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잠재적 기능 찾기
지금은 없어진 풍습 중에 '신방 엿보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신방, 즉 신혼 부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방을 엿보는 풍습입니다. 요 위에 사진처럼 신방이 차려진 신부네 집 동네 사람들이 방문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는 것이죠.
현대 기준으로 생각하면 엽기적이기까지 한 풍습입니다. 혼인한 남녀의 첫날밤을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했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가 어딥니까. 세상의 모든 문화들을 이해해 보자는 한선생 문화심리학입니다. 어디 모르는 나라의 문화도 아니고 바로 이 땅에서 벌어지던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왜 이런 문화가 생기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간에 전설처럼 떠도는 신방 엿보기는 한 백정 신랑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백정의 아들이 장가를 갔는데 신랑의 어머니는 첫날밤에 '신부를 벗겨야 한다'고 알려주었고, 신부의 어머니는 '아프더라도 참아야 한다'고만 알려주었답니다.
신랑은 벗기라는 말을 늘 하던대로 가죽을 벗기라는 말로 듣고 칼로 신부의 가죽을 벗겼고 신부는 참아야 한다는 말만 듣고 참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신방을 지키는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죠. ㄷㄷㄷ ...
끔찍하고도 슬픈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지요. 문화의 진정한 잠재적 기능은 해당 문화의 구성원들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원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들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제 이전 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98)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문화에는 현시적 기능과 잠재적 기능이 있습니다. 이 문화가 왜 존재하는지 누구나 겉으로 봐서 금방 알 수 있는 이유를 현시적 기능이라고 하고,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문화 구성원들의 생존과 사회 유지에 도움이 되는 기능을 잠재적 기능이라고 하죠.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신방 엿보기는 너무나도 낯선 문화입니다. 현시적 기능을 짐작하기조차 힘들지요. 도대체 남들이 첫날밤을 지내는 것을 왜 들여다 보는 것일까요? 기껏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 옛날에는 에로영화나 야동같은 것들이 없어서 남들이 첫날밤 치르는 것을 보는 것으로 '그런' 욕구를 해소했다는 것 정도일 겁니다.
뭐 그런..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겠지만, 신방 엿보기에서는 사실상 야한 장면을 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첫날밤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첫날밤 신랑과 신부의 성적 결합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옛 결혼제도 '조혼(早婚)'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결혼을 일찍 했는데요. 남녀가 똑같이 일찍 한 것이 아니라 신랑의 나이 7~10세, 신부의 나이 15~18세에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성행위는 남녀가 모두 성적으로 성숙한 뒤에야 가능합니다. 7,8살짜리 꼬맹이가 뭘 했겠습니까.
따라서 신방 엿보기라는 행위는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서 신랑의 나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고여덟살 먹은 남자아이는 남녀관계나 음양의 조화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터닝 메카드나 갖고 놀 나이죠.
그런데 혼인이란 인륜지대사입니다. 아무리 애들이라지만 할 건 해야죠. 적어도 부부는 이런 일들을 하는 사이다..라는 것 정도는 가르쳐줘야 했을 겁니다. 따라서, 신방 엿보기의 일차적 기능, 즉 현시적 기능은 '코칭'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남녀의 성을 모르는 어린 신랑과 신부에게 부부관계가 대략 어떤 순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족두리부터 벗기고.. 그래 그렇지.. 다음은 저고리 고름, 아니 그거 말고.." 이런 식입니다. 옷을 다 벗어도 딱히 할 게 없었기에 짓궂게 문풍지에 구멍을 뚫던 사람들은 신랑이 신부의 겉옷을 벗기고 촛불을 불어 끄면 알아서 방문 앞에서 물러나곤 했습니다. 옛날 사극이나 전설의 고향 같은 데에서 많이 봤던 장면이죠.
그렇다면 신방 엿보기의 진짜 기능, 잠재적 기능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첫날밤에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모가 가르치면 됩니다. 굳이 동네 사람들이 신방 앞에 모여들 이유는 없는 것이죠. 거꾸로, 많은 사람들이 첫날밤 신방 앞에 모여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 여기서는 역사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조혼이 나타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말 조선초로 추정되는데요. 그 이유는 결혼적령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결혼적령기의 남녀 성비가 비슷하다면 굳이 나이 어린 신랑과 나이가 찬 신부를 결혼시킬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혼이 나타나던 시기는 뭔가 결혼 적령기의 총각들은 모자라고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은 꼭 시집을 가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을 겁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런 정황에 꼭 들어맞는 시기가 고려말 조선초입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는 중국에서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던 때였습니다.
원나라와 명나라는 우리나라에게 공녀를 요구했었습니다. 공녀(貢女)란 어린 처녀들(13~16세)을 공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공녀를 보낸 횟수는 고려사에만 50회가 기록돼 있을 정도로 잦았고 한번에 많게는 500명의 처녀들이 끌려갔다고 합니다.
따라서 딸을 가진 부모들의 입장에서 자기 딸이 공녀로 중국에 가는 것을 피하고자 서둘러 결혼을 시키려고 했지만, 때마침 온 나라의 총각들이 씨가 말랐습니다. 고려 말은 원나라가 쇠퇴하여 변방에 군벌들이 일어서고 홍건적, 왜구 등이 창궐했던 때였는데요.
전쟁이 엄청나게 많았던 시기였죠. 전쟁이 많았다는 사실은 전쟁에 나가서 죽은 군인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 적령기의 청년들이 군인으로 나가 많이들 죽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딸들을 결혼시키려고 해도 마땅한 혼처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이 공녀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부모들은 결혼적령기가 되지 않은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딸들을 시집보냈는데요. 그렇게 해서라도 딸들을 근처에 두고 싶었던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조혼이 어린 신랑과 성숙한 신부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이유입니다.
... 그리하여, 음양의 이치를 모르는 꼬마신랑에게 부부의 합궁을 알려주고자 시작된 것이 신방 엿보기라는 풍습이라는 것인데요. 그런데 아직 신방 엿보기의 잠재적 기능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신방 엿보기는 사회 유지와 사람들의 생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번 주제는 내용이 좀 깁니다. 남은 이야기는 2부(?)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