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코스 B (한림항←고내포구, 13km ) 3
사람들은 밭담과 카페 출입문 사이에 있는 골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카페 뒤, 바다와 면한 길에서 올라왔다. 올라오는 이들을 거스르며 내려갔다. 길은 검은 현무암 해변과 카페 사이를 구분하는 띠처럼 놓여있었다. 검은 현무암 해변은 폭이 좁았고, 파도가 길로 넘어오지 못하게 온몸으로 막아냈다. 넓게 펴진 하얀 구름이 하늘에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구름에 하늘의 푸르름은 묻혔다. 색을 잃어가는 하늘을 닮아가듯 바다도 파랑을 잃어갔다. 멀리 풍력발전기들이 얇은 바늘처럼 뾰족하게 솟아 낮게 드리운 구름을 위협했다. 더 멀리 작은 오름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지날 길엔 오름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한림항에 있는 비양도 같았다. 저기까지 가야 이번 올레가 끝나는구나. 13시 10분인데, 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걸음을 빨리했다.
애월카페거리였다. 잘 닦인 현무암 바닥이 한담해안산책로를 지나 곽지해수욕장까지 이어졌다. 카페마다 외부 정원에 파라솔들이 즐비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햇빛도 피할 겸 바다의 풍광을 보기 위해 파라솔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지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파도가 잔잔히 부서지는 현무암 바위 곳곳에서 어떤 이들은 사진을 찍거나 그냥 바다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마치 이곳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즐거운 듯. 그들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다가도 마음 한편에 둥글게 뭉쳐지는 작은 고독감을 느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많이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애월중학교에서 들었던 노래와 달리 집중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카페를 위한 무형의 인테리어일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지 못하고 귀로 흘러들다 나왔다. 노래는 이곳에서 본질을 잃었다.
올레길과 함께한 애월카페거리는 장한철 생가에서 멈췄다. 안내석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백미로 알려진 ‘표해록’을 저술한 ‘장한철’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2020년에 제주시에서 초가를 신축했다. 장한철은 조선후기 영조 때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나 대정헌 현감을 역임한 문인으로 대과를 보기 위해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다 풍량으로 류큐제도(오키나와)에 표착하였으며, 후에 그 경험을 담은 ‘표해록’을 저술하였다. ‘표해록’은 당시의 해로, 해류, 계절풍 등이 실려있어 해양지리서로서 문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곳에서 장한철과 ‘표해록’에 대해 처음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표류에 관한 이는 조선 후기 순조 때 신안군 우이도 어부 문순득이다. 그는 흑산도 홍어를 사고 돌아오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오키나와에 갔고, 오키나와에서 귀국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도중 또 풍랑을 만나 당시 스페인령인 필리핀까지 갔다. 필리핀에서 중국과 의주를 거쳐 귀국하게 된다. 3년 2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흑산도에 귀향 와있던 정약전을 만나 자신의 표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정약전은 이를 날짜별로 기록하여 ‘표류시말’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아마 문순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까지 표류한 이가 아닐까 싶다. 그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고, 그가 필리핀에서 경험한 화폐의 유용함을 듣고 정약용은 경세유표에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했다고 한다. 다들 표류를 하게 되면 일본 본토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닿는 것도 신기했다. 해류 때문일 것이다.
초가로 된 장한철의 생가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출입을 막기 위해 줄이 처져있어 올라갈 수 없었다. 발길을 돌려 작은 한담 해변을 지나 장한철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 지어진 장한철산책로를 걸었다. 장한철산책로를 알리는, 펼쳐진 책 모양(표해록 같았다)의 안내석을 보면서 장한철 생가는 애월카페거리와 한담해변산책로를 잇는, 앞표지와 뒤표지를 연결하는 책등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로는 해안절벽 밑을 따랐다. 바다를 보았다. 에메랄드빛이 곳곳에 풀어져 있었다. 햇빛을 받아 윤슬이 반짝였고 젊은 연인들이 카약인 듯, 바닥에 바다를 볼 수 있는 투명한 작은 배를 타고 에메랄드빛 바다에 부표처럼 떠 있었다. 곽지라고 하얀 글자들이 세워져 있다. 곽지 해변으로 이어지나 보다. 글자 뒤에 남색, 감청, 파랑, 바다색의 그러데이션 된 파도 형상의 조형물이 있다. 파도의 끝에 하늘로 도약하려는 작은 돌고래가 파도를 끌고 있다. 파도 조형물에 ‘곽지 잠(아래아)녀의 길’이라고 적혀 있다. 잠(아래아)녀는 해녀의 제주어이다. 해안산책로는 정한철산책로와 곽지 잠(아래아)녀의 길로 이루어진 듯했다.
곽지 이정표를 지나 ‘곽금 3경 치소기암’을 알리는 낡은 안내판을 만났다. 바위 모양이 한 마리 솔개가 하늘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하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치소기암이라고 하는데, 어느 바위를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검색해 보니 ‘치소기암’의 암석이 산책로로 떨어지는 사고가 몇 건 있어서, 사고가 있던 곳에 그물을 쳐놓았다고 한다. 그물이 있는 근처일 것이다.
곽지해수욕장으로 갈수록 바다의 에메랄드빛이 점점 짙어지고 넓어졌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떠 있는 구름에서 불안감이 밀려왔다. 구름이 점점 무거워 보였다. 애월카페거리에서 본 구름은 하얀 가벼운 구름이었다. 곽지해수욕장에 오니 수평선 부근에서 회색의 무거운 구름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설마 비는 오지 않겠지? 해변 중간쯤에 곽금 8경을 알리는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데, 너무 낡아 곽금 8경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낡아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비가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과물 노천탕’은 구경도 못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곽지? 이름이 특이했다. 곽지는 한자어였다. 곽지, 성곽 곽郭에, 지탱할 지支로 성에 지탱한다는 의미였다. 성은 곽금성을 말하나 기록에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곽지리 옆에 금성리가 있다. 금성리도 곽금성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러니 곽금성이 존재했다면 꽤 큰 성이었을 것 같다. 또한 해수욕장에는 옛날에 마을이 모래에 파묻혔다는, 제주판 폼페이 같은 전설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묻힌 마을 대신 선사시대 패총이 발견되고 있다. 어쨌든 이곳은 그만큼 유서가 깊은 지역이다. 해수욕장 안에는 여유가 없어 지나친 ‘과물 노천탕’이 있다. 과물은 한라산에서 발원한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흐르다 곽오름을 배경으로 바다에서 솟는 달콤한 물이라는 뜻으로, 제주에서는 ‘돈물’이라고도 한다.
곽지해수욕장을 벗어난 길은 한산한 금성리 마을 길을 지나 중간스탬프가 있는 해안가에 다시 닿았다. 금성포구였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찼고 수평선 부근의 구름은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으로 변해있었다. 중간스탬프를 찍은 기쁨도 못 느끼고 바로 떠났다. 바로 옆에 곽금 6경(곽지해수욕장에 있던 곽금 8경은 무엇이지?) 중 하나라는 정자정천(금성천)이 금성포구로 흘렸다. 한라산에서 발원하는 두 개의 큰 물줄기가 금성리에 합쳐서 금성포구의 바다로 흐른다고 한다. 상류의 내가 정자모양의 물줄기라서 정자정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자정천은 평소에는 건천이었으나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인지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정자정천을 건너 오른쪽으로 꺾으면 길은 해안으로 곧장 달려간다. 왼편의 갈대들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불안한 징조였다. 길의 끝에 두 남녀가 걱정스러운 듯 바다를 보고 있고, 한 남자는 갈대 쪽에 앉아 멜랑콜리 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안내판에 묶여있는 올레 리본이 강하게 흔들렸다. 어두워 오는 바다와 하늘이 압도하고 있는 풍경이었다. 바람과 함께 불안의 정도가 더 짙어갔다.
왼쪽으로 돈 길에는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공덕비 같기도 했다. 왼쪽 바위에 있는 사람의 흉상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보다 바위들 넘어 바다에 떠 있던 등표가 눈에 들어왔다. 위아래가 검은색이고, 중간이 빨간 등표인데, 주위에 고정 장애물이 있으니 피해 가라는 의미였다. 등표의 현시와 다르게 나는 이 길을 피할 수 없었다. 지쳤어도 걸어야 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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