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Nov 09. 2016

최순실 게이트로 본 지식인의 길

한국 지식인들이 향하는 곳은?

시절이 시절인 만큼 심란한 마음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절이 이렇게 된 데는 지식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작금의 사태는 최순실 개인과 그에 휘둘린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최씨일가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는 70년대부터 드러나 있었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들 역시 계속 존재해왔습니다.


그런 경고와 징후들을 무시하고 그녀를 권력의 정점에 세운 것은 이 나라의 지식인들입니다.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지식인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일차적인 책임은 이토록 문제 많은 이를 대통령으로 세운 새OO당과 일부 언론, 그리고 대기업들에 있겠죠. 


하지만 나쁜 것은 그들만일까요? 양비론을 펴거나 모두까기 인형..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의 적을 설정하고 그 적에게 온갖 악마적 이미지를 투영하여 그 적을 제거하는 것이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겁니다.


새OO당 의원들은 모두 악마일까요? 조O일보나 삼O에는 악마들만 있을까요? 거기 있는 사람들도 '사람'입니다. 나와 다를 바 없는. 물론 그들이 잘했다거나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관건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왜 그런 판단을 했을까?'라는 것이죠.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권을 바꾸고 특정 언론의 문을 닫거나 대기업을 해체하는 일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또 똑같은 사람들이 나타날 테니까요.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 지식인들의 문화적 동기(motivation)'에 대한 부분입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동기 아래에서 나고 자랐으며 꿈을 키웠습니다. 각자의 이상과 철학에 따라 다른 길을 택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문화가 강제하는 이 동기에서 자유로운 지식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 동기, 한국의 지식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후의 목표는 바로 '권력'입니다.


학창시절에 코피쏟아가며 공부해서 도달한 지위에서 지식인들은 권력을 꿈꿉니다. 만인에게 평등해야 할 법의 수호자 검사는 권력에 반하는 이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타인의 생명을 살려야 할 의사는 권력을 위해 의사로서의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진리 앞에 정직해야 할 학자는 권력 앞에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을 팽개친지 오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펜을 들어야 기자는 권력을 위해 펜을 굽힙니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대학생은 자신이 맞서 싸웠던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었고, 사회의 모순과 자본의 횡포를 외치던 젊은이는 대기업의 충실한 부속품이 되었습니다.

박종철 열사가 목숨으로 지켰던 선배, 박종운


지금도 흙수저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며 불평등한 현실에 한숨짓는 수많은 청년들이 각종 고시에 목숨을 거는 것은, 그들의 현실인식과는 별개로 이러한 동기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흙수저들의 현실은 더 나아질까요?



한국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동기는 조선시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습니다. 선비는 성현의 가르침을 좇아 현실에서 태평성대를 이루려는 이들입니다. 왕부터가 선비였으며 왕의 업무 중 상당 부분이 공부와 경연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조선은 플라톤이 그토록 꿈꿨던 '철인정치'를 구현한 나라였던 것이죠.


선비들이 관직에 오르는 방법은 학문이었으며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위해 지식을 갈고 닦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즉, 조선에서 선비(지식인)는 곧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이 한국 지식인들이 서구의 지식인들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입니다. 


왕과 귀족에게 봉사하는 법률가,의사, 서기 등 '성 안 사람들(브루주아)'에서 출발한 서구의 지식인 계층의 정체성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였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근세 유럽의 시민혁명은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왕권 신수설과 혈통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왕과 귀족이 아닌 시민들에게 권력이 주어지는 시민사회를 설계했던 것이죠.


한국의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권력을 향했습니다.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철학자가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철인정치는 이상(理想)입니다. 세종조와 같이 조선의 철인정치가 잘 작동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권력을 쥔 선비들은 곧 권력을 지키는 일에 몰두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이상은 빛을 잃어갔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지식인 개개인들이 타락했다기보다는, 권력에 굴복하는 지식인들이 성공하는 세태가 지속되면서 공공의 선(善)보다 개인적 이익을 따르게 되는 동기체계가 고착되어갔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성공을 위해 공부를 합니다. 남들보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인 것입니다. 돈 벌어 성공하고 이름을 얻게 되면 반드시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나와도 그 길은 하나로 수렴됩니다. 바로 권력이죠. 이것이 우리의 문화적 동기입니다.

본 글은 특정 인물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회가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안전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지식인들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나라를 그려도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소수의 지식인들이기 때문이죠.


권력과 시스템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민들의 역할도 물론 필요합니다만 그 전에 제대로 된 시스템을 구축하고 구동시키는 것은 지식인(관료,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이 공공의 선이 아닌 개인적 이익을 위해 동기화될 때, 국가의 시스템은 망가지고 그 안의 구성원들은 오로지 권력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결과들입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개인의 성공보다 공공의 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 혼자 잘 사는 것보다 모두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때로는 나의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동기가 바뀌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될지 모릅니다. 배움과 권력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그대로라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대도 권력 앞에 정의를 저버리는 인물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가서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한탄하며 '속고 또 속는' 국민들을 탓하시겠습니까.


촛불을 들고 자유발언대 앞에 선 중고생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이 학생들이 자라서 만들어갈 대한민국은 

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곳이길 기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글날의 짧은 소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