 다르다.
화장실을 가야 한다. 커피를 마신 나는 더는 참을 수 없다. 지금 화장실 가는 것이 ‘딱 맞는 적절한 때’다. 내 카이로스다. 기차 여행에서 화장실 가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 인생에서 개인들이 문제에 부딪히는 때가 카이로스다. 같은 사춘기라는 크로노스에 있다 해도 누구는 무탈하게 지나가고, 누구는 문제에 부딪힌다. 문제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이의 시간이 카이로스다.
나는 참지 않고 화장실을 다녀온다. 커피의 이뇨 작용으로 인한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냥 화장실에 가면 된다. 이때는 철학이 필요 없다. 그러나 화장실에 갔는데 문이 잠겨있다면, 다른 화장실도 마찬가지라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결정해야 한다. 너무 급하다면 공중도덕을 무시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부는 갈등에 빠진다. 선택이라는 갈등에 빠진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때 철학은 스며든다. 철학은 도덕률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의 잔소리처럼 암암리에 끼어든다. 이런 상황은 분명 카이로스다. 개인이 부딪히는 유니크한 카이로스의 문제는 해결을 위한 선택의 문제로 변한다. 선택을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철학이 그 기준을 세워줄 수 있다. 그래서 각각의 상황에 맞는 철학이 필요하다. 에릭은 자신의 휴대전화 액정이 깨졌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사상가 열네 명이 제시한, 삶을 고양시키는 시를 흡수하며 몇 년을 보냈는데 왜 그들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궁금해진다. 내가 이 작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철학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철학은 진리란? 지혜란? 인생이란? 등과 같은 거대 담론에 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거대 담론은 삶 전반에 걸친 문제다. 삶 전반은 시간 측면에서 보면 크로노스다. 재깍재깍 일정한 간격으로 흐르는 시간. 그러므로 거대 담론은 인간의 시간 전체를 담보로 하는 크로노스 문제들이다. 인공위성에서 푸른 지구를 보았을 때 보이지 않은 추상화된 인간에게서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철학의 전부는 아니다. 인공위성을 계속 하강시키면, 어느 순간 바삐 움직이는 바글바글한 인간들이 보인다. 그들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살아가는 방식도, 이유도 다르다. 그래서 문제도, 문제를 갖는 시기도 각각 다르다. 즉 카이로스 문제들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유니크한 작은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도 철학은 답해야 한다. 작은 담론에도 철학은 그들에게 지지대가 되어야 한다.
에릭은 이 점을 말하고 있다. 개인의 작은 담론에도 철학은 귀 기울여야 하고, 그것이 철학의 또 다른 역할이라고. 이런 고민이 그로 하여금 책을 쓰게 했는지 모른다. 책은 그 자체로 페이지로 완결된 크로노스다. 한 사람이 책을 드는 순간, 그 사람은 독자가 된다. 이때 책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서로에게 카이로스가 되는 순간이다. 독자와 책의 만남, 그 속에서 독자는 무언가를 찾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하루에 비유하며 인생의 여러 시기에 어울리는 철학들을 뷔페처럼 내놓았는지 모른다.
‘여러 다양한 철학은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소로의 저항 정신은 10대의 마음을 끈다. 니체의 불꽃같은 강렬한 아포리즘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자유를 강조하는 실존주의는 중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토아 철학은 나이 든 사람을 위한 철학이다.’
독자는 자기 취향에 또는 자기 상황에 맞게 찾아서 읽으면 된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을 필요가 없다.
시몬 베유 그리고 솔직함
다시 속도가 줄더니 멈춘다. 평창역. 2분간 정차. 사람은 없다. 2분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시간도 상대적이다. 창밖을 본다. 하늘을 보니 어둡다. 비가 내리려나? 우산은 챙기지 않았는데. 기차는 출발하고 다시 책을 본다.
책은 철학을 말하지 않는다. 철학자를 이야기한다. 에릭이, 또는 다른 이들이 전하는 철학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주장한 철학의 일면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여행에서 만난 자신의 문제에 대해 철학자를 불러내, 시도한 대화를 통해서도 철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어떻게 대화만으로 철학의 일면을 보여줄까? 철학자와의 대화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여전히 굳건히 남아있다. 그러나 대화는 문제를 대하는 그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그는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얻는다. 철학은 그의 시각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조용히 드러난다.
시몬 베유와의 대화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에릭의 10대 같은 인간미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책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시몬 베유를 부른다. 베유는 그와 잃어버린 공책의 관계로 소유와 욕망 그리고 관심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녀는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그것은 관심과 양립할 수 없다고 한다. 관심에는 외부적 동기가 묻어있지 않으며,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기다리라고 한다. “우리가 가장 소중한 선물을 얻은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라며.
둘의 대화 중간중간에, 에릭은 대화하기 힘든 10대처럼 군다. 이 점이 너무 좋다. 그도 철학자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철학자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현명함, 절제, 고상함, 이성적인 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는 화내고, 흥분하고, 하소연하는 우리였다. 베유의 설명에, 그가 보인 반론은 논리적이지 않았다. 감정적이었다. 그래서 더 공감이 갔다. “문제는 늘 우리가 너무 적극적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수색에 나서고 싶어 한다”라는 베유의 설명에 그는 대답한다. ‘이 문장이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짜증 나게도 한다. 당연히 수색에 나서고 싶죠, 시몬! 수색에 나서는 것 말고 내가 내 공책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나요?’
정말, 짜증이 잔뜩 베인 문장이다. 에릭의 가감 없는 솔직한 감정이다. 이런 솔직한 감정의 표출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솔직함은 대화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가장이나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가장이나 거짓으로 자기를, 상대를 속이고 있는 대화는 어느 순간 거대한 벽에 부딪히고 만다. 대화는 그곳에서 멈춘다. 그러나 에릭은 자신을 거짓 없이 보여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받아들인다. 솔직함이 편견을 없애고 수용을 이끌고 있다.
그는 시몬에게 짜증을 내지만,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욱 기꺼이, 더욱 끈기 있게. 기다림은 그 자체가 보상이므로’라는 결론에 다다르며, 결국 베유의 말을 수긍한다. 사실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진 못한다. 그래서 철학은 연약하다. 그러나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하면서 문제에 맞서게 한다. 그래서 철학은 강하다.
여행 그리고 독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며 점선을 만들고 스르르 사라진다. 풍경도 사라진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어두운 창에 묻은 빗방울들은 객실 등에 반사되어 우주의 별들처럼 빛난다. 이때 창에 비친 내 모습은 우주에 혼자 남은 자의 초상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책은 여행기다. 많은 경우, 뭔가 문제를 안고 떠난 여행은 해결책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는다(불행히도 그 사이 문제는 더 복잡해져 있다). 다만 자신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태도 변화는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싸울 용기를 가지게 한다. 이것만으로도 여행은 목적을 다한 것이다.
에릭은 기차를 타고 여러 도시를 찾아다닌다. 때론 혼자, 때론 딸 소냐와 함께. 관광이 목적인 일반적인 여행과 다르게, 그는 철학자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그들이 살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끼길 원한다. 그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따라 해보기도 한다. 소로처럼 허리를 굽혀 뒤집어 세상을 보기도 하고, 루소나 니체처럼 걷기도 한다. 간디처럼 요가 익스프레스를 타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실패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길 원했다. 그들의 생각을 문자가 아닌 경험으로 체험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실패한다. 그럴 땐, 그는 철학자의 책을 손에 들고 카페에 간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읽는 행위는 보는 행위다. 읽기 위해서는 페이지에 있는 문자들을 눈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보는 행위를 대화라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본다.
‘나는 액정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 처음에는 이 각도로, 그다음엔 다른 각도로. 나는 고장 난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기보다는 휴대전화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는 것은 곧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는 독서라는 보는 행위를 통해 철학자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속에서 그는 문제를 다르게 본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그는 철학자의 생각을 경험한다. 마지막 장인 도착 편에서, 에릭이 휴대전화의 깨진 액정에 대처하는 장면은 그가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철학자들의 시각을 통해 이 사건을 다양하게 살펴본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뭐가 바뀌었지? 내 휴대전화는 아니다. 액정은 여전히 깨져있다. 자연의 법칙도 아니다. 자연법칙은 고정불변이다. 바뀐 것은 내가 나 자신과 나눈 대화다. 나는 다르게 생각했고, 그래서 다른 것을 보았다. 작디작은, 정말 사소한 관점의 변화였지만, 세이 쇼나곤이 알려주었듯이 작은 것에는 위대한 힘이, 아름다움이 있다.’
자신과의 대화라는 여행에서, 독서라는 철학자와의 대화에서, 에릭이 경험한 철학의 힘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다. 이 변화는 철학, 독서 그리고 여행을 관통한다. 그는 철학자들을 도시에 그대로 남기고 왔지만, 그의 경험은 체화되어 그의 몸에 남아있다. 그리고 문제의 상황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이런 모든 경험이 담긴 책은 절대 고리타분하지 않다. 그는 철학을 하는 방법이 아닌 철학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철학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 문제를 돌파할 힘을 주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은 자기개발서다. 트렌디하다.
강릉역
하차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 기차는 강릉역에서 멈춘다. 8시 05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본다. 먼저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사자. 그리고 택시를 타고 초당 순두붓집에 가서 아침을 먹자. 잠깐 이런 이른 시간에 문을 열었을까? 안 열었다면 어떻게 하지? 예상치 않게 비도 오고, 아침도 못 먹고. 투정할 수 있다. 이때 스토아 철학을 불러보자.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자. 초당순두부가 아니면 어떤가? 구글 신에게 물어 열린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된다. 아침을 해결한 후 해변의 방풍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루소의 도움을 받으며 걸어가 보자. 신발과 바짓단이 젖으면 어떤가? 걷고 있다는 것에 집중하자. 안목항에 도착하면 비를 맞고 있는 바다를 보자. 작은 물방울들이 거대한 물에 부딪혀 사라지는 풍경을 보자. 소로의 눈을 빌려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펼쳐보자. 그리고 조용히 에릭을 불러 대화해 보자. 그의 경험을 더 듣고 싶다.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