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실존, 그리고 삶의 무의미

[진리 탐구 12] 사르트르 vs 카뮈

“청년, 자유와 무의미 앞에서”




서울의 어느 대학가. 시험이 끝난 금요일 저녁, 학생들로 붐비는 카페 한켠에는 몇 명의 청년이 모여 있었다. 한 학생은 두꺼운 전공책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뭘 위해 이렇게 달리는 걸까? 취업 준비한다고, 스펙 쌓는다고 정신없이 살고 있는데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다른 친구가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게. 선택지는 많다는데, 이상하게 다 막다른 골목 같지 않아? 자유라는데 왜 더 불안하지?”


이 짧은 대화는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자유가 확대될수록 책임은 무거워지고,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은 오히려 삶을 무의미하게 느끼게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철학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다. 바로 지금, 청년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생한 고민이다.


사실 이런 장면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세기 유럽의 폐허 속에서도 똑같은 질문이 제기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상흔,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남긴 인간성의 파괴 앞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절망했다. 그 속에서 사르트르와 카뮈라는 두 철학자가 등장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 말하며, 아무리 무의미한 세계라 해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면 카뮈는 “삶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는 냉혹한 진단을 내리면서도, 바로 그 부조리를 껴안으며 살아내는 것이 인간다운 길이라고 말했다.


이 두 사상은 서로 다른 길을 제시했지만, 공통적으로 청년들에게 삶의 태도에 대한 강렬한 물음을 던졌다. 전쟁과 파괴 속에서, 그리고 지금의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그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물리적 전쟁 대신, 불안정한 노동,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끝없는 자기계발 경쟁이라는 전장을 살고 있다. 스펙을 쌓아도 안정은 보장되지 않고, 자기계발을 해도 성취는 짧게 스쳐 지나간다. 무한한 자유와 선택지 속에서 오히려 ‘내 삶은 왜 이리 공허한가?’라는 질문이 더 크게 울린다. 이는 곧 “자유는 축복인가, 형벌인가?”, “무의미한 삶에도 긍정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회차의 여정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니체 이후 실존철학의 맥을 이어간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상을 불러내어, 청년 세대의 현실과 대화시켜보려 한다. 우리는 두 철학자의 언어를 통해, 자유와 무의미라는 딜레마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색할 것이다.


카페에서의 짧은 대화는 하나의 신호탄이다. 청년의 고민은 단순히 개인의 우울이나 취업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질문이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보편적 과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우리는 자유를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며, 카뮈가 말했듯 “부조리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따라서 이번 글의 목표는 단순한 철학 해설이 아니다. 청년들의 삶 속에서 철학이 다시 숨쉬게 하는 일이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유는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불안과 무의미 속에서 방향을 찾으려는 청년들의 손에 쥘 수 있는 나침반이다.










철학적 배경 – 20세기의 위기와 실존철학





20세기 초반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모순의 시대였다. 과학과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그 문명이 낳은 가장 참혹한 파괴도 함께 드러났다. 전차, 탱크, 전투기, 핵폭탄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지만, 그 이성은 더 이상 진보와 구원의 상징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터와 수용소로 몰아넣는 도구가 되었다.




1. 세계대전의 충격과 인간 실존의 위기



1차 세계대전은 “인간이 과연 합리적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새롭게 제기했다. 유럽의 청년들은 조국과 이념을 위해 전선에 나섰으나, 참호 속에서 맞닥뜨린 것은 진흙과 피, 그리고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종교나 전통적 가치가 당연히 답해줄 수 없는 물음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그 위기를 더 극단으로 몰고 갔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스탈린 치하의 강제수용소는 인간 존재의 존엄이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은 이 시기에 비로소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 되었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인간 존재는 어디에 근거를 둘 수 있는가?





2. 실존철학의 등장



이런 배경 속에서 실존철학은 단순한 학문적 사조가 아니라 시대의 요청으로 태어났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추상적인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불안과 죽음,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존재’로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라고 말하며, 인간의 근본 조건을 불안과 유한성으로 규정했다. 키르케고르가 19세기에 이미 씨앗을 뿌린 “개인적 실존”의 문제는, 20세기에 이르러 현실적 절규로 폭발한 것이다.


이 실존철학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인간 존재는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본질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동시에 불안을 동반한다. 자유는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무한한 선택 앞에서 책임을 묻는 짐으로 다가온다.





3. 사르트르와 카뮈의 자리



이 흐름 속에서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는 실존철학을 가장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두 인물이었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이란 곧 자기 선택의 결과라는 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철학이 단순한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구체적 정치와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어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반면 카뮈는 철학자이자 문학가로서, 실존의 문제를 ‘부조리’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인간은 삶에서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인간의 욕망과 세계의 무관심 사이의 간극, 그것이 바로 부조리이다. 카뮈는 그 부조리 앞에서 자살하거나 허무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끝까지 살아내는 태도를 제시했다. 그는 『이방인』, 『시지프 신화』를 통해 그 사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4. 청년 세대와 실존의 언어



이 사상들은 단순히 철학적 선언이 아니라, 전쟁과 혼돈 속에서 길을 잃은 청년 세대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라는 카뮈의 문장은, 불안정한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잔혹하면서도 솔직한 진단이었다. 동시에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는 사르트르의 문장은,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청년들에게 던져진 도전장이었다.


오늘날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전쟁 대신 경제적 불안과 기후 위기, 그리고 기술의 불확실성이 청년들을 짓누른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구조적 장벽이 곳곳에 버티고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실존철학의 질문은 다시 살아난다. “자유는 선물인가, 짐인가?” “무의미 속에서도 나는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것인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자유와 책임의 철학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사르트르의 이 한 문장은 20세기 철학을 뒤흔든 선언이었다. 그는 인간을 전통적 철학에서 정의하던 “이미 주어진 본질을 지닌 존재”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런 본질도 갖지 않으며, 살아가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고 보았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자유롭다는 선언이자, 동시에 그 자유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요구하는 도전장이었다.






1. 본질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



사르트르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본질(essence)’이 있다고 가정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했고, 기독교 전통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러한 정의가 인간을 미리 틀에 가두는 행위라고 보았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났고, 그 어떤 선험적 의미나 목적도 부여받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나는 철학자가 될 수도 있고, 노동자가 될 수도 있으며, 기업가, 혁명가, 혹은 방랑자가 될 수도 있다. 정해진 길은 없다. 삶의 모든 의미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 선언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불안을 동반한다. 내가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곧 나의 본질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2. 자유와 불안



사르트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유롭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다. 그는 인간이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표현했다. 이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학 진학, 직업 선택, 인간관계에서 수없이 갈림길에 선다. 선택을 회피하는 것조차 또 하나의 선택이다. 결국 선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유를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여기서 생겨나는 감정이 ‘실존적 불안’이다. “내가 지금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가? 내가 걸어가는 길이 의미 있는가?”라는 질문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신도, 전통도, 사회도 더 이상 확실한 길을 제시해주지 않는 시대에,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책임을 져야 한다.






3. 타인의 시선과 ‘앙가주망’(참여)



사르트르 철학의 중요한 축 중 하나는 타인의 시선이다. 『존재와 무』에서 그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는 상황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라고 느끼지만, 동시에 타인의 눈길 속에서 객체화되고, 판단받고, 구속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모순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그는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즉,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사회적 현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적 조건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 자유는 공허한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저항운동가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는 철학자가 서재 속에서 추상적 사유만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철학은 사회와 정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청년 세대에게 주는 메시지



사르트르의 자유와 책임의 철학은 특히 청년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청년기는 본질적으로 “선택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 직업 선택, 연애와 결혼, 사회적 가치관 확립 등 중요한 갈림길이 연속된다. 이때 많은 청년들은 불안을 느낀다. “나는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르트르는 이 불안을 피하지 말라고 말한다. 오히려 불안은 자유의 증거이며, 내가 주체적으로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남들이 정해준 길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갈 때는 불안이 적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를 포기한 삶이다. 진정한 청년의 길은 불안을 감수하면서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떠안는 용기 속에서 열린다.


또한 사르트르는 “개인의 자유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진정성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이는 청년 세대에게도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성취와 성공만을 추구하는 삶이 과연 충분한가? 아니면 그 자유를 공동체와 사회적 참여 속에서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하는가?


오늘날 청년 세대는 기후 위기, 불평등, 디지털 권력의 확산 같은 구조적 문제 앞에 서 있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청년들이 자신의 자유를 개인적 차원의 자기계발에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책임과 연결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존의 주체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5. 자유와 책임의 무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단순히 “너는 자유롭다”라는 격려가 아니다. 오히려 “너는 자유롭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무거운 선언이다. 그는 인간을 ‘자유의 감옥에 갇힌 존재’로 묘사하면서,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나아가는 길은 오직 자기 선택뿐이라고 강조했다.


자유는 달콤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대 위에 세운다.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타인과 세계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실존하는 존재”가 된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 – 무의미 속에서의 삶





“삶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
알베르 카뮈의 철학은 이 모순된 선언에서 시작한다. 그는 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소설가, 저널리스트, 저항운동가로 활동하며 20세기의 가장 실존적인 질문에 답하려 했다. 그의 중심 주제는 단 하나였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1. 부조리의 자각: 세계와 인간의 간극



카뮈에게 세상은 ‘부조리(absurde)’하다. 여기서 부조리란 세상이 혼돈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부조리란 인간의 끝없는 의미 추구와 무의미한 세계의 침묵이 맞부딪히는 지점이다.


인간은 삶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인간 존재의 본능적 갈망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 질문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하늘은 침묵하고, 역사는 무심하며, 신은 부재한다. 이 간극이 바로 부조리다.


카뮈는 이 부조리를 가장 선명히 드러내는 문제로 자살을 언급했다.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자살은 유일한 철학적 문제다”라고 말했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왜 계속 살아야 하는가? 삶이 무의미하다면,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카뮈는 철학의 출발점을 이 냉혹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2. 세 가지 응답: 종교, 회피, 그리고 부조리의 수용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다.


첫째, 종교적 도피. 많은 사람들은 신에게 의미를 위탁한다. 신의 섭리 안에서 삶의 목적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이를 ‘철학적 자살’이라 불렀다.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을 포기하고 초월적 존재에 기대는 순간, 부조리의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허무주의적 회피.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고 삶을 포기하는 길이다. 자살은 이 길의 극단이다. 그러나 카뮈는 이것 또한 부조리의 회피라고 본다. 삶의 무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살아내야 한다는 과제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부조리의 수용. 이것이 카뮈가 제시한 길이다. 그는 세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조리를 극복할 수는 없지만,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3. 시지프 신화: 끝없는 노동 속의 긍정



카뮈 철학의 상징은 『시지프 신화』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시지프는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바위는 매번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 굴러 떨어진다. 이 끝없는 무의미의 반복은 인간 삶의 은유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찾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무너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카뮈는 놀라운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지프는 부조리한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도, 그것을 직시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노동을 계속해야 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기 운명을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바로 이 태도가 부조리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존엄의 원천이다.






4. 반항과 자유: 카뮈의 적극적 삶



카뮈는 부조리를 단순히 ‘참아내야 할 불행’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부조리를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강조했다. 삶이 본질적으로 의미 없다면, 인간은 외부의 강요된 목적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모든 목적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카뮈의 반항(revolt) 철학이다. 그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했다. 개인은 부조리한 삶에 무릎 꿇지 않고, 끝없이 맞서 싸우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유를 확인한다. 반항은 단순히 저항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적극적 태도다.


카뮈의 이 생각은 그가 참여한 역사적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해 나치 점령에 저항했다. 또한 전후에는 알제리 독립 문제, 사회적 불의, 전쟁의 비극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그의 철학은 책상 위의 사변이 아니라, 현실의 투쟁 속에서 체화된 사유였다.






5. 청년 세대에게 다가오는 질문



카뮈의 철학은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 특히 절실하다. 청년들은 종종 “공허”와 “무의미”를 경험한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스펙을 쌓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달려가지만, 막상 도달한 지점에서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노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부조리의 자각에 다름 아니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기후 위기와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청년 세대는 더욱 뚜렷한 무력감을 경험한다. 이때 카뮈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삶은 본래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조건 속에서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다.


즉, 청년들에게 카뮈는 “부조리를 직시하되, 그 앞에 무릎 꿇지 말라”고 말한다. 실패와 무의미의 반복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긍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태도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 전략이다.






6. 무의미 속의 긍정



카뮈가 남긴 철학적 결론은 아이러니하다. 삶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의미 때문에 인간은 자유롭다. 타인이나 신, 사회가 강요하는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매 순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냉소나 체념이 아니라, 역설적인 긍정의 철학이다. 시지프가 무의미한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했듯이, 우리 역시 무의미 속에서 삶을 사랑해야 한다.










토론 장면 재현 – 사르트르와 카뮈의 대화





장면 설정: 대학 강당, 청년들의 밤



서울의 한 대학 강당. ‘청년 철학 토론의 밤’이라는 작은 포럼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다. 무대 위 스크린에는 사르트르와 카뮈의 얼굴이 홀로그램처럼 재현된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두 철학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청년들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숨을 죽인다. 지금 이 자리는 단순한 학술 강연이 아니라, 실존 철학의 두 거장이 직접 청년 세대 앞에 서는 상상적 대화다.






1. 자유와 책임을 주장하는 사르트르



사르트르가 먼저 입을 연다.
“여러분,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을 갖지 않습니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나의 말은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먼저 던져지고, 그 다음 스스로 무엇이 될지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든 그것이 곧 ‘당신 자신’이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강렬했다. 강당의 앞줄에서 한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들에게 이 메시지는 무겁지만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사르트르는 이어서 강조했다.
“그러나 자유에는 무게가 있습니다. 선택은 곧 책임입니다. 우리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할 수 있고, 그 결과는 온전히 우리 몫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도 모두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2. 부조리와 반항을 말하는 카뮈



카뮈가 차분히 맞받는다.
“사르트르, 나는 당신의 ‘자유’에 동의하지만, 그것은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청년들은 이미 경쟁과 불확실성 속에서 짓눌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버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말하는 부조리는 바로 그 무거움 속에서 드러납니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침묵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자주 묻습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자유와 책임만을 강조한다면, 그들에게는 자살이나 체념밖에 남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뒤쪽에 앉은 한 청년이 눈시울을 붉혔다. 카뮈의 말은 지금 이 시대의 무력감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3. 자유와 부조리의 충돌



사르트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반론을 제기했다.
“카뮈, 나는 당신의 부조리 개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부조리를 직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책임을 가볍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기에, 우리는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지 않습니까?”


카뮈는 조용히 웃으며 답한다.
“맞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 창조가 ‘절대적 진리’나 ‘궁극적 목적’을 세우려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나는 시지프처럼 무너지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순간을 긍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무거운 자유를 짊어지며 영웅처럼 살아야 한다는 부담 대신, 무의미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는 작은 긍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4. 청년의 질문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강당에서 한 청년이 손을 든다.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에 지쳐 있었다.
“사르트르, 카뮈 선생님. 우리는 하루하루 스펙을 쌓고, AI가 일자리를 대체할까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부모님 세대처럼 안정된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유롭게 책임지라는 말도, 무의미 속에서도 살아가라는 말도 솔직히 두렵습니다.”


사르트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두려워도 선택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공부를 멈추든, 계속하든, 새로운 길을 찾든, 그것이 곧 당신의 존재입니다. 두려움은 자유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카뮈가 이어서 답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을 억누르려 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두려움 속에서 삶을 사랑하십시오. 무의미를 인정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완벽한 답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매일의 작은 선택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조리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방법입니다.”






5. 긴장과 화해 – 다른 길, 같은 질문



사르트르와 카뮈의 대화는 긴장과 화해를 오갔다. 사르트르는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고, 카뮈는 “부조리와 긍정”을 말하며 삶의 태도를 제시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함께 섰다.


“청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르트르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청년은 자신이 만드는 존재다. 타인의 기대나 제도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


카뮈는 고요히 덧붙였다.
“청년은 시지프다. 무거운 돌을 밀어 올려야 하지만, 그 속에서 웃을 수 있다면, 이미 승리한 것이다.”


강당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내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






6. 청년 세대의 성찰



대화는 끝났지만, 청년들의 마음속에는 여운이 남았다. 어떤 이는 사르트르의 목소리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었고, 또 다른 이는 카뮈의 부드러운 위로에 눈물을 삼켰다. 결국 이 대화가 말해주는 것은,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청년 각자가 자유와 부조리 사이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실제 사례 분석 – 청년 세대의 자유와 무의미 체험





1. ‘선택’의 자유, 그러나 무거운 짐



오늘날 청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전공 선택, 취업 경로, 직업 형태(정규직, 프리랜서, 스타트업), 심지어 거주 지역과 인간관계의 방식까지도 과거보다 훨씬 다양하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자유는 축복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다양성 때문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부담은 훨씬 더 무겁다.


예컨대 대학을 갓 졸업한 A씨는 자신 앞에 놓인 길—대기업 입사 준비, 스타트업 창업, 대학원 진학—가운데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는 매일 “내가 지금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시달린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는 곧 책임’이라는 명제가 청년들의 현실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유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그 문 앞에서 길을 정해야 하는 책임을 청년 스스로에게 요구한다.






2. ‘무의미’의 그림자 – 끝없는 경쟁과 번아웃



한편 많은 청년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부조리’와 닮아 있다.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 취업 준비생 B씨는 수십 차례 서류와 면접에서 탈락하면서 “노력과 결과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좌절을 경험했다. 이때 그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또 다른 사례는 직장에 입사한 청년 C씨다. 그는 안정된 직장을 얻었음에도 몇 달 만에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공허감에 빠졌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루틴 속에서 삶의 의미가 점점 흐려지는 것이다. 카뮈가 말한 ‘세계의 침묵’—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부조리—가 이들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특히 SNS는 이러한 무의미를 증폭시킨다. ‘자기계발’ 콘텐츠와 다른 사람의 화려한 성취를 보여주는 게시물 속에서, 청년들은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과 함께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라는 회의에 휩싸인다.






3. 청년들의 반응 – 체념, 반항, 새로운 의미 찾기



흥미로운 점은, 청년들이 이 ‘자유와 무의미’의 압박 속에서 보이는 반응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 체념형: 일부는 아예 큰 결정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N포세대’라는 말이 상징하듯, 연애·결혼·출산·내 집 마련 등 중요한 선택을 유예하거나 포기하며, 최소한의 생존만을 목표로 삼는다.


- 반항형: 다른 일부는 기존의 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대기업 취업 대신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실천하는 셈이다.


- 재의미화형: 또 다른 일부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도 작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번아웃을 경험한 청년 C씨는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타인과의 연결’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이는 사르트르의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철학과 카뮈의 ‘무의미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라’는 메시지가 동시에 반영된 모습이다.






4. 대학 강의실과 카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실제로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나눈 대화는 이러한 상황을 생생히 보여준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자유가 많다고 하지만 결국 다 경쟁이잖아요. 선택지가 많다는 건,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거예요.”

또 다른 학생은 카페에서 열린 소규모 토론에서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는 요즘 그냥 ‘살아 있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려고 해요. 큰 성공이나 거대한 목표는 버겁고, 매일 친구랑 웃을 수 있는 순간을 붙잡는 게 그나마 저를 버티게 해요.”


이 대화는 사르트르와 카뮈의 철학이 어떻게 청년들의 일상 속에서 공명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자는 책임과 선택의 무게를, 후자는 무의미 속에서 작은 긍정을 찾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5. 분석 – 청년 세대가 겪는 실존의 현장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한 개인의 고민이 아니다. 그것은 청년 세대 전체가 실존의 무대에 서 있다는 증거다. 과거 세대는 ‘안정된 직장’이라는 사회적 합의 속에서 의미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오늘날 청년들은 그 합의가 무너진 세계에 서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의 무게와 무의미의 공허를 동시에 체험한다.


사르트르의 시각에서 보자면: 청년들은 자유롭기에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카뮈의 시각에서 보자면: 청년들은 무의미에 직면했기에 허무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의미를 인정할 때,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힘을 얻을 수 있다.






� 이처럼 청년들의 자유와 무의미 체험은 단순한 세대 문제가 아니라, 실존 철학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생생히 살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실의 장면이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청년 세대에게 주는 철학적 길잡이




1. 자유의 무게 – 사르트르가 던지는 조언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로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이는 청년 세대에게 모순적인 진실로 다가온다.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회이지만, 동시에 책임이라는 짐을 떠안는 일이기도 하다.


청년들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두려움을 느낄 때, 사르트르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 “누구도 당신 대신 선택해줄 수 없다.” 부모, 사회, 제도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결국 결단은 본인의 몫이다.

- “그러나 바로 그 무게가 당신을 인간답게 만든다.” 자유는 불안하지만, 책임을 감당할 때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청년들의 혼란은 실패가 아니라 출발이다. 불안은 곧 자유의 증거이며, 그 불안을 통과한 사람만이 자기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2. 무의미와 반항 – 카뮈가 전하는 길잡이



카뮈는 인간이 직면한 세계를 ‘부조리’라고 불렀다. 세상은 의미를 주지 않고, 인간은 의미를 갈망한다. 이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많은 청년들이 “노력해도 결과가 없다”,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허무함을 호소할 때, 카뮈는 냉정하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 “그 허무를 부정하지 말라. 받아들여라.” 무의미를 지우려 애쓰는 순간, 오히려 절망이 깊어진다.

- “그러나 무의미 속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다.” 시지프스가 끝없는 바위 굴리기를 반복하면서도 웃을 수 있듯, 인간은 무의미를 자각한 그 자리에서 오히려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카뮈의 길잡이는 청년들에게 위로가 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궁극적 의미를 갖지 않더라도, 오늘 내가 친구와 웃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 순간은 충분히 살아낼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건네기 때문이다.






3. 두 철학이 만나는 지점 – 자기 삶의 의미를 ‘창조’하기



사르트르와 카뮈는 서로 다르게 출발하지만, 청년에게 주는 메시지는 결국 교차한다.


- 사르트르는 “네가 곧 의미를 만든다”고 말한다. 정해진 본질은 없으며,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창조한다.

- 카뮈는 “세상이 의미를 주지 않더라도, 그 무의미를 직면한 자리에서 작은 긍정을 만들어가라”고 조언한다.


즉, 둘 다 “삶의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청년들에게 길을 제시한다.






4. 청년 세대에게의 적용 – 불안과 허무를 견디는 법



이 철학적 길잡이는 오늘날 청년 세대가 직면한 실존적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 취업 준비와 경쟁에서 오는 불안 → 사르트르식 해석: 불안은 네가 자유롭다는 증거다.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선택의 책임을 감당하라.

- 번아웃과 무의미감 → 카뮈식 해석: 삶이 무의미하다는 자각을 억누르지 말고, 작은 순간의 긍정(관계, 예술, 일상 속 기쁨)을 붙잡아라.

- 진로와 인생의 혼란 → 두 철학자의 교차점: 삶의 의미는 사회가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매일 만들어가는 것이다.






5. 길잡이의 핵심 메시지



결국 사르트르와 카뮈가 청년들에게 던지는 길잡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사르트르: 자유의 무게를 피하지 말라. 그 무게가 곧 너의 존재 이유다.

- 카뮈: 무의미를 회피하지 말라. 그 무의미를 자각한 순간, 너는 삶을 다시 긍정할 수 있다.


이 두 목소리는 청년들에게 “너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결론 및 성찰 – 청년 세대가 던져야 할 최종 질문




청년의 시대는 언제나 질문의 시대였다. 20세기 전쟁과 식민지의 시대에도, 21세기 기술과 자본이 지배하는 오늘에도, 청년 세대는 늘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상은 단순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이 질문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길을 보여준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말한다. “네가 곧 네 삶의 의미다.” 존재는 본질보다 앞서며, 정해진 길은 없다. 그러므로 청년이 느끼는 혼란과 불안은 실패가 아니라 ‘자유의 징표’다. 이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청년은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만들어간다. 질문은 결국 이렇게 귀결된다. “나는 어떤 선택으로 나를 만들 것인가?”


카뮈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는 “삶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무의미를 절망이 아닌 긍정으로 끌어안았다. 무의미 속에서조차 삶을 사랑할 수 있는 태도, 그 자리에서 작은 행복과 기쁨을 발견하는 능력이야말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반항이다. 청년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 “무의미 속에서도 나는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


두 철학자의 길은 다르지만, 결국 청년 세대에게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삶의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가 만들어주는 것도, 제도가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오직 자기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허무는 반드시 동반되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취업 경쟁, 불안정한 노동, 관계의 단절, 그리고 AI와 같은 기술의 압도적 변화 앞에 서 있다. 이 현실은 때로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사르트르와 카뮈의 목소리가 우리를 일깨운다. “너는 이미 자유롭다. 그리고 무의미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


결국 청년이 던져야 할 최종 질문은 단 하나다.
“나는 어떤 의미를 내 삶에 새겨 넣을 것인가?”


그 답은 외부에 있지 않다. 부모도, 사회도, 제도도 대신해줄 수 없다. 청년 스스로 매일의 선택 속에서 만들어내야 한다. 그 선택은 때로는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작은 일상에서의 결단—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누군가와의 관계를 이어갈 것인가, 어떤 일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결단들이 모여 삶의 의미를 형성한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청년들에게 현실의 무게를 피하지 말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 무게가 삶의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자유는 불안과 함께 오고, 무의미는 긍정의 전제다. 그렇기에 청년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최종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오늘, 어떤 의미를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실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일 때, 청년 세대는 단지 시대의 피해자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세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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