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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un 05. 2017

신방 엿보기의 유래 (2)

문화의 잠재적 기능 찾기, 두번째 이야기

조선시대가 지나면서 조혼은 차츰 풍습으로 굳어졌습니다. 결혼적령기 총각의 부족이라는 현실적 이유에서 시작된 꼬마신랑과 성숙한 처녀의 조합이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죠. 딱히 총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신랑의 나이는 여전히 어렸던 것입니다. 이런 풍습은 거의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집니다.

1970년 작, 꼬마신랑

자, 여기서 우리 결혼제도의 또 다른 특징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장가간다'는 말에 남아 있는 이 특징은 신랑이 신부 집으로 와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고구려의 서옥제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가가는'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 우리의 일반적인 결혼 풍습이었습니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와서 혼인하고 자녀를 낳아 성년에 이를 때까지 장가, 즉 장인 댁에서 산 다음에 비로소 분가하는 것이죠. 잘 아시는 율곡 이이도 외가인 강릉(오죽헌)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풍습은 조선 중기 이후 점점 사라져 후대에는 혼례만 신부집에서 올리고 며칠 후에 신부가 시집으로 가는 식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여자들이 '시집간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신랑이 다른 동네에서 온다는 것이죠. 이 사실이 왜 중요한가 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입니다. 


자, 신부는 이팔청춘 꽃같은 나이입니다. 양반집 규수가 아닌 담에야 일반 민초들의 딸이 방안에서 글 읽고 수나 놓고 있을 수는 없었겠죠. 삼삼오오 나물도 캐러 가고 논으로 새참도 날랐을 겁니다. 그러면서 소 치고 나무하는 동네의 총각들하고 눈도 맞았을 겁니다. 

나물캐는 처녀들을 쳐다보는 나무하러 가는 총각들..

조선시대에 무슨 연애냐구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아니었냐구요?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유교는 지배계층의 질서였습니다. 유교적 질서가 민초들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녀관계에서도 민초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죠.


해서 동네에는 연인이 되는 처녀총각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들은 솔숲에서 보리밭에서 물레방앗간에서 밀회를 즐기며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Motel Mulebang-a

문제는 당시에 연애와 결혼은 별개였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남녀가 눈 맞는 거야 어떻게 막을 방도가 있었겠습니까만.. 결혼은 집안끼리 이루어지는 일이었다는 것이죠. 뭐 이것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 결혼을 통해 집단의 생존력을 극대화하고자했던 현대 이전의 세계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현상입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한 동네에 연인이 있는데 혼인은 다른 동네에서 온 다른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근데 그게 열 살도 안 된 꼬맹이입니다. 처녀와 사귀었던 마을 총각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것은 노래 '갑돌이와 갑순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은 다들 들어보셨을 이 노래는 우리의 결혼제도, 조혼과 장가, 연애와 결혼이 별개였던 풍습 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혼례날, 많은 연인들이 이별의 눈물을 흘렸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눈물로 서로를 잊을 수만은 없었던 커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리 약조를 하고 기다렸다가 밤에 꼬마신랑이 잠들면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는데요. 이 때 종종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쳐들어 온 신부의 연인이 꼬마신랑을 때려죽이거나, 연인이 올 것을 기다리던 신부가 꼬마신랑을 목졸라 죽이는 일들 말이죠.


사실 가장 잔혹한 범죄가 벌어지는 대표적인 이유에 치정이 있습니다. 남녀의 질투란 그만큼 무서운 것이죠. 나이가 꽉꽉 들어찬 처녀 총각의 힘을 당해내기에 꼬마신랑들은 너무나도 허약한 존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첫날밤에 신랑이 죽어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불상사입니다. 더군다나 신부집이나 신부 동네 입장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저 동네에 장가만 가면 다들 죽어 나온다며..' 따위의 소문이라도 돌기 시작하면 동네가 폐촌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족외혼(族外婚; 다른 집단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하고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이유는 결혼을 통해 비상시에 우리 집단을 도와줄 동맹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집단의 생존력을 끌어올리려는 것이죠. 아무도 우리 동네에 장가를 오지 않는다는 얘기는 곧 우리 동네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신방 엿보기의 잠재적 기능은 '방범'이었던 것입니다. 신부 집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혼례식 이후에도 집에 가지 않고 신부 집 마당에서 놀다가 저녁에는 신방 엿보기를 하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불침번을 섰던 것이죠. 언제 쳐들어올 지 모르는 신부의 애인으로부터 꼬마신랑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옛말에 신방 근처에는 파초나 오동나무 같은 잎이 넓은 나무를 심지 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방문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에 꼬마신랑이 놀라 도망치거나, 신부가 애인이 온 줄 알고 꼬마신랑을 해치는 일을 막기 위해서지요.


여담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행해지고 있는 '신랑 발바닥 때리기' 풍습이 있는데요. 동상례(東床禮)라고도 하는 이 풍습은 신부측 친척들이나 신부 동네의 청년들이 '우리 동네 처녀를 훔쳐간 도둑'을 혼내준다며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것입니다. 

요즘 사진도 꽤 있습디다..

이 풍습의 현시적 기능으로는 신랑의 발바닥에 있는 용천혈(남자한테 좋다는)을 자극하여 첫날밤에 기운을 내도록 해 준다는 설명이 있습니다만, 잠재적 기능은 저 위의 '갑돌이'같은 마을 청년의 울분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 처녀를 훔쳐가는 도둑'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시죠?


집안이 정해준 결혼이니 거부할 수는 없고, 또 사람들이 밤새 지키고 섰으니 신부를 데리고 도망갈 수도 없는 갑돌이들이 내 연인을 데려가는 새신랑을 향해 마지막으로 하는 작은 복수(?)를 하는 것이죠. 때로 그 마음이 지나친 경우에는 발바닥 때리기를 하다가 신랑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ㄷㄷㄷ..



사실 제 설명 역시 하나의 해석일 뿐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과 이유에 의해 신방 엿보기가 생겼다는 증거는 없죠. 하지만 당대의 사회상과 사람들의 욕망, 문화의 관계를 추적해 본 결과 나름 설득력 있는(?) 설이 하나 나왔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잊혀진 문화의 유래를 우리가 굳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재미도 재미이겠습니다만, 지금 존재하는 문화들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걸 도대체 왜 할까 싶은 행위들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이유들이 숨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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