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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면, 사색해야 한다

[샤인이 찾은 요즘 세상]

물질은 풍요로운데 정신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품어야 할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를 향해 달려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문득 되묻는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사색하고 있는가?


최근 한 교양서의 목차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차례가 아니었다. 인류가 처음 문명을 일구던 시기부터 신을 만나고, 철학을 세우고, 혁명을 일으키고, 전쟁을 겪으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자 했던 여정 그 자체였다. 어쩌면 그 목차는 인류가 품어온 모든 ‘왜’의 흔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문명의 시작은 단지 벽돌과 강의 이름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려 애썼고, 공동체의 법을 고민했고, 신 앞에서 떨었으며, 철학자들은 인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자신을 알라.” 그 짧은 문장이 시대를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가?


신의 이름으로 이뤄진 전쟁, 종교적 열망과 두려움, 성직자의 권위와 신의 침묵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붙잡아야 했을까. 중세를 지나며 인간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성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혁명의 이름으로 인간은 신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호출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단호한 외침은 한 사람의 철학을 넘어, 인류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인간의 사유가 곧 인간성을 보장하진 않았다. 전쟁, 식민지, 노예제,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간이 만든 참극은 다시 인간에게 묻는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철학자와 문학가는 이 질문 앞에서 피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만들어간다고 했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극단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고뇌했다.


결국, 교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외운 지식이 아니라, 되묻는 태도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감수성,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사유하려는 자세, 빠른 답을 찾기보단 깊은 질문을 품는 마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양인은 ‘전문가’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사색하는 이들이다.


AI가 글을 쓰고, 알고리즘이 길을 제시하는 시대.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성인이다.


인간이라면, 사색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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