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제의(ritual)로서의 고속버스춤
표지 사진은 봉준호 감독의 '마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황혼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무아지경의 춤을 추는 우리의 '어머니들'의 모습인데요. 봉준호 감독은 어렸을 때 본 고속버스춤의 강렬했던 인상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겼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우연히 목격했던 고속버스춤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노는 것일까요? 아니, 왜 이렇게 놀아야 하는 것일까요? 20여년 전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멸종위기종 문화심리학자가 되어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모습입니다만 한국인들의 놀이문화에는 꼭 '춤판'이 등장합니다. 다들 조금씩 살만해졌던 80년대 들어 '관광'은 한국인들의 중요한 놀이문화가 되었습니다.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서 명승지를 찾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관광의 목적은 명승고적의 답사가 아니었습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관광지 입구의 공터에천서 벌어지는 노래와 춤이 관광의 중요한 이유였죠. 정작 관광지에 도착하면 기념사진만 한방 찍고 버스 옆에 쳐놓은 천막으로 돌아와 춤판을 벌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까지 춤판은 계속됩니다. 아니 춤판은 절정에 달합니다. 일과 가족밖에 몰랐던 한국인들에게 '관광'은 한숨돌릴 수 있는 일탈이었습니다. 한치의 아쉬움도 남지 않게 하얗게 불태우는 것. 이것이 고속버스춤의 문화적 의미입니다.
고속버스춤은 대단히 한국적인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 듯 위험한 고속도로에서 몸을 흔들어댑니다. 안전불감증, 천박, 교양없음으로 이해되어왔던 이 낯선 행위의 정체는,
의식, 즉 제의(ritual)입니다.
제의란 어떤 목적을 갖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고속버스춤은 제사나 종교의식처럼 문화적으로 약속된 행위를 하면서 문화적으로 구성된 어떤 기능을 수행해 왔다는 것입니다.
관광버스춤의 중요한 특징은 엄청난 몰입에 있습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시속 100km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춤을 추려면 보통 집중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공간은 좁고 버스는 흔들립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 어려운 것을 해냅니다. 바로 몰입입니다.
몰입은 긍정심리학에서 보통 flow라는 개념을 의미합니다. 어떤 행위를 하면서 물 흐르듯(flow)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상태죠. 그러나 고속버스춤의 몰입은 의도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춤을 추다가 자연스럽게 춤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온몸과 마음을 다해 춤판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음악은 사람들의 이러한 몰입을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휴게소에서 많이 파는 고속도로 메들리의 노래들은 원곡보다 두어배 빠른 박자로 편곡돼 있습니다. 아예 고속버스에서 틀기 위해 작곡되는 노래들은 말할 것도 없죠. 게다가 이 노래들에는 '이히~', '앗싸~', '살리고 살리고~'등의 '추임새'가 함께 녹음되어 있는데요.
추임새는 우리 전통예술의 용어로 음악 사이사이에 들어가 '춤을 추게 만드는 말'을 뜻합니다. '얼씨구 좋다', '잘한다', '지화자' 등이 그 예죠. 추임새는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확인해줍니다. '아, 여기선 춤을 추어도 되는구나'하는 약속된 신호죠. 사람들을 더욱 빨리 그 상황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렇게 몰입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자유로운 표현들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속버스춤의 동작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개개인의 개성이 살아있는 프리스타일, 즉 막춤인데요. 사람들은 자신의 흥에 따라 배운적도 없고 정제되지도 않은 몸짓을 내놓습니다.
현대무용가 안은미씨는 2015년 프랑스 파리의 한 축제에서 한국 아주머니들의 막춤을 주제로 공연을 열었는데요. 춤을 배워본 적 없는 한국 아주머니들의 공연은 평단과 관객의 엄청난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자유로운 표현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죠.
자유로운 표현은 내 감정을 이해하고 드러내는데 도움을 줍니다. 쌓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은 물론,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찾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이러한 감정을 한국인들은 '신명'이라 불렀습니다.
신명은 고운 옷 차려입고 무대에 서는 예술인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은 먹고사느라 뭐 하나 제대로 배울 시간도 없었던 이들의 삶 속에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힘들고 억울한 일 많은 민초들이 삶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끌어올리던 긍정적 에너지가 바로 신명인 것입니다.
즉, 고속버스춤은 신명에 도달하기 위한 제의입니다. 이 신명을 내기 위해 사람들은 긍정적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행위에 몰입합니다. 빠른 비트의 음악은 감정을 고조시키고 함께 하는 이들과의 공감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됩니다.
마침내, 체면 때문에, 성격, 사회적 지위 때문에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그 어떤 행동도 허용되는 완벽한 자유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답답하던, 막혔던 기운이 터져나와 자유롭게 흘러넘치는 순간입니다. 서로의 눈빛을 통해 이를 확인한 다음부터 그곳은 이미 신명의 세계입니다.
이 신명을 맛보기 전까지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잠시의 일탈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신명으로의 욕구는 더욱 불타오릅니다. 관광에서 돌아가는 야밤의 고속버스가 춤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한 점 아쉬움 없이 불태우고 나면 한국인들은 '후련하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 후련함을 느끼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논 것 같지 않'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나오는, 몇날 몇일씩 계속되었다는 한국인들의 술문화의 근원이 여기 있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또는 교양없고 천박해 보인다는 이유로 고속버스춤은 차차 현대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안전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남보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내다버리기에 고속버스춤의 문화적 기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고속버스가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 오가는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자신을 표현해보시기 바랍니다. 체면같은 건 집어치우고 하얗게 불태워보십시오. 한 점 아쉬움이 남지 않을 때까지.
신명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