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시대는 끝났다
한국 언론의 신뢰도는 세계 최하위권입니다. 2017년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정치적 이슈에 대한 공정성(27%)과 뉴스 정확도(36%) 면에서 꼴찌를 기록한 그리스(각각 18%, 22%) 바로 다음으로, 조사 대상 38개국 중 37위입니다.
2016년 실시된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조사에서도 한국 언론은 최하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 국내에서 실시된 조사에서도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제강점기 언론의 기상과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투쟁에 도화선이 된 언론의 보도들을 기억합니다.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이렇게까지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터넷 시대 이후 급격히 늘어난 언론사와 기자들로 전반적인 언론의 수준이 떨어졌다는 평가와 민주화 투쟁의 성공(?) 이후 언론이 자만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본질적인 설명은 한국 언론이 시대 변화의 흐름에서 뒤쳐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민들을 우매한 대중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계도해야 한다, 계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공감할 수 없는 보도와 기사를 만들어내고 심지어 가짜뉴스까지 생산하게 되는 것이죠.
우매한 대중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구한말 개화기 무렵입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오랜 쇄국과 늦은 개화로 자강의 기회를 잃었던 조선이 독립하여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조선 민중들이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물론 매국의 길로 나아간 이들도 있고요)
독립신문의 서재필을 비롯, 박은식, 신채호, 양기탁, 장지연 등의 지식인들이 언론을 통해 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당대의 청년 학생, 지식인들은 농촌에서 조직적으로 문맹퇴치, 문화교육 등의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심훈의 <상록수>에 이들의 활동이 잘 묘사되어 있죠.
이러한 생각은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8세기 유럽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달로, 신과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맞이해 가던 상황이었습니다.
칸트 등의 철학자들은 과거의 전통과 권위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새로운 생각에 도전할 것을 요구했고, 루소, 로크, 아담 스미스, 몽테스키외 등 많은 사상가들이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생각들을 펼쳐내던 시기였지요.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 이어지는 구질서의 타파는 이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런데 계몽주의의 결과가 모두 바람직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계몽주의가 '새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흐름이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18세기 유럽은 신 중심의 과거의 질서를 폐기한 대신(신은 죽었다-니체),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를 마련해야 할 강렬한 요구가 있었죠.
그 결과, 수많은 사상가들이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야만 한다는 수많은 모델들을 제시했고 세상은 곧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모델들은 하나의 대안이었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질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8세기 이후의 세계사는 각국이 선택한 새 질서 모델들을 실험하는 장이 되어 버립니다.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민주주의 vs 독재, 제국주의 vs 민족자결주의 등등 각국이 추구했던 새 질서들의 충돌은 세계대전 2차례를 포함한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난리통의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죠.
계몽사상가들은 인류는 과거와의 대립을 통해 발전하며 거기에는 일정한 방향(혹은 법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상에 방향성이나 법칙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문제는
자신이 제안한 방향과 법칙이 아닌 것에는 상당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는 점에 있습니다.
계몽주의의 목적이 과거와 현재의 질서가 아닌 새 질서를 제안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계몽주의 사상가(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자신들만이 보편타당한 역사의 방향과 법칙을 알고 있으며, 이를 모르는 이들은 '우매한 대중'으로서 자신들의 계몽과 계도를 따라야만 보편적인 인류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가장 우악스럽게 나타난 것이 사회진화론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접목시키려 했던 이 이론은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모두 진화의 순서로 서열화하고 전세계를 제국주의 종주국과 식민지로 이분화했습니다.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힌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우수한 이들로부터 끊임없이 계도를 받아 스스로 개조되는 방법 뿐입니다.
네, 이것이 우리나라의 언론이 자신과 시민들을 보는 방식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계몽주의자였던 것입니다. 한국의 계몽주의는 언론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그것이 옳았습니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언론이 미친 긍정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계몽주의의 시대는 언제부터 물러가고 있었을까요?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동안 변화한 사회환경입니다. 물론 현재도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는 대변혁의 시대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계몽주의가 태동하던 18세기의 것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18세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대중들은 18세기의 군중이 아닙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다른 글(군중에 대한 오해https://brunch.co.kr/@onestepculture/149)에 좀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언론 역시 18세기 또는 구한말의 언론이 아니죠. 당시의 언론(지식인)은 당대 지적 수준의 최고 수준에 있던 사람들로 그들이 가진 정보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새 시대를 설계했으며 대중들을 이끌었지요.
그런데 현대의 언론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시대 대중들과 비슷한 지적 능력과 비슷한 정보의 양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18세기가 아니라 21세기 정보화 사회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죠.
자신들만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대중들이 우매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부터 (일부) 언론인들의 엘리트 주의, 선민의식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계몽적 가치를 위한 선별과 편파, 프레이밍, 심지어 가짜뉴스 생성까지 서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계몽주의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했습니다. 언론 신뢰도 세계 꼴찌인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는 길은 언론이 스스로를 시대의 선각자라 믿어 온 특권의식을 버리고 시민들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을 그만두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