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25 영등할망신화

15코스 B (한림항←고내포구, 13km ) 4

by 커피소년

파랑이 사라진 회색 하늘을 이고 집들 사이로 난 짧은 길을 걸었다. 길은 다시 바닷가에 닿았고 회색 하늘은 더 짙어졌다. 에메랄드빛의 바다는 녹청색으로 무거워 보였다. 귀덕1리항이었다. 올레길은 도로를 쫓지 않았다. 해안도로와 바다 사이로, 바다에 면한, 검은 현무암들이 울퉁불퉁 깔린 길을 따랐다. 해안도로와 다시 만나기까지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이 길에는 제주 신화가 녹아있고 석상으로 신화를 내보였다. 영등할망신화였다.

20241022_140340.jpg
20241022_140613.jpg


음력 2월, 제주 전역에서 영등할망에 대한 영등굿이 행해지고, 18코스에 있는 사라봉의 칠머리당영등굿이 영등굿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영등할망은 제주에서 중요한 신이다.


영등할망은 육지의 해안 지방에서는 풍신(바람신)으로서의 개념이 강하지만 제주 지역에서는 해산물이나 농작물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풍농신으로 더 알려진 신이다. 구전에 의하면, 영등할망은 음력 2월 초하룻날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복덕개'라는 포구로 들어온 다음 먼저 한라산에 올라가 오백장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어승생 단골머리부터 시작하여 제주 곳곳을 돌며 봉숭화꽃·동백꽃 구경을 한다. 그러고는 세경 너른 땅에는 열두 시만국 씨를 뿌려 주고, 갯가 연변에는 우뭇가사리·전각·편포·소라·전복·미역 등을 많이 자라게 씨를 뿌리고는, 2월 15일경 우도를 거쳐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내방신(來訪神)이다. 이 때문에 제주 지역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고 부르며 영등굿을 벌여 영등할망을 대접하는데, 초하룻날은 영등할망을 맞는 영등 환영제를 하며 12일에서 15일 사이에는 영등할망을 보내는 영등 송별제를 연다. 굿은 주로 마을 단위로 행해지며, 어업이나 농업에서의 풍요를 기원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등할망에 대한 신화다. 읽다 보면 ‘영등할망은 음력 2월 초하룻날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복덕개'라는 포구’를 통해 제주로 들어온다고 한다. ‘복덕개’가 바로 귀덕1리항이었다. 이런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인지 이곳에 영등할망 신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신화에 나오는 신은 영등할망 뿐이지만 길을 걷다 보면 영등할망을 보좌하는 여러 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241022_141437.jpg <영등할망 신화공원에서 본 바다>


길 입구에 석상 하나가 벌써 나를 맞이했다. 영등별감이다. 영등별감은 바다에 물고기 씨를 뿌려주는 어부들의 영등이고, 무장으로 창과 방패를 가지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태풍을 창으로 찌르고 방패로 막으며 배를 보호하는 신이지만, 때론 화가 나면 폭풍을 몰고 와 배를 부수는 풍랑의 신이기도 하다. 또한 음력 2월 15일에 제주를 떠날 때는 영등달의 금승을 풀어주는 배방선(제주 칠머리당굿의 한 절차인, 굿이 끝난 후 영등신을 배에 태워 본국으로 떠나보내는 과정으로, 짚으로 만든 배에 제물(祭物)을 조금씩 싣고, 이것을 어선(漁船)에 실어 멀리 나아가 우도(牛島) 쪽으로 띄워 보낸다)의 신이기도 하다.

20241022_140638.jpg <영등별감>


영등별감을 지나면 ‘복덕개 포구’라고 새겨진 표지석을 만난다. 포구가 복어 형태를 닮았다 하여 예로부터 복덕개라 불렸으며 귀덕리의 첫 포구여서 큰개라고도 했다. 또한 영등할망이 음력 2월 초하루 새벽에 이곳을 통해 제주로 들어오기 때문에 복과 덕이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복덕개라고도 불렀다. 영등할망은 이곳으로 들어와 남풍(마파람)이 불면 우도로 가서 나간다.

20241022_140823.jpg



몇 걸음 옮기면 바다로 나간 암석 위에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제주의 옛 등대인 도대불이 있고, 그 너머로 거북이 등에 세워진 하얀 등대가 보였다. 거북 등대였다. 거북 등대가 세워져 있는 지형이 거북이 형상이어서 거북이 섬이라 불렸고, 이 때문에 거북 형상물을 만들고 그 위에 등대를 세운 것 같았다. 도대불 옆에는 날개를 활짝 편 새 모양의, 배에 해일(日)이 새겨진 석상이 있다. 영등호장이다. 좋을 호(好)를 쓰고 있는 만큼 성깔 없고 무게 없는, 영등바람 같지 않은 바람이다. 영등할망이 맵고 아린 바람과 마지막 꽃샘추위를 몰고 오기 전에 호장은 이르게 햇빛을 내고 사람보다 먼저 날이 덥다고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온다고 한다. 그래서 ‘헛영등’, ‘옷 벗은 영등’, ‘심심한 영등’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영등호장이 온 해는 여름이 빨리 온다. 이것으로 호장의 배에 해일(日)이 새겨져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0241022_140915.jpg
20241022_140940.jpg
<좌: 도대불과 거북등대 / 우: 영등호장>


계속 걸으면 정자가 나오고, 용천수인 큰이물이 보인다. 옆에 이곳이 ‘해모살 해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안내판 너머로 한 여성의 석상이 가까운 바다에 서 있다. 영등할망의 착한 며느리다. 영등며느리는 세지만 곧은 하늬바람(거친 파도와 모진 바람의 사나운 날씨) 같은 신으로 자신을 질투하고 싫어하는 영등할망의 기분도 잘 맞춰준다고 한다. 착하고 부지런하고 어질고 반듯한 영등며느리가 바다에 들면 바당밭에 전복, 소라, 미역, 전초 등 해초의 씨를 뿌려줘서 해녀의 수호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해녀들의 수호신이라서 석상이 바다에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20241022_141105.jpg
20241022_141115.jpg
<좌: 해모살 해변 안내판과 영등할망 착한 며느리 / 우: 큰이물>


영등할망의 착한 며느리 석상을 지나면 작은 광장이 나오고 바다 쪽으로 세 개의 큰 석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부터 영등대왕, 영등할망, 영등하르방이다. 면류관을 쓴 영등대왕은 세상의 북쪽 끝 영등나라의 얼음산과 서북풍을 지키는 신으로, 어둠 속에 홀로 반짝이는 외로운 별이라 ‘외눈박이 나라의 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등할망이 제주에 와서 영등바람을 뿌리며 새봄을 준비하는 동안, 영등대왕은 영등나라의 긴 겨울 지킨다. 외로운 대왕이다. 가운데에는 신화의 주인공인 영등할망이 있다. 영등할망은 음력 2월 1일 제주에 왔다가 영등바람을 뿌리고 15일에 제주를 떠나는 바람의 신이다. 영등할망이 가져온 바람은 겨울과 봄 사이에 제주에 불어오는 서북 계절풍이다. 매서운 칼바람이지만 영등할망은 다시 다 거둬 간다. 영등할망이 봄을 만들기 위해 뿌린 바람을 1만 8천 종의 할망 벽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왼쪽엔 영등하르방이 갓을 쓰고 있다. 영등나라는 지구의 북쪽 끝 시베리아에 있는데 여기서 영등하르방은 추위와 함께 온갖 바람의 씨를 만들어 영등할망에게 내어줘 제주에 영등이 들게 한다. 또한 그는 영등 2월 초하루 남방국 제주를 찾아가는 영등할망의 바람 주머니에 오곡의 씨앗과 봄 꽃씨를 담아주기도 한다.

20241022_141346.jpg


주인공 석상들이 있는 곳을 지난 길은 오른쪽으로 꺾이는데, 이곳에 또 한 여성의 석상이 있다. 영등할망의 딸이다. 영등할망이 딸을 데리고 제주에 올 때가 있다. 딸은 언강(아양)이 너무 좋아서 할망은 바람도 빨리 거두고 가는데, 그해는 봄이 일찍 든다고 한다. 영등할망 딸 석상을 지나면 불턱과 정자가 있고, 정자 뒤에 형체를 알 수 없는, 비우(雨) 자가 새겨진 영등우장이 서 있다, 영등우장은 비를 예보하는 신이다. 영등달에 비가 오면 ‘올해는 비옷 입은 영등이 왔다’라고 한다. 그는 영등할망이 일으키는 매운 칼바람에 비우(雨) 자 색깔을 입히고, 궂은비를 대비해 비옷을 입고 온다.

다운로드파일_20250527_215557.jpg
다운로드파일_20250527_215546.jpg
<좌: 영등할망 딸 / 우: 영등우장 / 사진 : 티스토리, 길에서 만난 들꽃이야기, 제주 영등할망 신화공원에서 참조>


영등우장 옆에는 제주 포구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모살개(귀덕포구)가 있다. 모살개는 안캐, 중캐, 밖캐의 3판 구조로 가장 안쪽인 안캐는 태풍 때 배가 피할 수 있는 곳이면서 배를 수리하던 곳이다. 중캐는 밀물이 되면 나갈 배가 정박하였고, 밖캐는 수시로 드나드는 배가 정박하였다. 돌방파제를 겹겹이 쌓아 태풍을 막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수중 암초인 여(물속의 큰 바위)는 파도를 막아주었다.

다운로드파일_20250527_215541.jpg <모살개/사진: 티스토리, 길에서 만난 들꽃이야기, 제주 영등할망 신화공원에서 참조>


모살개를 지나면 길은 해안도로와 만난다. 그곳에 궤물동산과 영등좌수를 볼 수 있다. 궤는 동굴이라는 의미이니 궤물은 동굴에서 나오는 용천수로 창고 샘(창고새미)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궤물동산의 궤물이 이런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궤물동산 앞에 영등좌수가 서 있다. 영등할망을 보좌하는 영등좌수는 풍류를 좋아하는 문신으로 한라산에 꽃을 피우는 꽃 성인이면서 세경(경작지) 너른 땅에 곡식을 파종하는 곡물 신이다. 또한 풍수질에 능통한 한라산 신인 보름(바람)웃도(설대문할망의 오백장군 아들 중 한라산 신이 된 아홉 형제 중 둘째)를 만나 함께 이곳에 부는 하늬바람 길을 따라 한라산과 세경 너른 땅에 식물도감을 찾고 확인하는 꽃씨의 감상관이기도 하다.

다운로드파일_20250527_215534.jpg <궤물동산과 영등좌수 /사진: 티스토리, 길에서 만난 들꽃이야기, 제주 영등할망 신화공원에서 참조>


여기에 등장하는 영등할망을 비롯한 영등하르방, 영등대왕, 영등호장, 영등우장, 영등별감, 영등좌수 등의 일곱 신을 영등신으로 부른다. 생각해보면 사라봉의 칠머리당영등굿에서는 영등할망과 영등굿에 대해 간략하게 알 수 있었다. 영등할망 신화공원에서는 영등할망과 관련된 신화의 본모습을 개괄적으로 볼 수 있었다. 영등할망이 중심에 있고 영등할망만으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영등할망을 보좌하는 신으로 형상화하여 자연현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고대 제주민의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등할망에게 며느리가 있다면 아들도 있었을 텐데 아들은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또한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는 속담이 있다. 따사로운 봄볕은 뜨겁지 않아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까맣게 그을게 된다. 그래서 며느리보다 딸을 더 아끼는 시어머니는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놓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놓는다고 한다. 이런 여성들의 관계를 영등할망 신화(영등할망이 딸은 이뻐하고 며느리는 시기하고 질투한다)에서도 고스란히 불 수 있어, 신의 권능을 지워버리면 신화는 인간 사회의 인간관계나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의 서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KakaoMap_20250528_230916.png <영등할망 공원에 있는 석상들의 위치>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간 올레길을 걸으며 17코스 내도동에 세워져 있던 설문대할망의 석상을 떠올렸다. 설문대할망과 그녀의 아들 오백 장군은 제주 신화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영등할망이 제주에 들어와 나가는 신이라면 설문대할망은 제주에 뿌리내린 신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해줄 것 같았다. 그 이야기가 궁금했다. 올레길에서 만나길 기대해 본다.


(4월 19~22에 올레를 다녀오느라 글이 늦었습니다. 그리고 영등할망딸, 영등우장, 모살개, 궤물동산, 영등좌수의 사진이 엉망이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진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 티스토리, 길에서 만난 들꽃이야기, 제주 영등할망 신화공원에서 참조)

(2024. 10. 22)


#제주올레길 #올레15코스 #영등할망신화 #영등하르방 #영등대왕 #영등호장 #영등우장 #영등별감 #영등좌수 #영등할망딸 #영등할망착한며느리 #해모살 #궤물동산 #모살개 #거북등대 #복덕개포구 #영등할망신화공원

keyword
이전 24화2-24 표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