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청년의 하루는 아침 알람으로 시작된다. 눈을 뜨자마자 켜는 것은 SNS 피드, 유튜브, 뉴스 속보다. 몇 분 만에 수십 개의 글과 영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어제는 뜨거웠던 주제가 오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정보는 무한히 쏟아지는데, 정작 마음에 남는 것은 희미하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왜곡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세대는 ‘정보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갈증을 느낀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갈증이다.
하지만 청년들의 일상은 이 갈증을 진지하게 묻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대학 강의실에서, 취업 준비의 스터디룸에서, 혹은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청년들이 부딪히는 현실은 “빠른 정답”을 요구한다. 스펙을 쌓고, 시험 문제를 풀고, 효율을 높이는 데에만 몰두하는 동안, 정작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뒷전으로 밀린다. 진리를 묻는 대신, 즉각적인 성과와 가시적인 결과만을 추구하게 된다. 사유의 여유를 잃어버린 청년의 일상,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의 민낯이다.
청년 세대가 체감하는 가장 큰 현실은 불안정이다.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 치솟는 전·월세, 경쟁적인 취업 시장 속에서 청년은 늘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불안 속에 놓인다. 오늘의 일자리가 내일도 유지될지, 내 학위가 실제로 사회에서 의미를 가질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청년들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지만, 그 선택은 자기 확신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적응’의 결과일 때가 많다. 이런 불안정은 곧 정체성의 위기로 이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희미해질수록, 청년은 삶의 방향을 잃는다.
정치와 사회는 이런 청년들의 현실을 단편적인 공약으로만 다룬다. 선거철이면 ‘청년 일자리 100만 개’, ‘반값 등록금’, ‘주거 지원 확대’ 같은 말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대부분의 약속은 미뤄지고 축소되며, 단기적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일부 정책만 남는다. 임기 안에 치적을 남기려는 정치의 속성 속에서 청년의 미래는 장기적인 설계가 아니라 소모적인 공약의 도구로 전락한다. 청년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권력은 언제든지 청년을 ‘표 계산의 변수’로만 다룰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청년 스스로도 이 구조에 길들여진다는 점이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 아니냐”,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라는 체념은 청년들의 입에서도 자주 들린다. 그 결과,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을 견디는 법’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역사는 증명한다. 깨어 있는 청년 세대가 없었던 사회는 결코 건강한 미래를 만들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의 순간에도, 시민사회의 성장에도, 늘 시대를 깨운 것은 질문하는 청년이었다.
오늘의 청년은 또다시 기로에 서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리를 묻는 수고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불편하더라도 사유와 대화를 통해 진리를 분별하려 애쓸 것인가. 청년이 사유를 멈출 때, 권력과 시장은 그 공백을 채우며 청년의 미래를 재단한다. 반대로 청년이 질문을 회복할 때, 사회는 비로소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
철학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철학은 청년이 “왜?”라고 묻는 순간 시작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떤 삶이 진정 좋은 삶인가?”라는 물음을 품는 순간, 청년은 단순한 정보 소비자가 아니라 미래의 설계자로 거듭난다.
이 책은 바로 그 여정을 함께하려 한다. 고대 철학자들의 사유와 오늘의 청년 현실을 연결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진리를 묻는 힘’을 다시 불러내고자 한다. 청년의 삶에서 시작된 질문이 사회 전체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이 책의 첫걸음이다.
오늘날 청년 세대의 일상은 정보의 파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 화면이 하루를 여는 창이 되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디스코드 같은 플랫폼이 끊임없이 새로운 알림과 영상을 쏟아낸다. 30초, 1분, 3분 단위로 소비되는 숏폼 콘텐츠는 빠르고 강렬한 자극으로 청년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만큼 깊이 있는 사유의 공간은 줄어든다. ‘짧고 자극적인 정보’는 청년을 현명하게 만들기보다는 순간의 감정과 흥미에 휘둘리게 한다.
과거라면 평생 동안 접하기 힘든 지식과 데이터가 이제는 손끝에서 몇 초 만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른바 ‘정보의 민주화’ 시대에 청년들은 과거 어떤 세대보다 더 많은 자료와 의견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보의 양이 늘어난 만큼 사고의 깊이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진위를 구별하는 힘이 약해지고, 판단은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교육 현장에서도 드러난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도하면, 많은 경우 “유튜브에서 봤다”, “SNS에 그런 글이 돌았다”라는 말이 근거로 제시된다. 출처 검증과 맥락 이해 없이, 단편적인 정보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는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자라난 정보 환경 자체가 사고를 얕게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과 관심사에 맞는 정보만 제공하며, 점점 더 편향된 세계로 청년들을 몰아넣는다. 이른바 ‘필터 버블(filter bubble)’ 속에서 청년들은 다양한 관점을 마주할 기회를 잃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정보 과잉이 청년 세대의 정체성 탐구 과정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청년들은 다른 사람의 ‘하이라이트 영상’에 자신을 비교한다. 인스타그램 속 화려한 여행 사진, 유튜브 속 성공 스토리, 틱톡에서 반복되는 자기계발 영상은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너는 아직 부족하다. 더 노력해야 한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철학적 사유를 자극하기보다, 불안과 조급함을 키운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자기 성찰의 여유는 줄어드는 역설이 일어난다.
정보 과잉은 또한 ‘지식인’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과거에는 학자나 전문가가 진리 탐구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나 블로그, SNS, 유튜브 채널을 열어 자신의 의견을 발신할 수 있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동시에 책임 없는 발언이 진리인 양 퍼져나가고, 청년들은 전문가의 목소리와 비전문가의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한 채 같은 무게로 소비한다. ‘모두가 전문가인 사회’는 사실상 ‘전문성이 사라진 사회’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청년 세대가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정보가 많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가 사고의 깊이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숏폼 영상으로 뉴스를 요약해 듣고, 자극적인 해석만으로 사회 현상을 이해하려는 습관은, 청년들이 근본적인 질문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것이 진실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어떤 맥락에서 봐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기보다, ‘좋아요’ 수와 조회 수가 많은 쪽을 사실처럼 믿게 된다.
결국 청년 세대가 마주한 가장 큰 위기는 ‘사유의 위기’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그 지식을 묶어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이 부족하다. 이 위기는 곧 청년들의 정체성 위기로 이어진다. 내가 스스로 사유하지 못할 때,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서사와 비교 속에서 흔들리고, 나의 미래는 다른 누군가의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청년 세대에게 철학은 교양의 장식품이 아니다. 철학은 정보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나침반을 쥐여 주는 도구다. 철학은 질문을 잊지 않게 하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며, 빠른 결론에 안주하지 않고 깊은 성찰로 나아가게 만든다.
오늘날 청년들이 다시 철학을 불러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청년은 단순한 ‘정보 소비자’가 아니라 ‘의미 창조자’로 거듭나야 한다. 지식은 많지만 사유가 얕아지는 시대, 철학만이 다시 청년 세대를 깊이 있는 사유의 주체로 세울 수 있다.
청년 세대의 사유 위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과거 철학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의 질문은 언제나 젊은 세대에게 가장 먼저 던져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늘 시대의 청년들에게 “너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일종의 삶의 초대장이었다.
고대 아테네의 소크라테스는 청년들과 가장 많이 대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고라의 광장에서 젊은이들을 붙잡고 묻곤 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청년들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그의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아테네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참여와 성공적인 사회적 입지였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너 자신을 먼저 알라”라는 근본적 도전을 던졌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년들이 자신이 믿는 신념과 관습을 다시 성찰하도록 이끄는 도전이었다. 청년들이 “정의란 힘 있는 자의 이익”이라고 답하면,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힘 있는 자가 실수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도 그들의 이익이 정의가 될 수 있는가?” 이런 문답은 청년들로 하여금 편안한 확신을 버리고, 스스로 사유하는 길로 나아가게 했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대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하지 않은 채, 단순히 주어진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동양에서 공자 역시 청년 세대와 함께 걸으며 질문을 던진 철학자였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전국을 떠돌며 강의하고 토론했다. 『논어』 속 공자는 늘 짧은 대화를 통해 제자들의 사고를 자극했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말은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공자가 청년들에게 강조한 것은 도덕적 자기 수양이었다. 그는 청년들이 단순히 기술과 지식만 익히는 데 머물지 말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지금 우리의 청년들이 직면한 현실 역시 다르지 않다. 성적, 스펙,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은 넘쳐나지만,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사라져가고 있다. 공자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대가 배우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바른 삶을 이루기 위한 길인가?”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본 뒤, 철학을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대안으로 삼았다. 그는 『국가』에서 철학자가 통치하지 않으면 정의로운 국가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이 청년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상 없는 현실은 타락한다.”
오늘날 많은 청년이 현실적 생존 앞에서 이상을 포기한다. 취업 준비, 불안정 노동,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상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은 말한다. “그대가 별을 보지 않는다면, 그대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상을 완전히 버린 현실은 방향을 잃는다. 청년에게 플라톤의 질문은 다시금 울린다. “그대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는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하다. 그의 메시지는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청년들에게 새로운 확신을 주었다. 진리의 근거를 외부의 권위나 전통에서 찾지 말고, 스스로의 이성적 사유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오늘날 청년 세대 역시 수많은 정보와 권위적 목소리 앞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묻는다. “그대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말과 알고리즘이 대신 생각해주고 있는가?”
이처럼 소크라테스, 공자, 플라톤, 데카르트는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 살았지만, 모두 청년 세대에게 공통의 메시지를 남겼다.
- 질문하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청년은 권력과 사회의 흐름에 휩쓸린다.
- 도덕을 잃지 말라. 지식만 있고 바른 삶을 고민하지 않는 청년은 결국 공동체를 위태롭게 한다.
- 이상을 품어라. 현실만 좇는 삶은 방향을 잃는다.
- 스스로 사고하라. 권위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기 사고를 지키는 힘이 필요하다.
이 네 가지 질문은 오늘의 청년 세대에게도 똑같이 유효하다. 취업 준비에 지쳐도, 경쟁에서 흔들려도, 정보의 홍수에 빠져도, 철학자들은 여전히 속삭인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질문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날 청년 세대가 직면한 문제를 단순히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정치와 권력은 본질적으로 단기성과에 묶일 수밖에 없고, 청년 세대가 살아가야 할 미래는 그 단기성과의 틀을 훨씬 넘어서는 긴 호흡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언어 속에는 언제나 “임기 내 성과”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4년 혹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띄는 결과를 보여주어야만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기후 위기, 학제 개편, 노동 시장 개혁과 같은 장기적 사안보다는, 당장 체감할 수 있는 단기적 정책에 집중한다.
청년 세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선거철이 되면 청년 일자리, 주거 지원, 학자금 대출 탕감 같은 공약이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대부분은 재정 부족이나 정치적 합의 실패라는 이유로 축소되거나 흐지부지된다. 결국 청년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구조적 개혁은 미뤄지고, 단기적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정책”만 남는다.
청년이 정치에 미래를 맡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년의 시간은 수십 년 앞을 향해 흐르지만, 정치인의 시간은 임기의 끝에 막혀 있다.
정치인은 공익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익의 포로가 되기 쉽다. 그들의 결정은 개인의 정치 생명, 당의 이해관계, 지지 기반의 요구에 따라 좌우된다. 청년 세대의 목소리는 선거철에는 귀하게 들리지만, 선거가 끝나면 언제든 다른 이해 집단의 요구에 밀린다.
예를 들어, 청년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감한 부동산 정책은 강력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 앞에서 후퇴하고, 노동 시장 개혁은 기업과 노조의 이해관계 속에서 늘 타협된다. 청년 세대의 미래는 늘 “표 계산”이라는 저울 위에 올려진다. 이런 구조 속에서 정치인은 청년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 유지에 더 유리한 선택을 할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청년 스스로의 체념이다. 많은 청년이 정치에 실망하며 “정치는 원래 바뀌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투표율이 낮아지고,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 발언보다 개인의 생존과 취업 준비에 몰두한다. 정치에 무관심해질수록, 권력자들은 더욱 마음 놓고 자신들의 이해에 맞게 움직인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듯, 정치와 권력에만 미래를 맡긴 사회는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청년들이 외면한 사이, 환경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불평등은 더 고착되며, 기술 발전은 윤리적 논의 없이 흘러가 버린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미래 세대가 떠안게 된다.
철학 없는 권력은 언제든 위험하다. 권력은 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단기적 이익을 합리화하고,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지운다. 청년 세대가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권력은 쉽게 진리를 왜곡하고 청년들의 미래를 거래할 수 있다.
오늘날 가짜뉴스의 확산, 포퓰리즘 정치의 부상, 환경 문제의 방치가 바로 그 증거다. 정치가 진리의 수호자가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될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장기적 미래, 곧 청년 세대의 삶이다.
결국 미래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청년 세대 자신에게 있다. 청년은 단순히 정치의 수혜자가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여야 한다.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권력을 감시하며, 비판적 사고로 현실을 검토하는 청년 시민이 많을수록, 정치의 단기성과 권력의 사익은 견제된다.
청년이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정치에 모든 것을 맡긴다면, 결국 자신들의 미래를 잃게 된다. 반대로 청년이 철학적 시민으로서 질문하고 토론한다면, 정치와 권력은 더 이상 단기성과만을 좇을 수 없게 된다.
정치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인은 임기의 끝을 바라보지만, 청년은 평생을 내다봐야 한다. 정치인은 사익과 이해관계에 묶여 있지만, 청년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므로 청년은 단순히 정치의 객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청년 세대가 깨어 있는 철학적 시민으로 서지 않는다면, 미래는 권력자의 손에서 거래될 뿐이다.
오늘날 청년 세대가 처한 위기는 단순히 일자리 부족이나 불안정한 삶의 문제에만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깨어 있는 철학적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정치와 권력, 그리고 알고리즘이 설계한 현실에 무기력하게 끌려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있다.
철학적 시민이란 거창한 지식을 줄줄 외우는 사람이 아니다. 철학적 시민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이 정책은 정말 청년을 위한 것인가?”
“이 뉴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철학적 시민은 주어진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면을 파헤치고, 논리의 허점을 드러내며,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고민한다. 말하자면 철학적 시민은 사유하는 시민, 질문하는 시민, 성찰하는 시민이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청년들을 “정보 소비자”로 길들이고 있다. SNS, 유튜브, 포털 뉴스는 끊임없이 자극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청년들은 그 흐름 속에서 ‘좋아요’와 ‘조회수’로 반응하는 데 익숙해진다. 하지만 그 순간, 청년은 더 이상 사회의 설계자가 아니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좁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피동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적 시민으로 깨어난 청년은 다르다. 그는 정보를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하고 검증한다. “이것은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든 이야기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며 토론의 장에 참여한다. 이렇게 될 때 청년은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설계자로 자리매김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사회가 진보하거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순간에는 언제나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있었다.
-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법이나 제도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고라에서 끊임없이 토론하고 질문하던 시민들의 힘 덕분이었다.
-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백성들: 부패한 정치 구조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대안을 고민하던 이들이 있었기에,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 논의가 가능했다.
- 20세기 민주화 운동: 권력자 몇 명이 아니라, 깨어 있는 다수의 시민이 거리에서 질문하고 외쳤기 때문에 체제가 바뀌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모든 순간을 가능케 한 것은 거대한 권력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의 철학적 성찰이었다.
청년 세대에게 철학적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왜냐하면 청년의 미래는 지금 정치와 사회가 내리는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시민으로서 청년은 세 가지 태도를 가져야 한다.
1. 끊임없는 질문 – “이것이 옳은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질문 없는 사회는 권력자의 말에 휘둘리며, 결국 미래를 잃는다.
2. 깊은 성찰 – 단기적 이익과 편리함만 보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한다. 지금 당장 편한 선택이 미래를 위협한다면, 그것을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3. 용기 있는 실천 – 진리를 알았다면 행동해야 한다. 불편한 진실이라도 말하고, 때로는 다수의 흐름에 거슬러 서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면서도 침묵하지 않았던 것처럼, 청년 철학적 시민도 불의 앞에서 침묵할 수 없다.
깨어 있는 시민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투표는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하고, 정치는 언제든 대중의 분노와 욕망을 자극하는 선동에 휘둘린다. 반대로 깨어 있는 시민이 많을수록, 사회는 권력의 독점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기후 위기, 불평등, 불안정 노동, 기술 발전의 윤리 문제 등 복잡한 문제 앞에 서 있다. 이 문제들은 정치인 몇 명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직 깨어 있는 청년 시민들이 질문하고, 토론하고, 성찰하며, 그 힘을 모을 때만 가능하다.
깨어 있는 국민은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다.
권력자에게 미래를 맡기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는 순간,
그는 이미 철학적 시민이다.
청년이 철학적 시민으로 서는 순간, 정치는 더 이상 단기성과에만 머물 수 없게 된다. 권력은 감시받고, 사회는 장기적 비전을 향해 나아간다.
청년이 깨어 있어야 미래가 깨어난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다.
오늘날 청년 세대가 가장 두드러지게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깊은 대화의 문화다. 우리는 메시지 몇 줄, 댓글 몇 개, 짧은 영상으로 소통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흩어진 독백일 뿐이다.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서로의 입장을 곱씹지 않으며, 그저 “내 말이 옳다”라는 확신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진리를 밝히는 과정이 아니라, 각자의 신념을 강화하는 울타리를 만드는 데 머물러 버린다.
철학은 본래 대화 속에서 태어났다.
- 플라톤의 『대화편』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나눈 문답의 기록이었다. 그는 강의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고, 되묻고, 상대의 모순을 드러내며, 함께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진리란 고정된 답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여정임을 보여주었다.
- 공자 역시 『논어』를 통해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사상을 남겼다. 그는 “군자는 말이 아니라 행위로 드러난다”고 하면서도,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가르침을 확장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은 ‘혼자 앉아 묵상하는 학문’이 아니라 대화의 예술이었다. 철학은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고, 질문이 이어지고, 그 속에서 생각이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살아났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청년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온라인이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대부분 짧은 언쟁이나 감정의 표출에 가깝다. 댓글창은 논증의 장이 아니라, 분노와 조롱이 난무하는 전장이 된다. ‘좋아요’와 ‘싫어요’가 찬반 토론을 대신하고, 짧은 짤 영상이 복잡한 사유를 단순화한다.
이렇게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소음과 분열이다. 대화의 부재는 결국 민주주의의 부재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단순히 투표로 유지되는 제도가 아니라, 깊은 토론과 합리적 설득의 문화 위에 뿌리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윤리, 불평등, 젠더 갈등… 이 모든 것은 다층적이며, 단순히 한두 가지 정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 앞에서 한쪽 목소리만 듣고 결정을 내린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집단의 반발과 갈등이 발생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철학적 대화다. 철학적 대화란,
상대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듣고,
자신의 주장 속 허점을 직시하며,
불편한 질문을 견뎌내고,
서로 다른 관점을 교차시켜 새로운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철학적 대화는 곧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되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조율하며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도구다.
특히 청년 세대에게 이 대화의 부활은 절실하다. 청년들은 지금 “빠른 답”만을 요구받는 환경에서 자라왔다. 입시에서, 취업 준비에서, SNS의 짧은 반응 속에서 청년들은 “즉각적인 정답”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미래는 단순한 정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과 협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제 대학 토론 대회에서 학생들이 보여준 장면은 그 가능성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전공과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한 주제를 놓고 밤새워 토론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말을 잘하는 능력을 넘어서 사유하는 힘과 타인의 시각을 존중하는 힘을 길러냈다. 그것은 단순한 대회 성적 이상의 성과였다. 그것은 철학적 대화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는 역량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민주주의는 절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투표는 결과일 뿐, 그 이전에는 반드시 시민들의 깊은 대화와 성찰이 필요하다. 만약 그 과정이 없다면, 투표는 단순한 감정 표출에 그치고 만다. 정치인은 대중의 분노와 욕망을 자극하는 선동으로 표를 얻을 수 있고, 공동체는 장기적 비전을 잃게 된다.
반대로 철학적 대화가 살아 있는 사회는 다르다.
갈등을 억누르지 않고 드러낸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성찰한다.
그 차이 속에서 더 나은 길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철학적 대화가 단순한 ‘지적 놀이’가 아니라, 사회 설계의 실질적 도구인 이유다.
우리는 지금, 대화의 부재가 불러온 위기 앞에 서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대화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다. 청년들이 질문을 던지고, 서로의 입장을 듣고, 불편한 차이를 견디는 순간, 철학적 대화는 부활할 수 있다.
철학적 대화는 결국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정말 충분히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깊은 대화 없이 과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대화 없이는 미래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것. 철학적 대화가 부활할 때, 청년은 더 이상 피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미래의 설계자가 될 것이다.
철학 없는 사회는 무엇보다 단기성과에 매달린다. 정치인은 다음 선거와 지지율만 바라보고, 기업은 분기 실적과 주가에만 몰두한다. 교육은 시험 점수와 자격증 취득에만 매여 있고, 시민은 빠른 소비와 즉각적 만족을 추구한다. 사회 전체가 눈앞의 성과만 좇는 구조 속에 갇히면, 장기적 비전은 설 자리를 잃는다.
결과는 불안정이다.
기후 위기는 “지금 당장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미뤄지고,
인공지능 기술은 상업적 속도 경쟁에만 맡겨진 채 윤리적 검토는 소홀해지고,
불평등은 누적되며, 사회적 갈등은 봉합되는 듯하다가 다시 터져 나온다.
이런 사회에서 청년은 특히 불안하다. 안정적인 직업 전망은 줄어들고, 미래에 대한 확신은 약해진다. 취업 경쟁과 주거 불안 속에서 청년들은 “살아남는 것”에 급급해지고, 철학적 질문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사회는 미래를 잃는다. 사유가 부재한 사회는 문제의 근본을 직시하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만 위기를 넘기려 한다. 결국 철학 없는 사회는 눈앞의 편리함을 얻고, 지속 가능한 기반을 잃는 사회가 된다.
반대로 철학 있는 사회는 단기성과보다 “무엇이 옳은가,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철학적 성찰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사회가 어디로 나아갈지를 설계하는 지적 나침반이다.
철학 있는 사회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기후 변화 문제를 당장 불편하더라도 직시한다.
AI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 존엄과 윤리를 검토한다.
교육은 점수를 넘어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시민은 단순한 ‘정책의 소비자’가 아니라, 깊이 사고하는 주체로 자리한다.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더라도, 철학적 대화를 통해 차이를 성찰하고 공통의 미래를 모색한다. 겉으로는 시끄럽지만, 내적으로는 더 건강하다. 왜냐하면 분열이 아닌 성찰과 대화가 사회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청년에게 철학 있는 사회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좋은 직장”이나 “빠른 성공”만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내 삶의 의미, 공동체 속에서 내가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품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철학은 청년을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미래의 설계자로 세운다.
결국 미래 사회의 조건은 단순하다.
철학 없는 사회는 불안정과 단기성과의 악순환에 빠지고,
철학 있는 사회는 지속 가능성과 장기적 비전을 만들어낸다.
이 둘의 차이는 단순한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세대의 삶과 직결된 현실이다. 질문 없는 사회에서 청년은 미래를 잃고, 질문이 살아 있는 사회에서 청년은 미래의 주인이 된다.
미래는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과 대화,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시민적 실천 위에 세워진다. 진리를 묻는 수고를 외면할 때 사회는 잠시 편안할지 몰라도, 결국 불안정 속에 무너진다. 반대로, 그 수고를 감당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사회와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철학 없는 사회는 미래를 잃고, 철학 있는 사회는 미래를 설계한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결국 이 단순한 진리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정보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진리 탐구는 사라지고 있다. 정치는 단기성과에 매달리며, 권력은 시민들의 무관심을 이용해 스스로의 이익을 챙긴다. 청년 세대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불안에 시달리며, 철학적 질문은 점점 사라져간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철학의 복원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다.
철학은 단순히 교과서 속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힘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았고, 공자의 성찰은 혼란의 시대에 질서를 세웠으며, 데카르트의 사유는 개인을 권위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들의 철학은 과거의 장식이 아니라, 당대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실천적 도구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명확하다. 다시 철학을 불러내야 한다.
나는 이 과제를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현장의 경험으로 보아 왔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tvN 대학토론배틀 무대를 준비할 때, 나는 철학이 단순히 학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훈련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전북대 ‘카이케로’ 팀이 전국 362개 대학이 참여한 토론대회에서 3위에 오르고, 원광대 ‘슈퍼브레인’ 팀이 지방대학 중 유일하게 4강에 진출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성적이 아니었다. 그 성취는 학생들이 깊이 질문하는 법,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법, 그리고 서로 다른 관점을 조율하며 진리를 모색하는 법을 배워냈다는 증거였다.
토론 과정은 쉽지 않았다. 수많은 밤을 자료 검토와 논리 구조 점검으로 보내야 했고, 서로의 주장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학생들은 ‘말 잘하는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깊이 사고하는 힘,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힘,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였다. 그것은 바로 철학적 시민이 지녀야 할 자질이었다.
이 경험은 나에게도 중요한 통찰을 주었다. 철학적 사고는 결코 교양의 장식이 아니라, 시민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힘이라는 사실이다. 청년들이 보여준 성장은 곧 사회 전체가 철학을 회복할 때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 증거였다.
이 책은 바로 그 확신에서 출발한다. 철학은 과거의 위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다. 특히 청년 세대에게 철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불안정한 노동, 빠르게 변하는 기술, 갈수록 커지는 사회적 격차 속에서, 철학 없는 삶은 쉽게 휘둘리고 무력해진다. 그러나 철학적 질문을 품은 청년은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에게 묻고자 한다.
“당신은 미래를 정치인에게 맡기고 체념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철학적 시민으로서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로 설 것인가?”
결론은 분명하다. 미래는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계하는 것이다.
철학 없는 시민은 권력의 종속자가 되지만, 철학 있는 시민은 권력을 견제하며 미래의 주인이 된다.
이제 나는 독자와 함께 이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앞으로의 각 장에서는 과거 철학자들의 논쟁을 오늘의 현실 속으로 다시 불러내어, 우리가 직면한 문제와 대화시킬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공리주의자, 하버마스와 푸코… 그들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위한 거울이자 나침반이 될 것이다.
철학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는 대화이며, 미래를 향한 길잡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진리를 묻는 태도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다시 철학을 불러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