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법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더 슬프겠지요. 따라서 사랑했던 이들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의 분위기는 당연히 슬퍼야 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장례식장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랫만에 만난 문상객들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 옛이야기에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기도 합니다. 한켠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고 술이 얼큰하게 오른 어르신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죠. 상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상객들과 술 마시고 웃고 떠들다가 때로는 가족친지들끼리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종종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풍경이 몹시 낯선 모양입니다.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들고 음주가무에 도박이라니..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의 장례를 '장례식 같지도 않은 장례식'이라며 천박한 문화라고 비웃습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고인을 기리는 서양의 장례문화를 칭송하면서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장례식은 엄숙하고 슬픈 의식일까요? 그렇지 못한 한국의 장례문화는 미개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십니다.
죽음을 대하는 방법은 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장례식에는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겠지요. 그 중 어떤 것이 우월하고 어떤 것은 열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나에서는 장례에 사진처럼 다채롭고 재미있는 모양의 관을 사용합니다. 고인이 살아생전 좋아하던 물건이나 갖고 싶었던 물건, 해 보고 싶었던 일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들에게 장례식은 축제입니다. 문상객들은 빠른 비트의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춤으로써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고인을 배웅합니다.
인도네시아 토라자 족은 가족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집에 계속 둡니다. 3년에 한번씩 시신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함께 지내는 것이죠. 이들이 고인과 함께 지내는 이유는 이들에게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시신을 새가 뜯어먹도록 두는 티벳의 천장, 미라를 만드는 이집트, 관을 절벽에 매다는 필리핀 사가다 지역의 장례, 시신을 화장한 후 그 재를 수프에 넣어 먹는 야노마모 족.. 등 세상에는 기상천외한 장례문화들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례가 있는 이유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 때문이지요.
그럼,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중국의 역사서, 수서(隋書) 동이전의 고구려조를 보면,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지어 부름으로써 주검을 묘지로 옮겼다는 내용이 전합니다. 악기치고 춤추고 노래를 한다니, 축제와 같은 모습입니다.
고려와 조선을 지나며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민초들에게 있어 장례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라남도 진도는 섬의 특성상 육지에서는 사라진 옛 풍습들이 많이 남아있는데요. 그 중에 '다시래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81호로 지정된 다시래기는 출상, 즉 상여가 나가기 전날 동네 사람들이 상주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놀이인데요. 그 놀이의 스케일과 재담의 수준이 가히 파격적입니다. 예를 들면.. 가짜 상주로 분장한 사람이 제상에 차려진 음식을 함부로 집어먹으며 "이 집에 경사가 났으니 한 판 놀고 가자"로 시작하여..
"방안에서 밥만 축내고 있던 당신 아버지가 죽었으니 얼마나 얼씨구 절씨구 할 일이요"등의 패륜적 대사로 상주를 희롱하고.. 봉사(장님)인 남편을 속이고 중과 불륜을 맺어 아이까지 낳는(사진) 사당의 스토리를 연행한다든가.. 판소리, 잡가, 민요, 북춤, 병신춤 등 신명나는 놀이판이 밤새 이어집니다.
한국에 다시래기 같은 풍습은 더이상 전해져 오지 않지만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요. 지안(아이유 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동훈(이선균 분)의 3형제와 후계동 조기축구회는 아주 떠들썩한 장례식을 연출합니다.
장례식은 북적거려야 한다면서 멀쩡히 살아계신 어머니의 장례식을 걱정했던 큰형 상훈(박호산 분)은 소중히 모아놨던 쌈짓돈 천만원을 털어 평소 안면도 없던 지안 할머니의 장례를 치러줍니다. 덕분에 천애고아였던 지안은 아주 활기 넘치는 분위기에서 할머니와 이별할 수 있었죠.
장례식을 놀이판으로 만드는 이러한 분위기는 예전부터 이어온 한국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줍니다. 죽음은 슬퍼하기만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죽음은 슬픕니다. 그러나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슬픔으로만 일관한다면 남은 이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슬퍼하는 이들을 보면서 고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요? 장례식은 산 사람들을 위한 의식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슬프지만 살아있는 이들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고인과 작별하는 동시에 서로의 살아있음을 확인합니다.
또한 죽음은 한 생명의 마지막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승으로 가건 다시 태어나건 또 다른 뭔가가 시작될 테니까요. 따라서 죽음은 무조건 슬퍼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복해야 할 일이기도 한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다시래기'는 '다시나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웃고 떠들고 술마시고 춤추는 우리의 장례식은 떠나가는 이를 축복하고 남은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떠난 이의 기억과 함께 새롭게 살아갈 이유를 찾는 축제입니다. 지인들이 모여 조용히 고인을 추모하는 서양의 장례식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어수선하고 부조화스러워보이는 우리의 장례식에도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통문화의 맥이 끊기고 삶의 방식이 서구화된 현재, 장례문화조차 서구의 것을 따르게 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오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세월의 흔적들을 폄하하고 부정하는 현실은 멸종위기종 문화심리학자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