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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애월, 그리고 민들레

15코스B (한림항←고내포구, 13km ) 1

by 커피소년

역시 무릎이었다. 무릎은 쇠공이 박힌 듯 묵직했고, 그만큼 뻣뻣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묵직함과 뻣뻣함은 심해질 것이고, 그 주변으로 영향력을 미쳐 결국에는 온몸을 무겁게 할 것이다. 무릎의 증상을 보곤 오후 4시 30분까지 15코스를 완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몸이 이러니 마음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20241022_114038.jpg <15종착점과 16코스 시작점의 간세>

원래는 괜찮은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짧은 시간이라도 커피를 마시려고 했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은 간단하게 해결하기를 원했다. 파란 올레 공식 안내소 앞에 있는 간세에서 스탬프를 찍고 편의점 CU로 갔다. 간단히 빵과 컵라면으로 때우기로 했다. 빨리 익히기 위해 컵라면을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동안 빵을 먹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전자레인지를 열어보니 컵라면 국물이 흘러넘친 것이다. 순간 점원에게 이야기할까? 아니면 내가 처리할까? 고민하다 내가 처리하기로 했다. 점원을 흘깃 보니 다른 일로 바빴다. 재빨리 배낭에서 휴지와 물티슈를 꺼내 전자레인지 안을 닦으며 의도하지 않게 전자레인지 청소를 하게 되었다. 물기 없는 뻑뻑한 라면을 어찌어찌 먹었다. 커피와 에너지바를 계산하려고 카운터로 가자 점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왔다. 이야기할까? 하다 계산만 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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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코스 역방향 분기점과 우주물>

편의점 근처에는 15코스가 A, B 두 코스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있다. A 코스는 내륙 길에 16.5km였고, B 코스는 바닷길에 13.5km였다. 짧은 B 코스를 선택했다. 분기점 옆에 작은 개울이 흘렸다. 밤새 내린 비로 인해 흙탕물이었다. ‘우주물’이라는 곳이다. 우주물? 별들을 품은 우주를 연상시켜 개울의 크기에 비해 이름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안내문을 읽었다. ‘우’는 언덕 사이의 물이라는 의미이고, ‘주’는 물놀이 친다는 뜻이었다. ‘우주물’은 언덕 사이로 흐르는 물이고 물놀이하는 곳이었다. 물놀이하기에는 조금 작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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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포구 풍경>

우주물은 고내포구로 흘러들었다. 고내포구로 갔다. 형광색으로 만든 ‘GOnae’라는 큰 글자 옆에 파란 점퍼에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가 난간을 짚고 서 있었다. 느낌은 올레길을 걷는 이인 듯했다. 포구 내의 바닷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등판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고내는 ‘높을 고(高)’에 ‘안 내(內)’여서 마을이 높은 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이곳은 해수면과 비슷한데, 어디가 높다는 것일까? (걸어보니 이곳부터 시작된 15코스는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해안 길이었다) 포구 전에 있던 다락쉼터와 그 주변은 지대가 높았다. 고내리 대부분 지역이 그곳에 있다면 지명하고 어울린다. 이곳은 포구이니 지대가 낮은 건 당연하고 고내리의 작은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그의 고독한 등을 보며 나는 이런 작은 생각을 했다.



20241022_120744.jpg <무인카페 산책>

포구를 지나면 짧은 마을 길이 시작된다. 초입에 ‘산책’이라는 무인 카페가 있다. 내 눈길을 끈 건 고급스러움이었다. 차분한 하얀색과 적당히 강렬한 귤색이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은 ‘산책’이라는 글씨체도 한몫했다. 깊은 단아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곳이 서점이거나 고급 카페였다면 이런 인테리어 분위기를 당연하게 여겨서 눈길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무인카페였고, 그래서 눈길이 갔다. 가성비를 극대화한 인테리어로 무장한 무인카페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의 커피는 공정무역의 유기농 원두를 사용한다고 창문에 써놨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지 않았다면 들어갔을 것이다. 내부가 어떤지 궁금했다.



20241022_120850.jpg <골목의 간세>

‘산책’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속 빈 블록 벽돌로 쌓은 담장이 이어졌고, 입구에 빨간색과 노란색의, 책꽂이 같은 목조 간새가 15코스의 시작을 반겼다. 순방향으로 걸었다면 15코스의 끝에 다다른 수고로움을 녹여 작은 미소를 짓게 했을 것이다. 골목은 조금 큰 골목과 만나 더 넓어졌다. 유홍초, 송엽국, 털별꽃아재비가 집담에 수북이 핀 골목의 집들이 밀도가 점점 엷어지며 길의 주변이 초록으로 환해졌다. 밭 사이로 난 길에 현대오일뱅크 공장이 있었다. 공장은 깨끗하게 관리된 듯했으나 산업시설은 왠지 공간을 이질적으로 느끼게 했다. 길은 큰 애월항을 도는 해안도로와 살짝 만나고 고내리에서 애월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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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초, 털별꽃아재비, 송엽국>


애월리 속으로 난 길을 걷다 어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조용한 마을 상공으로 그 노래는 은은히 펴져 가고 있었다. 우효의 ‘민들레’였다. 무척 좋아하는 노래다.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간절함을 숨기며 은은히 밝은 척 고백하는 노래다. 중학교 때 버스에서 첫눈에 반해 가슴앓이했던 첫사랑이 떠올랐다. 저런 마음이 그때의 내 마음이었다. 첫사랑이 아니라도 고백하지 못한 외사랑을 품은 사람이라면 이 마음이지 않을까?


우리 손 잡을까요 / 지난날은 다 잊어버리고 /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 우리 동네에 가요 / 편한 미소를 지어 주세요 / 노란 꽃잎처럼 내 맘에 사뿐히 내려앉도록 / 바람결에 스쳐 갈까 / 내 마음에 심어질까 / 너에게 주고만 싶어요 / 사랑을 말하고 싶어 / 사랑해요 그대 있는 모습 그대로 / 너의 모든 눈물 닦아주고 싶어 / 어서 와요 그대 매일 기다려요 / 나 웃을게요 / 많이 그대를 위해 많이 많이 웃을게요 / 우리 손 잡을까요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 오늘은 안아줘요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 이제는 춤을 춰요 (왜 왜 자꾸 멀어지려 해) / 우리 동네에 가요 (왜 왜 자꾸 놓아주려 해) / 놓아주려 해 / 바람처럼 사라질까 / 내 마음을 채워줄까 / 나는 너를 보고 싶어요 / 너와 함께 하고 싶어 / 사랑해요 그대 / 있는 모습 그대로 / 너의 모든 시간 / 함께 하고 싶어 / 어서 와요 그대 / 같이 걸어가요 / 웃게 해줄게요 / 더 웃게 해줄게요 / 영원히

https://youtu.be/buMauUVG0Fg?si=d2KMN5CuvYws2MQd



노래는 애월중학교에서 흘러나왔다. 12시 25분이었다. 점심시간인가 보다. 중학교 점심시간에 이런 서정적인 노래가 흘러나오다니. 방송부 학생들이 선곡했나? 서서히 지쳐가는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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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리에서 애월리로 가는 길의 풍경>


새로운 마음으로 걸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된 집담의 호위를 받은 마을의 골목길은 애월 옛 포구를 지났다. 노란 돌난간이 시작되는 곳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어야 했다. 여기에 애월진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성은 수군들이 전투를 위해 해변에 쌓은 성곽이다. 제주에는 9개 진성이 있고, 그중 하나가 애월 진성이다. 21코스 하도포구에 있던 별방진도 진성이다. 애월진성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관군을 막기 위해 나무로 쌓은 목성이었으나, 1581년(선조 14년) 제주 목사 김태정이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새로 쌓아 석성이 되었다.

20241022_123226.jpg <애월 옛 포구 길의 난간/ 난간 전에 애월진성이 있다>


그러나 올레길 걷는 이 중에서 이곳에 애월진성이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까? 가보면 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느 유치원의 높은 축대처럼 보인다. 성 위에 놀이시설의 지붕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알아보니 유치원이 아니라 애월초등학교였다. 즉 애월초등학교가 애월진성 안에 있어 진성을 성이 아닌 담이나 축대로 인식하게 했다. 그리고 이곳에 문화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할 만큼 주변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버렸다.

로드뷰_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png <애월진성 / 사진 출처 : 카카오맵 >


애월포구는 포구 앞바다에 애월항이 만들어지면서 애월 옛 포구가 되었다. 짧은 옛 포구의 길을 걸으며 애월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애월은 내 마음에 조용히 침윤되었다. 방송에서 제주 애월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외사랑 분위기의 시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월(涯月), 물가에 뜬 달이다. 달이 있으니 밤일 것이고, 달빛이 바다에 은은히 빛나는 밤 풍경이 생생히 그려진다. 그리고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사랑하는 님 오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와 함께 황진이의 또 다른 사랑의 시들이 달빛에 스며 고요히 밤 공간에 내리고 있다. 이게 나의 애월이었다. 나의 애월은 옛 포구를 걷는 동안 ‘옛’이라는 단어와 어우러져 지나간 사랑이 되었고, 애월에 펴졌던, 황진이 시인 듯한 우효의 ‘민들레’를 다시 부르며 걸었다. 노래가 애월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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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옛포구 풍경과 해신당>

애월 옛 포구를 지난 길은 해안 도로와 만났다. 해안가에 현무암을 쌓은 정방형의 돌담이 있다. 해변이나 도서의 어촌에서 어업과 그 종사자를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예전에는 ‘남당’이라 불렀던 ‘해신당’이었다. ‘해신당’에서 도로를 조금 따라가면 쿠바를 만날 수 있다.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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