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사회에서 행복의 기준 – 쾌락인가, 절제인가

[진리 탐구 03] 에피쿠로스 vs 스토아

청년 세대의 행복을 묻다




서울의 한 카페, 토요일 저녁. 20대 청년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각자의 주말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이는 방금 막 해외여행을 예약했다고 들뜬 표정을 짓는다. “YOLO잖아,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언제 하겠어?” 그의 말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보낸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나는 차라리 절약해서 안정적인 미래를 준비할래. 요즘 경제 상황에 무리한 소비는 불안할 뿐이야”라고 반박한다. 순간 테이블 위에는 ‘쾌락’과 ‘절제’를 둘러싼 작은 논쟁이 시작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청년들의 일상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철학적 질문을 압축한다. “행복은 무엇인가? 즐기는 삶인가, 절제하는 삶인가?”


최근 청년 세대의 삶은 이 두 갈래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한쪽에는 ‘욜로(YOLO) 소비’가 있다. 명품을 사고, 해외여행을 떠나며,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인스타그램에는 화려한 음식 사진과 여행 인증샷이 넘쳐난다. 다른 한쪽에는 ‘미니멀리즘’과 ‘디지털 디톡스’, ‘자발적 가난’의 움직임이 있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삶을 단순화하며,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한다. 이들은 행복을 ‘덜어내는 것’에서 찾는다.


그러나 두 흐름 모두 청년들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남긴다. 욜로적 소비는 순간의 쾌락을 안겨주지만, 뒤이어 찾아오는 빚과 불안은 무겁다. 절제적 삶은 안정감을 주지만, 때로는 지나친 금욕이 답답함과 고립감을 불러온다. 결국 청년 세대는 ‘즐거움과 절제’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방황하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고민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더 제국이 무너지고 불안정한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했을 때도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개인은 더 이상 공동체의 확고한 지침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를 자문했다. 바로 그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내놓은 이들이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삶의 목적은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적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평온, 즉 아타락시아다.” 그는 소박한 식사, 우정, 대화 속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반대로 스토아 학파는 이렇게 답한다.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덕과 절제다. 인간은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이성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운명과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고, 내적 평정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 했다.


놀랍게도, 오늘날 청년 세대의 행복 논쟁은 바로 이 두 고대 철학자의 목소리를 다시 부르고 있다. 욜로와 미니멀리즘, 과소비와 절제, 자기계발 열풍과 번아웃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우리의 모습은 곧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의 논쟁을 현재로 소환하는 것이다.


도입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게 된다.

행복이란, 순간의 즐거움 속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욕망을 다스리고 절제하는 삶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가?

혹은 이 두 길을 조화시키는 제3의 길이 존재하는가?


이 책의 네 번째 여정은 바로 이 오래된 논쟁을 따라가며, 오늘날 청년 세대의 웰빙 사회를 다시 성찰하려는 시도다. 쾌락과 절제, 향유와 덕, 욕망과 이성의 긴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철학적 배경 – 헬레니즘 시대와 행복의 철학





헬레니즘 시대는 “세계가 갑자기 넓어졌지만, 개인은 오히려 길을 잃은 시대”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을 마치고 제국을 세웠으나, 그의 죽음 이후 제국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정치적 불안정, 전쟁과 권력 다툼, 그리고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안정된 공동체의 울타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 민주정이 주었던 정치적 참여의 경험은 사라지고, 개인은 거대한 제국 속에서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해졌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질문에 직면했다.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초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전의 철학이 공동체와 정의, 정치적 이상을 논했다면, 헬레니즘 철학은 개인의 내적 삶과 행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바깥의 정치적 제도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평온과 의미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배경에서 두 가지 상반된 길이 나타났다. 에피쿠로스 학파스토아 학파다.






에피쿠로스 학파 – 즐거움 속의 평온




에피쿠로스(BC 341~270)는 아테네에 ‘정원(케포스)’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는 “철학의 목적은 이론이 아니라 삶의 행복”이라고 단언했다. 그가 말한 쾌락은 흔히 오해되는 육체적 향락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지나친 욕망과 집착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에게 진정한 행복은 ‘아타락시아(ataraξia), 즉 고통이 없는 평온한 상태였다. 이를 위해서는 욕망을 구분해야 했다.


-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 의식주, 안전, 우정 →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미식, 사치 → 절제할 필요가 있다.

- 자연적이지 않고 허망한 욕망: 권력, 명예, 무한한 부 → 피해야 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방탕한 향락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통해 평온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그는 “빵과 물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친구와 함께 나누는 대화 속에서 최고의 기쁨을 발견했다.






스토아 학파 – 절제와 덕을 통한 자유




에피쿠로스와 거의 동시대에 등장한 또 하나의 흐름은 스토아 학파였다. 창시자 제논(BC 334~262)은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킬레’라는 회랑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학파 이름이 스토아가 되었다.


스토아 철학의 출발점은 “세상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인식이었다. 전쟁, 기후, 질병, 정치 권력 등은 인간의 힘으로 바꾸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의 태도와 이성이다.


스토아 학파는 행복을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적 덕(virtue) 속에서 찾았다. 외부의 부귀영화나 쾌락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지만, 이성에 따라 욕망을 절제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다.


그들의 핵심 개념은 아파테이아(apatheia), 즉 감정의 동요로부터 자유로움이다. 분노, 두려움, 욕망은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반대로 이성의 지배 아래서 절제와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외부 환경이 어떠하든 흔들리지 않는 내적 평정을 얻는다.


스토아 철학은 특히 정치적 혼란기와 제국 시대에 큰 호소력을 가졌다. 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을 남기며 스토아 철학을 실천한 것은, 거대한 제국을 이끌면서도 내적 평온을 지키려는 노력의 증거였다.






두 학파의 대비



- 에피쿠로스는 “즐거움이 행복의 길”이라 했고, 스토아는 “절제가 행복의 길”이라 했다.

-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최소화하여 평온을 얻자고 했고, 스토아는 이성을 극대화하여 평정을 얻자고 했다.

- 에피쿠로스는 소박한 공동체 속의 우정을 강조했고, 스토아는 우주적 질서와 보편적 이성을 강조했다.


두 길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평온과 자유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현대 청년 세대와의 연결




오늘날 청년들이 ‘욜로’와 ‘미니멀리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바로 헬레니즘 시대 청년들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의 목소리를 들었던 상황과 닮아 있다. 거대한 사회 구조와 불안정한 경제,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청년들은 “나는 어디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쪽에서는 “여행, 소비, 즐거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적 목소리가 들린다.

다른 한쪽에서는 “욕망을 절제하고 내적 평정을 지켜야 한다”는 스토아적 목소리가 들린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현실적 행복 매뉴얼이기도 하다.










에피쿠로스의 행복론 – 즐거움의 철학




에피쿠로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곧장 “쾌락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는 그의 철학을 단편적으로 이해한 결과에 불과하다. 사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향락적 쾌락주의”가 아니라, “고통 없는 평온(아타락시아)”라는 훨씬 더 정교하고 절제된 개념 위에 세워져 있었다.






1. 에피쿠로스의 기본 명제 – 행복은 즐거움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정의하는 데 있어 매우 단호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행복이며, 행복은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즐거움은 단순히 순간적인 감각적 쾌락을 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피쿠로스는 방탕한 향락을 경계했다.


그에게 즐거움은 고통의 부재였다. 인간을 괴롭히는 두 가지 근본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정신적 불안이었다. 따라서 참된 즐거움은 육체의 고통을 피하고, 정신의 불안을 제거하는 데서 비롯된다. 단순한 음식, 건강한 몸, 안전한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의 평정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2. 욕망의 구분 – 불필요한 욕망을 버려라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는 욕망의 구분이다. 그는 모든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1.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 생존과 기본적인 행복에 꼭 필요한 욕망. (음식, 물, 쉼터, 의복, 우정 등)

2.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은 욕망. (호화로운 음식, 사치품 등)

3.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욕망: 끝없는 권력, 명예, 부, 명성.


그는 첫 번째 욕망은 충족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욕망은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했다. 특히 세 번째 범주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으며, 그 과정에서 오히려 고통이 커진다.


따라서 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은 욕망을 줄이는 것을 통해 얻어진다. 만족은 충족의 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욕망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3. 아타락시아 – 마음의 평온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최종적 목표는 아타락시아(ataraξia), 즉 마음의 평온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 속에서 산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신에 대한 두려움이 삶을 괴롭힌다.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불안을 없애기 위해 철학을 실천적 의학으로 보았다. 철학은 지적 장난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는 처방이었다.


그의 처방은 단순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존재하지 않으며,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의식하지 못한다.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 신이 존재하더라도 인간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욕망을 절제하라: 불필요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곧 평온의 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개인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4. 정원 공동체 – 우정과 대화 속의 행복



에피쿠로스는 단순히 철학을 가르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정원(케포스)’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세워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소박한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통해 사유를 확장하며, 우정을 바탕으로 살아갔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지혜로운 자는 필요할 때 친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정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친구와 나누는 대화와 신뢰는 어떤 부와 명예보다도 더 큰 즐거움이었다.


정원 공동체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권력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작은 규모의 공동체가 어떻게 평온을 누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5. 에피쿠로스와 청년 세대



오늘날 청년 세대가 직면한 고민 역시 에피쿠로스의 사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 과잉 욕망의 사회: 명품, 고연봉, 화려한 SNS 이미지… 그러나 이 욕망은 채울수록 더 큰 공허를 남긴다. 에피쿠로스라면 “자연적이지 않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이라며 버리라고 했을 것이다.

-불안의 사회: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 취업과 주거, 관계의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에피쿠로스는 바로 이 정신적 불안을 줄이는 것이 행복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 우정과 공동체의 가치: 디지털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진정한 우정과 깊은 대화는 청년들에게 삶의 의미와 평온을 준다.


따라서 오늘날 청년들에게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라, 욕망을 줄이고 평온을 지키는 삶의 기술로 다가온다.






6. 오해와 교훈



에피쿠로스는 오랫동안 “쾌락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아왔다. 하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학생들에게도 단순한 식사와 소박한 삶을 강조했다. 그는 사치와 과도한 욕망을 비판했으며, 쾌락을 삶의 본질적 기준으로 삼되 그것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행복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행복은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지키는 데서 온다.

즐거움은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평온 속에 존재한다.






맺음말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단순히 고대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고, 내적 평온을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제공한다. 그는 말한다.


“네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 적은 것을 원하는 자는 신과 다름없이 행복하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우리가 소비와 경쟁에 지쳐 있을 때, 에피쿠로스는 속삭인다. 행복은 더 많이 가지는 데 있지 않고, 더 적게 원하는 데 있다.










스토아의 행복론 – 절제와 덕의 철학





에피쿠로스가 “즐거움 속의 평온”을 추구했다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에게 행복은 즐거움이 아니라 덕(virtus)이었다. 인간은 외부의 쾌락이나 조건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자기 내면의 이성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핵심 명제였다.






1. 스토아 철학의 탄생 배경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3세기, 키프로스 출신 철학자 제논(Zeno of Citium)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아테네의 시장 기둥 회랑(스토아 포이킬레, Stoa Poikile)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이 장소가 곧 학파의 이름이 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헬레니즘 시대의 혼란 속에서 탄생했다. 제국이 커지고, 전쟁과 권력의 교체가 빈번하던 시기, 사람들은 안정된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내적 평온을 추구해야 했다. 스토아 철학은 이러한 불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천적 철학이었다.






2. 행복의 기준 – 외부가 아니라 내면



스토아 철학자들이 강조한 것은 단순했다. 행복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면의 덕에 있다.


그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재산, 명예, 건강, 정치적 상황 등)에 의존하는 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태도뿐이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에서 행복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올바르게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외부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나의 태도를 바꿔라”라는 말과도 같다.






3. 아파테이아 –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



스토아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아파테이아(apatheia), 즉 “정념(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였다.

분노, 탐욕, 공포 같은 감정은 우리의 이성을 흐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진정한 행복은 감정을 억누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이성을 따라 행동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모욕을 주었을 때, 스토아 철학자는 분노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 모욕이 나의 덕을 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상 아무 힘이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외부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나의 태도라는 것이다.






4. 덕(virtus) – 인간 행복의 절대 기준



스토아 철학자들은 행복의 기준을 으로 한정했다.

용기

지혜

절제

정의


이 네 가지 덕은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이며, 이 덕이 유지되는 한 인간은 외부 조건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가난하거나 병들었더라도 정의롭게 행동하고, 지혜롭게 선택하며, 절제를 지킨다면 그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 반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더라도 덕을 잃었다면 그는 불행하다고 본 것이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황제의 철학



스토아 철학의 빛나는 사례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다. 그는 전쟁과 역병, 정치적 혼란 속에서 나라를 이끌며 『명상록(Meditations)』을 남겼다.


그는 제국의 황제이자 절대 권력을 가졌지만, 늘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고민했다. 그의 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너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해석하는 네 생각이다.”

“외부의 것은 너를 해칠 수 없다. 너를 해치는 것은 네 마음속 판단뿐이다.”


황제조차 외부 세계를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오직 자기 내면을 통제하려 했던 그의 태도는 스토아 철학의 전형을 보여준다.






6. 스토아와 오늘의 청년 세대



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상황은 헬레니즘 시대 못지않게 불안정하다.

취업난, 불안정한 일자리, 끝없는 경쟁.

기후 위기와 전쟁, 글로벌 불확실성.

SNS 속 비교와 자존감의 흔들림.


이 모든 것은 청년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이럴 때 필요한 지혜를 준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되, 통제할 수 있는 내적 태도와 행동에 집중하라.

타인의 시선이나 SNS의 ‘좋아요’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덕과 가치에 충실하라.

순간의 감정(분노, 불안, 질투)에 끌려가지 말고, 장기적 비전과 이성적 판단을 기준으로 행동하라.


스토아 철학은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 회피가 아니라 단단한 내적 자립의 길을 제시한다.






7. 오해와 교훈



스토아 철학은 종종 “감정을 없애라”라는 냉정한 철학으로 오해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감정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경고였다.


오늘의 교훈은 분명하다.


외부 환경은 불확실하고, 미래는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내적 덕과 이성은 언제나 우리의 선택 안에 있다.

진정한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맺음말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은 화려하지도, 즉각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흔들림 없는 행복이다. 시대가 아무리 불안정해도, 외부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내면의 덕과 절제를 지킨다면 인간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오늘의 청년 세대에게 스토아의 목소리는 이렇게 들린다.
“너의 행복은 외부가 아니라, 네 안에 있다. 세상이 흔들릴지라도, 네 마음은 흔들리지 말라.”










두 철학자의 토론 장면 재현 – 쾌락과 절제의 대화





1. 장면 설정 – 대학 강당의 토론회



서울의 한 대학 강당. 청년 철학 토론 동아리에서 마련한 특별 세미나가 열렸다. 주제는 “행복한 삶, 쾌락인가 절제인가”.
무대 위에는 두 명의 특별한 게스트가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청중을 바라보는 에피쿠로스, 다른 한 사람은 굳건한 눈빛으로 관중을 꿰뚫는 듯한 스토아 철학자(세네카로 가정)였다.


청중의 대부분은 20대 청년들. 이들은 “워라밸”, “욜로”, “자기계발”, “극한 경쟁” 사이에서 방황하며,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혼란스러워한다. 토론은 사회자의 간단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2. 에피쿠로스의 첫 발언 – 즐거움의 철학



에피쿠로스:
“친애하는 청년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행복은 즐거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내가 말하는 즐거움은 향락과 방탕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 마음의 평온(아타락시아)이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스펙 경쟁과 불안정한 일자리 속에서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불안은 쾌락을 빼앗아간다. 즐거움은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고, 현재의 소박한 삶에서 만족을 찾을 때 생겨난다. 친구와 함께 나누는 대화, 적당한 음식을 즐기는 식사, 작은 정원의 고요함—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과도한 성취 욕망이나 과잉 경쟁은 결국 그대들을 지치게 한다. 그러니 욕망을 조절하고, 불필요한 두려움—특히 죽음에 대한 공포—을 버려라. 그대들의 삶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청중의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무 치열하게 살다 보니 마음이 병드는 것 같아”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3. 스토아 철학자의 반론 – 절제와 덕의 목소리



세네카:
“에피쿠로스여, 그대의 말에는 분명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러나 나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행복은 즐거움이 아니라 덕에 있다.


즐거움은 불안정하다. 그것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사라진다. 건강이 무너지면, 친구가 떠나면,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 즐거움은 무너진다. 그러나 덕은 무너지지 않는다. 정의롭게 살고, 지혜롭게 선택하며, 절제와 용기를 지키는 사람은 외부 환경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청년들이여, 지금 그대들이 마주하는 사회는 불확실하다. AI가 일자리를 대체하고, 경쟁은 끝없이 이어지며, 경제 위기는 반복된다. 이런 세상에서 단지 ‘쾌락’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대들의 행복은 쉽게 산산조각날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덕은 어떤 폭풍이 와도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4. 대립 – 쾌락인가, 절제인가



에피쿠로스:
“그러나 세네카여, 덕만을 좇는 삶은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가?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견디는 고행이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다. 그대들의 철학은 혹시 인간을 지나치게 긴장 속에 묶어두는 것은 아닌가?”


세네카:
“자유란 방종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청년들이 술과 오락, 소비 속에서 잠시 위로를 찾지만, 다음 날 아침 불안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라.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다. 절제 없는 쾌락은 결국 새로운 고통을 낳는다.”


청중의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는 요즘 ‘욜로(YOLO)’와 ‘갓생 살기’ 사이에서 혼란스러워요. 한쪽은 지금 즐기라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자기계발과 절제를 강조합니다.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걸까요?”






5. 청년과의 대화 – 철학의 적용



에피쿠로스:
“젊은이여, 그 혼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지금 누릴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을 소중히 하라. 그 즐거움이 그대의 삶을 지탱한다. 지나친 목표와 성취 강박에 스스로를 옭아매지 말라.”


세네카:
“나는 다르게 말하겠다. 즐거움은 분명 삶의 일부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 ‘덕’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 덕이 없는 즐거움은 공허하다. 덕이 있는 삶은 설령 고통이 있어도 견고하다.”


청중은 양쪽의 말에 갈팡질팡했다. 어떤 이는 에피쿠로스의 부드러운 철학에 마음이 끌렸고, 어떤 이는 세네카의 단단한 철학에 고개를 끄덕였다.






6. 결론 없는 결론 – 질문으로 끝나는 토론



토론의 끝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우리는 두 철학자의 다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쾌락과 절제, 즐거움과 덕.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습니까? 아니면 두 길을 모두 고민해야 할까요?”


청년들은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단순히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라는 막연한 고민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쾌락과 절제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마음속에 싹튼 것이다.






맺음말



이 토론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철학적이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의 대립은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삶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행복은 어느 한쪽의 독점물이 아니라, 두 길 사이에서 성찰하고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오늘의 청년 세대에게 이 토론은 묻는다.

“그대는 지금 쾌락을 따르는가, 절제를 따르는가?”

“아니면 두 길의 긴장 속에서 자기만의 행복을 설계하고 있는가?”










실제 사례 분석 – 웰빙 사회의 빛과 그림자





1. 웰빙 열풍의 도래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도 본격적으로 “웰빙(Well-being)”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았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추구하는 흐름이었다. 건강한 음식, 자연 친화적 라이프스타일, 요가와 명상, 자기계발과 힐링 여행 같은 것들이 유행하며, 웰빙은 하나의 사회적 키워드가 되었다. 특히 MZ세대는 부모 세대가 경제적 성장을 최우선으로 삼던 삶과 달리, “내 삶의 질”과 “균형”을 강조하며 웰빙을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웰빙은 분명 에피쿠로스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욕망을 줄이고, 자연스러운 즐거움 속에서 평온을 추구하며,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중시하는 태도는 고대 철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웰빙은 시장의 논리 속에서 왜곡되고 변형되기도 했다.






2. 빛의 측면 – 건강과 균형의 회복



웰빙 문화가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삶의 균형 회복이다.


- 심리적 차원: 번아웃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많은 청년들이 요가, 명상, 심리 상담 등을 통해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 했다. 이는 에피쿠로스가 강조했던 ‘아타락시아(불안의 해소)’와 닮아 있다.


- 생활 습관: 유기농, 채식, 슬로푸드 운동 같은 흐름은 과도한 소비와 무절제한 식습관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적게 먹고, 더 건강하게 산다”는 실천은 욕망을 줄여 참된 즐거움을 찾으려 했던 에피쿠로스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 관계적 차원: 웰빙은 경쟁보다는 함께하는 삶을 강조했다. 동호회, 공동체 활동, 소규모 모임을 통해 청년들은 치열한 경쟁 대신 나눔과 연대 속에서 삶의 기쁨을 경험했다.


이러한 점에서 웰빙은 단순한 소비 트렌드를 넘어,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이 될 수 있었다.






3. 그림자의 측면 – 소비화된 웰빙



그러나 웰빙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닌다.


- 상품화: ‘웰빙’을 표방한 제품은 때로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판매된다. 웰빙 아파트, 웰빙 가전, 웰빙 여행 같은 단어가 쏟아졌지만, 이는 본래의 ‘균형 있는 삶’과는 무관한 마케팅 수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 계층 격차: 건강한 식재료, 힐링 프로그램, 심리 상담 등은 가격이 비싸 서민과 청년들에게는 오히려 사치품이 되었다. 웰빙은 일부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변질되었다.


- 자기계발 강박: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은 때로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명상 앱, 피트니스 기록, 다이어트 인증이 새로운 경쟁의 장이 되면서, 웰빙은 오히려 새로운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우려와 닮아 있다. 외부적 조건에 의존하는 행복은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비싼 웰빙’은 결국 또 다른 욕망을 자극하며, 평온 대신 불안을 증폭시킨다.






4. 청년 세대의 삶 속 웰빙 – 양가적 경험



청년 세대의 구체적 경험은 웰빙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 어떤 청년은 번아웃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가 소박한 삶을 시작했다. “소유보다 존재”를 택한 그의 선택은 에피쿠로스적 행복의 전형이다.


- 그러나 또 다른 청년은 SNS 속 ‘힐링 여행’과 ‘건강 관리 루틴’을 따라가느라 빚까지 지게 되었다. 웰빙이 진정한 치유가 아니라, 새로운 경쟁과 소비의 장이 된 것이다.


결국 웰빙은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지에 따라 청년 세대의 삶을 치유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5. 철학적 교훈



에피쿠로스가 강조한 소박한 즐거움은 웰빙의 진정한 가치와 맞닿아 있다. 반면 스토아의 덕과 절제는 웰빙이 소비 논리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안정 장치가 된다. 두 철학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웰빙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양날의 칼이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균형이다. 웰빙을 추구하되, 그것이 단순한 소비나 경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절제하는 힘. 즐거움을 누리되, 그것이 본래의 자유와 평온을 해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하는 힘.










쾌락과 절제의 균형 프레임





1. 두 철학의 공통된 출발점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는 겉보기에는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한쪽은 쾌락을, 다른 한쪽은 절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의 출발점은 동일하다. 바로 “행복은 외부 세계의 혼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부재(아타락시아)를 통해 평온을 누리고자 했다.

스토아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덕에 따라 살아가는 아파테이아(평정)를 추구했다.


즉, 두 학파 모두 인간을 외부 조건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만난다.






2. 쾌락과 절제, 균형의 문제



오늘날 청년 세대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이 균형이다.

- 쾌락만을 추구하면 중독, 불안, 공허가 뒤따른다.

- 절제만을 추구하면 경직, 억압, 우울로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적 즐거움과 스토아적 절제는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견제하고 보완하는 두 축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청년이 해외여행을 가는 경험은 에피쿠로스적 즐거움이지만, 그 과정에서 과소비로 빚을 지지 않도록 계획하는 것은 스토아적 절제다. 두 요소가 결합될 때 여행은 진정한 행복의 경험으로 남는다.






3. 균형 프레임 제시



쾌락과 절제의 균형을 현대적 언어로 풀면 다음과 같다.


1. 즐거움의 기준 세우기 – 즉흥적 쾌락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즐거움을 선택한다. (예: 단순 소비 vs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경험)


2. 절제의 이유 성찰하기 – 무작정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왜 절제가 필요한지를 이해한다. (예: 재정 관리, 건강, 공동체적 책임)


3. 순환적 점검하기 – 일정한 주기로 자신이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 돌아본다. ‘최근 나는 너무 즐기기만 하는가, 아니면 너무 억누르며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하나의 균형 프레임으로 시각화하면, 한쪽 끝에는 에피쿠로스적 즐거움, 다른 한쪽에는 스토아적 절제, 그리고 중앙에는 ‘삶의 평온’이 놓인다. 균형점은 고정된 지점이 아니라, 상황과 개인의 삶에 따라 유동적으로 이동한다.






4. 철학적 교훈



결국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의 논쟁은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의 문제였다. 청년 세대가 마주한 웰빙 사회의 과제 역시 같다.


쾌락 없는 절제는 공허하다.

절제 없는 쾌락은 파괴적이다.


행복은 어느 한쪽의 극단에서가 아니라, 두 길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피어난다.








결론 및 성찰 – 웰빙 사회의 진짜 질문





1. 웰빙의 진짜 의미를 묻다



우리는 웰빙 사회를 살고 있다. 건강, 휴식, 자기계발, 심리적 안정은 누구나 바라는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웰빙은 진짜 행복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겉으로는 치유와 회복을 이야기하지만, 때로는 웰빙이 또 다른 소비의 무대가 된다. 명상 앱을 구독하고, 비싼 웰빙 제품을 사고, SNS에 행복한 순간을 인증하지만, 정작 마음은 공허하다. 이것은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소박한 즐거움도 아니고, 스토아가 말했던 덕의 평온도 아니다. 그저 시장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2. 에피쿠로스와 스토아가 남긴 길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할까? 고대 철학자들은 이미 우리에게 실마리를 남겼다.


- 에피쿠로스: 참된 즐거움은 욕망을 줄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기쁨을 찾는 데 있다. 소박한 식사, 친구와의 대화, 고요한 시간 속에서 행복은 충분하다.


- 스토아: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덕과 절제를 통해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자기 안의 태도가 행복을 결정한다.


이 두 길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균형 있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함께 붙잡아야 할 두 축이다.






3. 청년 세대에게 던지는 질문



오늘날 청년들은 웰빙을 가장 열정적으로 소비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혼란을 겪는 세대다. “내가 진짜 원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내가 추구하는 웰빙은 소비인가, 아니면 삶의 태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방황한다.

취업 경쟁 속에서 지친 청년은 여행과 소비를 통해 잠시 위로를 얻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것을 절제하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청년도 있다. 그러나 절제만으로는 삶이 딱딱해지고, 즐거움 없는 도덕은 또 다른 억압이 된다.


따라서 청년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쾌락과 절제를 동시에 끌어안는 지혜, 그것이 웰빙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4. 웰빙 사회의 진짜 질문



결국 웰빙 사회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소비로써 행복을 살 것인가?”

“아니면 사유와 성찰로써 행복을 길러낼 것인가?”


앞의 길은 빠르고 달콤하지만 공허하다. 뒤의 길은 느리고 불편하지만 지속 가능하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는 바로 이 두 길을 모두 보여주며, 어느 쪽이든 극단에 빠지지 말고 균형의 길을 걸으라고 말한다.






5. 마무리 성찰



웰빙은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우리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청년 세대가 웰빙을 단순한 소비가 아닌, 삶의 태도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고대 철학자들이 남긴 지혜와 만날 수 있다.


쾌락과 절제, 즐거움과 덕, 자유와 책임.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만 진짜 웰빙 사회는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오늘 내가 추구한 행복은 잠깐의 쾌락이었는가, 아니면 평온으로 이어지는 삶의 지혜였는가?”


그 질문을 품는 순간,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는 더 이상 고대의 철학자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동반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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