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Nov 20. 2016

촛불, 그 신명의 현장

촛불집회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분석

매주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섰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개입된 초유의 국정농단과 헌정파괴에 분노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평화적이었습니다. 주요 외신에서도 '축제'라고 언급한 우리의 촛불집회. 촛불이 축제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신명 연구자입니다. 신명은 제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였고 2권의 책도 썼습니다. 저는 11월 12일 광화문에 있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신명이었습니다. 촛불집회는 신명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고개를 갸웃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신명은 아주 즐거울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권력에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거리에 섰던 것이 아니었던가.. 라는 생각이실 겁니다. 하지만 즐거울 때 느끼는 신명이 신명의 전부는 아닙니다.


신명은 한국인들의 문화적 정서이자 동기입니다. 우리는 아주 좋거나 즐거울 때 '신난다', '신바람난다', '신명난다'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신', '신바람', '신명'은 신(神)을 뜻합니다. 신이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이 샘솟으며 평범했던 세상이 아주 아름답게 느껴지는데요. 그러한 기분이 마치 신이 내 몸에 들어온 것 같다는 표현이지요.


이 신명은 한국인들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동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한국인들은 신이 나야 만족하고 신명을 끌어올리고 풀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는 일에 신바람이 날 때 한국인들은 살 맛이 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한국인의 행복이죠.


신명을 느끼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가치' 때문입니다. 한국인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요. 이는 평소에 높은 '자존심'으로 유지됩니다. 그러나 이 높은 자기가치감에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심리적 충격은 매우 클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상처가 오래 지속되면 '화병'이나 '한(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손상된 자신의 가치가 회복되거나 자신의 가치를 잘 드러낼 때, 한국인들은 신이 납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의 감정이 그런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는 2002년 월드컵을 떠올리실 수 있습니다. 2002년 전까지 한국축구는 세계축구의 변방이었습니다. 수 차례 월드컵에 진출하긴 했지만 조별리그 통과는 커녕 첫승조차 올리지 못했죠.


그러나 2002년에는 달랐습니다. 폴란드와의 첫게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린 한국대표팀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세계축구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습니다. 한국축구의 승리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2002년의 추억입니다.

2002년의 열광이 신명이었던 것은 한국축구의 선전이 상처입었던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그 가치를 만방에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오랫동안 축구뿐만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세계의 변방이었습니다. 특히 서구 선진국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은 매번 우리의 발목을 잡았었지요. 월드컵 4강 진출은 그러한 열등감을 씻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폭발시킨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신감을 즐기고 함께한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함께 한 그 경험을 통해서 월드컵 4강이라는 축구의 성취는 한국인의 문화적, 심리적 성취가 되었습니다. 질곡 가득한 현대사를 거치며 잊혀졌던 한국인의 신명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최근의 촛불집회는 어떻게 신명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요? 촛불집회와 월드컵 응원의 공통점은 광화문 광장에 모인 수백만의 인파뿐만은 아닙니다. 첫째, 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은 신명을 되찾기 위해 거리에 섰습니다. 


신명은 즐거울 때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미치도록 신명을 내고 싶을 때 사람들은 신명을 위한 행위들을 시작합니다. 문화심리학자로서, 이러한 행위양식은 집단무의식적 차원에서 문화적으로 프로그램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을 경험해 봤던 사람들이 다시 신명을 내기 위해 신명을 경험했던 맥락을 재연하려 하는 것이죠. 그렇게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한국인들이 느끼는 감정을 요약하면 '쪽팔림'입니다. 조금 고급진 표현으로 '자존심이 상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헬조선이 되었다고 해도 한국인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전후의 황무지에서 세계 10대 무역대국을 이뤄냈고,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며 민주주의를 일궈냈습니다. 밖으로는 스포츠와 한류가 한국의 문화적 잠재력을 드러내 주고 있었습니다. 

박근혜 게이트는 이러한 그 동안의 자부심을 한순간에 날려버렸습니다. 오랫동안 철통같았던 30% 지지율이 무너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루빨리 이 상처입은 자존심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죠. 제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자존심은 한국인들의 멘탈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촛불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신명은 '표현'을 통해 느껴집니다. 문화심리학에서 보는 한국문화는 표출형 문화입니다. 일본문화가 억제형 문화인 것과 대비되는 특징이죠. 한국문화가 표출형 문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정신질환이 화병(Hwabyung)이라는 점입니다. 


화병은 속에 있는 말이나 감정을 표현 못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죠. 억제형 문화인 일본인들의 문화적 정신병이 대인공포증(Taijinkyohoshu)인 것에 비교하면 한국인들이 자신의 기분이나 생각을 표현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거리에서 제가 목격한 촛불집회는 모여든 사람들 만큼이나 다양한 표현의 장이었습니다. 목청껏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하는 사람들, 자유발언대에 선 연령과 계층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 어느새 거리에 자리잡은 노점상 앞에서 거리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 사람들은 지난 3년 9개월 동안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생각들을 거리에 풀어놓고 있었습니다.


셋째, 이 표현의 과정에는 파격이 나타납니다. 자신만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인데요. 특히 자기표현을 억압했던 대상들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그것입니다. 풍자는 권위자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희화화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죠. 해학은 이러한 상황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그간의 고난과 고통을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시국에서 놀랄만큼 다양한 풍자와 해학을 목격하는 중입니다. 괜히 우리를 풍자와 해학의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죠. 풍자와 해학에서 비롯된 웃음은 여러 사람이 신명에 공감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줍니다. 

또한 촛불집회를 장식한 새로운 종류의 깃발들, 즉 '장수풍뎅이 연구회'나 '전견련', '민주묘총' 등의 재기넘치는 깃발들은 엄숙하고 투쟁적이었던 과거의 집회문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투쟁과 운동의 주체가 조직과 단체에서 개별 시민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넷째, 신명은 공감 또는 공경험의 과정을 통해 모두의 것이 됩니다. 공감은 대표적인 한국인들의 상호작용 방식인데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느낌이나 생각을 읽는 데 익숙하며 그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과 소통합니다. 2002년의 기억을 가진 분들은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우리가 함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밤새 뛰어오르기 위해서는 누구의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마음이었던 것이죠.


2016년 11월의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구호를 선창하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받습니다. 한 마음으로 비폭력을 외치고 대치한 경찰들에게까지 '국민의 한사람'임을 강조한 사람들에게서, 가수의 노래에 떼창으로 화답한 사람들에게서, 집회를 마친 후에도 끝까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에게서 '함께 함'을 느꼈습니다. 

상처입은 자기가치의 회복에 대한 강한 열망, 거침없이 드러나는 자유로운 표현, 가감없는 풍자와 해학, 그리고 전국의 거리에 섰던 100만명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서 집회의 상황을 지켜보며 응원과 감사의 댓글을 올리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하나 됨'. 이것이 신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권의 잘못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광장이 신명의 한마당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식이 그만큼 성숙하고 아름다운 집회문화를 가졌다는 것 외에도 더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더 큰 신명에 대한 욕구가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자존심이 상처입었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의 표현이 제한되었었다는 것이며, 그만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면, 상처받은 자존심이 충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제한되었던 표현이 충분히 표출되기 전까지는, 꽉 막혔던 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지기 전까지 촛불은 계속될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순실 게이트로 본 지식인의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