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집착, 자유

[진리 탐구 20] 불교 vs 서구 실존주의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인가, 직면해야 할 것인가




카페 한쪽 구석,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청년 A는 손가락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지원서를 넣어도 소식이 없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옆자리에서는 B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다. 인스타그램 속 친구들의 사진은 늘 화려하다. 해외여행, 고급 카페, 즐거운 미소. 그러나 정작 본인의 일상은 학교와 아르바이트,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뒤처진 걸까.”


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겪는 장면이다. 취업의 문은 좁아지고, 안정적인 미래는 멀게만 느껴진다.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경험은 흔하다. 어떤 이들은 이 상황을 ‘불행’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들은 ‘현실’이라 받아들인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고통은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것일까?”






고통은 늘 인간의 삶을 따라다녔다. 고대 인도의 사문들이 바라본 세계도, 20세기 전쟁과 불안을 겪었던 서구 철학자들의 시선도, 모두 인간 존재를 둘러싼 고통에서 출발했다. 놀라운 것은 수천 년의 거리를 둔 이들이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는 점이다.
“왜 우리는 고통을 겪는가?”
“고통을 끝낼 수 있는가, 아니면 고통을 끌어안아야 하는가?”


불교는 이 질문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한다. 삶은 곧 ‘고(苦)’이며, 그것은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집착을 버릴 때만이 해탈과 자유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서구 실존주의는 고통을 제거할 수 없는 인간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사르트르, 카뮈 같은 사상가들은 오히려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불교는 “고통을 버려야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실존주의는 “고통을 끌어안아야 의미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둘의 대립은 단순히 동서양 철학의 차이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는 곧바로 현실적 문제로 다가온다.






예컨대, 취업 준비생에게 불합격 통지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곧 자존감의 붕괴와 삶의 의미 상실로 연결된다. 불교적 관점이라면 “그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관점이라면 “그 고통 속에서도 너만의 의미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권할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아니면 두 길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고통은 제거해야 할 불필요한 찌꺼기인가?

아니면 피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것을 통해 성숙해야 하는가?


청년 세대에게 이 물음은 더 이상 철학 교과서 속 이론이 아니다. 기후 위기와 불안정한 노동, SNS 속 비교와 자기 소외, 끝나지 않는 경쟁 사회 속에서 “고통”은 구체적인 얼굴로 다가온다. 그럴 때 철학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다시 설계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불교와 실존주의, 이 두 사상은 청년들에게 서로 다른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비우는 길’, 다른 하나는 ‘창조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 두 길의 대화를 따라가며,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의 고통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배경 – 동서양의 고통 이해





고통은 인간 존재의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도, 권력과 부를 쥔 이들에게도 고통은 늘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가난한 자는 굶주림과 결핍 속에서, 부유한 자는 불안과 공허 속에서, 학자는 의미 상실과 회의 속에서, 전사들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고통을 마주했다. 동서양의 철학은 바로 이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 불교의 시선 – 고(苦)와 집착



기원전 5세기 인도. 석가모니(붓다)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의 실체를 직시했다. 그는 부유한 왕자로 태어났지만,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장면―늙음, 병듦, 죽음, 그리고 구걸하는 수행자―을 목격한 순간, 깨달았다. 아무리 풍요롭고 권세를 누려도 결국 인간의 삶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불교의 철학은 사성제(四聖諦), 즉 고(苦)·집(集)·멸(滅)·도(道)로 요약된다.


- 삶은 곧 고(苦)다. 생로병사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 그 원인은 집착(集)에 있다. 욕망, 집착, 집념이 곧 고통의 뿌리다.

- 멸할 수 있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고통도 사라진다.

- 그 길은 도(道)다. 팔정도의 실천, 곧 올바른 사유·행동·명상 속에서 해탈에 다다를 수 있다.


즉, 불교는 고통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집착을 버리면 고통은 더 이상 나를 옭아매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는 고통을 삶의 일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태도의 전환’을 강조한다.






2. 서구 실존주의의 시선 – 불안과 부조리



20세기의 서구. 두 차례의 세계대전, 전체주의의 광기, 기술 문명의 폭주 속에서 인간은 또 다른 방식의 고통을 마주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았다”고 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지만, 그 자유 때문에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고, 선택의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그 책임의 무게가 곧 불안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카뮈는 “인생은 부조리하다”고 단언했다. 인간은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이 간극, 즉 ‘부조리’가 인간 고통의 근본적 조건이다.


실존주의자들에게 고통은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데 있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바위를 굴려 올리지만 다시 굴러 떨어지는 무의미한 노동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웃음을 짓고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3. 두 전통의 대비 – 버림 vs 끌어안음



불교와 실존주의는 모두 고통을 삶의 본질적 조건으로 본다. 그러나 태도는 다르다.


- 불교: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으니, 그것을 버려라. 내려놓음과 무집착 속에서 해탈이 있다.

- 실존주의: 고통은 피할 수 없으니, 그것을 끌어안아라. 오히려 고통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라.


이 대비는 동서양의 문화적 맥락 차이를 반영한다. 인도와 동양은 조화와 초월, 내적 평화를 강조했고, 서구는 개별적 주체성과 의미 창조를 중시했다. 그러나 두 전통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바로 ‘고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4. 청년 세대와의 연결



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고통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단지 그 얼굴이 변했을 뿐이다.

경쟁과 취업난, 불안정한 노동 구조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집착의 고리’와 닮아 있다. 스펙, 돈, 지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불안을 낳는다.

동시에 SNS 비교 문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실존주의적 부조리의 상황을 재현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사회는 침묵하고, 구조는 응답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와 실존주의의 교훈은 오늘의 청년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내려놓음의 지혜와 의미 창조의 용기라는 두 길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불교의 철학적 해법 – 집착과 해탈




“삶은 고(苦)다.”
붓다가 처음 설한 가르침은 인간의 실존을 너무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미래에 대한 불안, 늙음과 병듦, 죽음은 인간을 비켜가지 않는다. 불교는 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고통의 근원을 분석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1. 고통의 원인 – 집착(執着)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핵심 원인은 집착이다. 단순히 물질에 대한 욕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비교와 경쟁 속에서 이기고자 하는 마음, ‘내 것’이라 붙잡으려는 마음 모두가 집착이다.


예를 들어, 청년 세대가 겪는 스펙 경쟁을 보자. 더 많은 자격증, 더 높은 학벌, 더 화려한 이력을 얻기 위해 애쓰지만, 이 욕망은 끝이 없다. 잠시 성취를 거두면 만족할 것 같지만, 곧 더 큰 불안이 찾아온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다른 사람은 더 앞서 나간다.” 결국 집착은 기쁨을 주는 듯하지만, 곧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붓다는 이를 ‘갈애(渴愛, tanhā)’라고 불렀다. 마치 갈증처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목마른 자가 물을 들이켜도 갈증은 곧 돌아오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충족의 순간에도 새로운 결핍을 낳는다. 고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2. 고통의 멸(滅) – 해탈의 가능성



그러나 불교는 고통을 단순한 숙명으로 보지 않는다. 고통은 멸할 수 있다. 그것이 곧 해탈(解脫)이다. 해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은둔이 아니다. 집착의 뿌리를 끊어내어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상태다.


팔정도(八正道)는 그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올바른 견해(正見)와 사유(正思惟)로 세상을 바라보고,

올바른 말(正語)과 행동(正業)으로 타인과 관계 맺으며,

올바른 생활(正命)로 삶을 유지하고,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올바른 집중(正定)을 통해 내면을 단련한다.


이 길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깨달음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작은 습관과 태도를 전환하는 지속적인 실천이다.


현대 청년들에게 이 해탈은 어떻게 다가올까? 예를 들어, SNS 속 비교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좋아요’ 숫자나 팔로워 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진짜 관계, 진짜 자기 성장에 집중할 때 비로소 해탈의 실천은 가능해진다. 불교는 이렇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 수행을 삶의 지혜로 제안한다.






3. 고통을 다시 보는 눈 –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불교의 철학적 해법은 단순히 고통을 없애려는 기술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 무상(無常): 세상 만물은 변한다. 지금의 불행도, 지금의 행복도 영원하지 않다. 따라서 지나친 집착은 무의미하다.

- 무아(無我): ‘나’라는 것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내가 집착하는 지위, 소유, 관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조건의 산물일 뿐이다.


무상과 무아를 이해하면 고통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실패나 상실은 절대적 불행이 아니라, 변화를 통한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읽힌다. 청년이 한 번의 취업 실패로 좌절할 필요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며, 영원한 낙인이 아니라 순간의 흐름이다.






4. 청년 세대의 삶과 불교의 교훈



오늘날 청년들은 불교가 가르친 집착과 고통의 메커니즘을 너무도 생생히 경험한다.


- 경쟁 사회: ‘더 가져야 한다’는 집착은 끝없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 SNS 문화: 타인과의 비교는 행복을 빼앗고, 자기 자신을 ‘상품화’하는 집착으로 변질된다.

- 미래 불안: 안정된 직업, 경제적 기반에 대한 집착은 청년을 끊임없이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때 불교는 “버려라”라고 말한다. 단,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자유를 얻기 위한 내려놓음이다. 집착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덜 흔들리고, 삶의 작은 기쁨을 더 선명히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생활 태도는 불교적 해탈의 현대적 변용으로 볼 수 있다. 거대한 성취 대신, 일상의 평온과 관계의 따뜻함 속에서 행복을 찾는 태도는 집착을 줄이고 고통을 완화하는 실천이다.






5. 버림의 철학이 주는 힘



불교의 집착과 해탈의 철학은 결국 삶의 태도를 바꾸라는 메시지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집착에서 벗어나라.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신을 잃지 말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상을 받아들여라.


이 태도는 고통을 없애는 마법이 아니라, 고통을 다루는 새로운 힘을 준다. 청년 세대가 지금의 불확실성과 경쟁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내적 자원이다.






정리



불교의 철학적 해법은 단순히 “고통을 참아라”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새로운 자유를 얻는 길이다. 해탈은 산속의 고행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조금 덜 집착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다.


오늘의 청년에게 이 메시지는 낡은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과 과잉 경쟁 속에서, 집착이 아닌 자유의 길을 열어주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적 제안이다.









서구 실존주의의 해법 – 무의미 속의 의미 창조




“삶은 부조리하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매일같이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리지만,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지고, 그는 다시 그 돌을 올려야 하는 끝없는 반복. 이것이 인간 실존의 은유라고 보았다. 우리는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죽음을 피할 수도 없다. 그 사이의 삶은 끊임없는 불확실성과 모순으로 가득하다. 이 부조리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고통과 무의미를 ‘피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는 데서 새로운 자유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불교가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해탈을 강조했다면, 서구 실존주의는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1. 사르트르 – 자유와 책임의 무게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강요당한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은 본질이 정해져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위대해 보이지만, 동시에 무겁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청년이 전공을 선택할 때, 직업을 고를 때, 혹은 사랑을 결정할 때조차도 그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주체다. 아무도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내가 뭘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체념을 말한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진다. “네 삶은 네가 만든다. 의미는 주어지지 않고, 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적 삶은 곧 끊임없는 자기 창조의 과정이다.






2. 카뮈 – 부조리 속에서의 반항



카뮈는 인간이 부조리한 조건 속에 던져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삶의 태도로 제시했다.


『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돌은 반드시 굴러 떨어지지만, 시지프는 그 사실을 알고도 돌을 올린다. 그 순간 그는 부조리를 깨닫고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을 증명한다.


청년 세대에게 이 메시지는 낯설지 않다. 입시와 취업, 반복되는 경쟁의 굴레는 마치 돌을 올리는 끝없는 수고 같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웃고, 사랑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순간, 청년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된다. 카뮈는 바로 이 반항의 태도를 인간의 자유라고 보았다.






3. 하이데거 – 죽음을 향한 존재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은 진지해진다고 보았다. 죽음을 외면하면 삶은 피상적인 쾌락이나 타인의 기대에 종속되지만,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여기의 삶을 더 깊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년들이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겪으며 “내 삶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은 단순한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경험은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하이데거적 관점에서, 죽음의 의식은 삶을 소모가 아니라 주체적 선택의 기회로 바꾼다.






4. 청년 세대와 실존적 조건



오늘날 청년 세대는 불교의 고통과 집착의 가르침만큼이나, 실존주의적 조건을 강렬히 느낀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내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회의.

끝없는 경쟁과 탈락 속에서 느끼는 허무.

AI와 자동화 시대,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가?”라는 실존적 불안.


이때 실존주의는 외친다. “삶은 본래 의미가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너는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청년에게 이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다.


예를 들어, 취업에 실패한 청년이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비영리 프로젝트에 뛰어드는 것은 실존주의적 선택이다. 정해진 본질이 없기에, 실패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자기 창조의 계기가 된다.






5. 무의미 속에서의 의미 창조



불교가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집착을 버림’에서 찾았다면, 실존주의는 ‘무의미를 인식한 뒤 의미를 창조함’에 무게를 둔다. 두 길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을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과 실천의 주체로 세운다.


청년 세대에게 이는 중요한 통찰이다. 삶은 불합리하고,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을 통해 책임지고, 그 책임 속에서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정리



서구 실존주의의 해법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청년들이 매일 맞닥뜨리는 현실적 문제에 직접 닿아 있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자유는 우리를 외롭게 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이다.

카뮈가 강조했듯, 부조리를 깨달으면서도 반항할 때 인간은 존엄하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죽음을 직시할 때 삶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청년이 직면한 불확실성과 허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무의미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토론 장면 재현 – 불교와 실존주의의 대화





서울의 한 대학 강당. “청년과 철학의 만남”이라는 포럼이 열렸다. 무대 위에는 상징적으로 두 철학의 대표가 앉아 있다. 한쪽에는 수수한 승복을 입은 불교의 스승, 다른 한쪽에는 검은 양복 차림의 실존주의 철학자. 객석에는 대학생과 청년들이 빼곡히 앉아, 노트북과 휴대폰을 켠 채로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다.


사회자가 묻는다.
“오늘의 주제는 고통, 집착, 자유입니다. 불교와 실존주의, 두 전통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현대 청년들의 고민을 함께 비출 수 있을까요?”






1. 불교의 발언 – 집착에서 벗어날 때 오는 자유



불교 스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생은 본래 고(苦)입니다. 청년 여러분도 느낄 겁니다. 입시와 취업, 연애와 인간관계, 심지어 자기계발조차 고통의 연속이지요. 그러나 이 고통의 근원은 외부가 아닙니다.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깁니다. 성적에 집착하고, 안정된 직장에 집착하고, SNS의 ‘좋아요’ 숫자에 집착할 때 마음은 흔들리고 괴로워집니다. 자유는 결코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집착을 내려놓을 때, 마음은 해탈하고 고통은 사라집니다.”


청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학업과 취업에 지친 이들의 눈에, 그 말은 위로처럼 다가왔다.






2. 실존주의자의 반론 – 무의미 속에서도 의미를 창조해야



실존주의 철학자가 곧장 맞받아쳤다.
“스승님 말씀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인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내려놓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청년이 ‘나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현실의 불안정한 고용 시장이나 경쟁 사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고통은 우리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카뮈가 말했듯, 시지프는 돌을 끝없이 올려야 하는 부조리 속에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돌을 올리는 그 순간,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지요. 집착을 버리라는 말씀은 공감을 얻지만,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라’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3. 대화의 교차 – ‘내려놓음’과 ‘창조’



불교 스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대 말도 옳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창조하려는 노력 또한 집착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더 큰 성취, 더 높은 의미, 더 완벽한 자아를 만들겠다는 욕망이 결국 또 다른 고통을 낳지 않겠습니까?”


실존주의자가 잠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성취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집착은 타인의 기대에 매달리는 것이지만, 의미 창조는 자기 선택에 충실한 태도입니다. 청년이 의사가 되든, 예술가가 되든, 실패하든 성공하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길이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선택의 무게가 삶의 의미를 만듭니다.”


청년들의 표정은 점점 진지해졌다. 그들 앞에서 두 철학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강조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4. 청년의 질문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객석에서 한 청년이 손을 들었다.
“저는 늘 불안합니다.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시고,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습니다. 불교는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하고, 실존주의는 의미를 창조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불교 스승이 답했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실패가 아닐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기대, 사회의 기준에 집착하기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 먼저 그 집착을 내려놓아라. 그 순간 네 마음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그 마음으로 스스로 선택하라.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너의 삶이다. 타인이 강요한 길이 아니라, 네가 만든 길이다. 의미는 거기서 태어난다.”


강당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청년들의 눈빛은 흔들리면서도 깊어졌다.






5. 토론의 정리 – 공통의 지점



사회자가 대화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두 철학은 출발은 다르지만, 공통의 지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를 강조하고, 실존주의는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자기 선택을 통한 의미 창조를 말합니다. 결국 두 길은 청년들이 외부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불교 스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고통은 적이 아닙니다. 고통은 스승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스승이 가르치는 교훈은, 결국 우리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지요.”


청년들은 박수를 보냈다. 단순한 철학 강연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룬 대화였기 때문이다.






정리



이 토론 장면은 불교와 실존주의의 만남을 단순한 추상적 철학이 아니라, 청년들이 살아가는 구체적 조건 속으로 끌어내려 놓았다.


- 불교는 내려놓음을 통해 자유를 제시했다.

- 실존주의는 창조를 통해 의미를 제시했다.

- 청년의 삶은 이 두 가지 길의 교차점에서 더욱 깊은 고민과 선택을 요구받는다.


결국, 두 철학이 던진 메시지는 하나였다. “너의 삶은 네 것이며, 그 자유 속에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선택하라.”










실제 사례 분석 – 고통, 집착, 자유를 둘러싼 현대 청년의 삶




1. 입시와 취업의 늪 – ‘자격증’과 ‘스펙’에 집착하는 사회



한국의 청년들이 가장 먼저 경험하는 고통은 입시와 취업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지는 성적 경쟁은 대학 입시를 넘어 취업 시장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학점, 어학 점수, 자격증, 대외활동 등 이른바 스펙 경쟁은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한 방어막’으로 작동한다.


어느 대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공부보다 이력서에 채울 활동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아요.”


이는 불교가 말하는 집착의 구조와 닮아 있다. 타인의 인정과 제도의 요구에 매달리면서, 청년들은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린다. 합격증이라는 결과물에 집착하는 동안, 배움 자체의 즐거움은 잊히고, 삶은 끝없는 경쟁의 무대로 전락한다.






2. SNS와 비교의 덫 – 타인의 삶에 갇힌 자유



또 다른 고통은 SNS 문화에서 비롯된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보여지는 또래의 ‘성공 사례’, ‘여행 사진’, ‘자기계발 스토리’는 청년들에게 끝없는 비교와 열등감을 불러온다.


“친구가 스타트업을 창업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 일상이 너무 초라해 보여요.”


이러한 심리는 실존주의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자기 삶을 선택하기보다 타인의 삶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부조리라 할 수 있다. 자유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선택에 충실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데, SNS는 오히려 그 자유를 빼앗는 장치로 기능한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집착(執着)의 현대적 변형이며, 실존주의적 시각에서는 타인의 시선에 갇힌 불자유다.






3. 청년 정신 건강 문제 – 고통이 곧 존재의 조건



청년 세대의 고통은 단순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청년층의 우울증과 불안 장애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자살률 또한 OECD 국가 중 최상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고통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삶의 일부로 직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불교는 “고통은 깨달음의 문”이라고 말한다. 실존주의는 “고통은 인간이 자유롭다는 증거”라고 본다. 두 관점 모두, 고통을 단순히 제거할 수 없는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다른 태도를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4. 실제 운동과 시도 – 탈집착과 의미 창조의 길



청년들 사이에서 이미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 미니멀리즘: 집착을 줄이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는 생활 방식은 불교적 ‘무소유’와 통한다. 불필요한 경쟁과 과잉소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 청년 창업과 대안적 커리어: 남들이 원하는 길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겠다는 선언은 실존주의적 의미 창조의 실천이다. 실패의 위험이 크지만, 자유롭게 선택한 길은 오히려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한다.

- 청년 시민운동: 기후 위기 대응 시위, 젠더 평등 운동 등은 개인적 이익을 넘어 ‘함께 사는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다. 이는 불교의 자비와 실존주의적 연대 정신을 동시에 반영한다.






5. 정리 – 고통, 집착, 자유는 청년의 일상 속 문제



결국 고통, 집착, 자유는 추상적인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청년의 일상, 대학의 강의실, SNS의 피드, 취업 준비 서류 속에서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다.

불교적 시각은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유에 다가가라”는 메시지를,

실존주의적 시각은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두 철학은 다르지만, 청년 세대의 고통을 단순히 ‘피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삶의 태도를 만들어내는 출발점으로 본다는 점에서 만난다.











동서양 철학이 청년 세대에 주는 통찰




1. 불교와 실존주의의 공통된 출발점 – 고통을 직시하라



불교와 실존주의는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났지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첫걸음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두 철학 모두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불교는 “인생은 곧 고(苦)”라고 하며, 집착과 무지가 그 근원이라고 본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며, 불안과 무의미는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이 출발점은 청년 세대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끝없는 경쟁 속에서 고통을 ‘예외적 실패’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두 철학은 고통이 결코 예외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누구나 겪어야 할 존재의 조건임을 알려준다. 이는 청년 세대가 자기 고통을 개인적 무능으로 치부하지 않고, 삶의 보편적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데 큰 힘이 된다.






2. 해법의 차이 – 내려놓음 vs 창조



그러나 불교와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해법은 다르다.


- 불교는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고통을 줄이고, 해탈에 이르러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욕망과 집착이 줄어드는 만큼 마음은 평온해지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

- 실존주의는 새로운 의미 창조를 강조한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청년 세대에게 이 차이는 중요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어떤 이는 불교적 태도처럼 불필요한 집착을 줄이고, 단순하고 평온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또 다른 이는 실존주의적 태도처럼 불확실성과 불안을 껴안으면서도 자기만의 프로젝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3. 동서양의 접점 – 고통을 삶의 자산으로 전환하기



흥미로운 점은 두 철학이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불교가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를 찾는다면, 실존주의는 고통을 끌어안고 의미로 전환함으로써 자유를 확보한다.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두 철학 모두 고통을 단순히 제거하거나 회피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태도와 자유로 가는 길로 본다는 점에서 만난다.


이 지점에서 청년 세대는 ‘고통을 삶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다. 고통을 경험한 만큼 성찰의 깊이는 커지고, 불안을 마주한 만큼 자기만의 의미를 창조할 기회도 넓어진다.






4. 청년 세대의 실천적 과제



이 철학적 통찰은 청년 세대가 일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실천적 방향으로 이어진다.


- 불교적 길: 소비를 줄이고, 불필요한 비교에서 벗어나며, 삶을 단순화하는 것. 이는 고통을 줄이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온다.

- 실존주의적 길: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고, 실패와 불안을 회피하지 않으며, 자기 선택에 책임지는 것. 이는 고통을 의미로 바꾸어 준다.


둘 중 어느 길을 택하든,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주체로 서는 태도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그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활용할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5. 정리 – 두 철학이 주는 균형의 메시지



결국 불교와 실존주의는 청년 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균형의 메시지를 건넨다.


- 고통은 피할 수 없으나, 그것을 내려놓음으로 자유로워질 수도 있고, 끌어안음으로 의미를 창조할 수도 있다.

- 두 길 모두 청년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필요한 철학적 자산이다.


즉, 청년 세대는 불교적 지혜와 실존주의적 용기를 동시에 품을 때, 고통을 새로운 자유와 성찰의 계기로 전환할 수 있다.











결론 및 성찰 – 청년 세대가 선택해야 할 최종 질문





청년 세대의 삶을 바라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끊임없는 불안과 선택의 압박이다. “이 길이 옳은가?”, “내가 잘하고 있는가?”, “미래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그들의 일상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불교와 서구 실존주의가 각각 다른 길을 제시했지만, 두 사상 모두 결국 이 질문으로 수렴한다. “고통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찾을 것인가?”






1. 내려놓음과 창조, 두 길의 교차점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집착을 버리고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찾는 길이었다. 이는 과도한 비교와 경쟁 속에서 지친 청년들에게 “모든 것을 다 가질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반대로 실존주의는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무의미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용기를 요구한다.


서로 다른 해법 같지만, 사실 두 길은 교차한다. 불교의 내려놓음은 자유의 내적 조건을 열어주고, 실존주의의 창조는 그 자유를 외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이다. 결국 청년 세대가 진정한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이 두 태도를 모두 배워야 한다.






2. 청년 세대가 마주한 현실



현대 청년들의 삶은 불교와 실존주의가 지적한 인간 조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취업 시장에서의 경쟁은 집착과 불안을 동시에 자극한다.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은 불교적 집착의 또 다른 이름이다.

- SNS 문화는 비교와 불안의 무대를 만든다. 타인의 성공과 성취가 늘 눈앞에 펼쳐지면서, 청년들은 끊임없이 자기 삶의 무의미를 경험한다.

- 기후 위기, 전쟁, 불평등 같은 전 지구적 문제는 개인의 선택을 넘어선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실존주의가 말한 “던져진 존재의 불안”과 닮아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도망칠 수도, 무작정 버틸 수도 없다. 그들은 결국 철학적 태도를 배워야 한다.






3. 청년이 던져야 할 최종 질문



이제 남는 것은 질문이다. 청년 세대가 자기 삶의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1. 나는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불필요한 비교와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삶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2. 나는 무엇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가?

무의미 속에서 주어진 조건을 탓하기보다, 그 조건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3. 자유란 무엇인가?

단순히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삶에 책임질 수 있는 태도가 자유의 진정한 의미임을 성찰해야 한다.






4. 철학이 남기는 교훈



철학은 완성된 답을 주지 않는다. 불교도, 실존주의도 각자의 해법을 내놓았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은 우리에게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청년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능력이다.

불교의 질문: “그대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실존주의의 질문: “그대는 그 불안을 어떤 의미로 바꿀 것인가?”


이 두 물음을 결합할 때, 청년은 고통을 단순한 짐이 아니라 자기 삶을 다시 설계하는 자산으로 바꿀 수 있다.






5. 마무리 – 질문으로 남는 자유



결국 이 회차의 결론은 단순하다. 청년 세대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을 직시하고, 내려놓으며, 의미로 전환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최종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고통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자유와 의미로 바꾸어낼 것인가?”


이 질문을 붙잡는 순간, 청년 세대는 더 이상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철학자가 된다. 고통은 그들에게 짐이 아니라, 자유로 가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동서양의 철학은 청년 세대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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