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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Nov 28. 2018

불혹(不惑)과 지천명(知天命)의 숨은 뜻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는 것들

불혹, 40세를 이르는 말이다. 공자께서 하신 말씀으로, 나이 40이 되자 더 이상 미혹되는 일이 없었다는(不惑) 뜻이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원칙을 지킬 수 있는 경지가 불혹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 경지가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40세가 넘은 분들은 자문해 보시라. 40이 되니 과연 어떤 일에도 미혹되지 않을 수 있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공자가 아니다. 공자가 누구신가. 예수, 석가와 함께 인류 3대 성인으로 꼽히는 분이 아닌가. 

그런 분이 40년의 공부와 수양으로 이룬 경지를 나이만 40이 됐다고 우리 같은 범인들이 도달할 리 없다. 


그렇다면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공자님과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혹이 나이 40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40이 넘으면서부터는 더 이상 미혹되어서는 안 될 나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나이 40이 되면 대개 커리어에서나 개인적 삶에서나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한다. 직장에서는 서투르던 초년병 시절을 지나 경력이 쌓이면서 중간관리자로 자리매김하고, 개인적으로는 결혼을 하고 어린 아이 한 둘을 기르고 있을 때다.


이쯤 되면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전망이 썩 좋지 않아도 새로운 선택을 하기가 망설여지게 된다. 새 직업을 갖기에는 그간 쌓아온 경력이 아깝고, 새 분야에서 지금처럼 자리를 잡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다. 부부사이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큰 문제가 있지 않는 담에야 사는 게 다 이렇지 싶고 실제로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선택의 여지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40이 넘어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이른바 인생의 귀환불가지점(point of no return)을 지난 셈이다. 배나 비행기는 연료 문제로 되돌아갈 수 있는 한계를 지나면 어쨌거나 애초에 목표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 지점을 귀환불가지점이라 한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나이 40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기에 어딘가에 미혹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칫하다가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마저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진행 중인 노화 때문에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인지적 능력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때에 지금껏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은 만용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자각이 들고나면 남은 것은 이제까지의 삶을 정당화하는 것 뿐이다. ‘그래,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야’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아등바등 한다고 달라질 게 뭐 있어’ ‘어차피 안 될 거 이젠 그만 하자’. 

그렇다. 40은 포기를 배우는 나이다.     


물론 치열했던 2,30대를 살면서 인생에 대해 품어왔던 욕망과 현실의 갈등이 하루아침에 정리될 리는 없다. 레빈슨은 ‘남자가 겪는 인생 사계절’에서 40대 남성은 현재의 자신과 자신이 되고자 꿈꾸었던 인물 사이의 불일치를 잘 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지만, 누구나 이런 종류의 불일치를 잘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이제까지의 내 인생이 실패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준다. 그런 불안이 사그러드는 데는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40대들은 직장에서 구르고 가정에서 깎이면서 웬만한 일에도 미혹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나이 50이 되면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한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50이 넘은 사람들 중에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지가 천명을 안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래서 ‘지천명’이 아닐까.     


지가 천명을 안다는 믿음, ‘어차피 세상은 순리대로 움직이는 거야’.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믿음을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Belief in a Just World)라고 한다. 이 개념을 창안한 멜빈 러너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 세상이 정의롭고 공평한 곳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과 반대되는 너무나 확연한 불의나 부당함과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정당한 세상에 대한 믿음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한 경우 사람들은 믿음을 바꾸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는 쪽으로 인지의 내용을 바꾼다.


누군가 공정한 세상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당하고 있더라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 사람이 그러한 일을 당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범죄 피해자들도 옷을 단정치 못하게 입고 다닌 잘못이 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하게 살아서 그렇다’와 같은 반응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고 세상은 여전히 공정한 채로 남아있게 된다. 사람들이 이러한 인지경향성을 갖는 것은 그 편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덜 피곤하고 시간도 덜 든다. 


또한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은 살면서 일어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들을 받아들이게 해 주는 기능도 있다. 세상 모든 일들이 반드시 공정의 관점에서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착하게만 산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가 하면 최선을 다한 일의 결과가 형편없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내가 잘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진짜 착한 사람이 저런 일을 당할 리는 없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라도 조금은 편해진다. 지각된 통제력을 높여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보수적이 되기 쉽다. 최근 실시된 한 연구에서 정당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사회구조를 바꿔야 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살면서 인생의 단맛과 쓴 맛, 빛과 어둠을 웬만큼 겪었을 50대가 되면 자연히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지게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50대 이상의 보수성이 높은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50을 지천명이라고 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50이 된 나는 천명을 알아야 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늘 정당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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