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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Aug 29. 2019

화병 vs 대인공포증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정신장애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unal of Mental Disorder)은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입니다. 1952년 첫 버전이 나온 이후로 현재 5판이 사용되고 있는데요. 1994년 개정된 DSM-4판은 당시 심리학계에 높았던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여, '문화의존증후군'이라는 분류를 추가했습니다.


이 분류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문화권에서 주로 발생하는 격정적인 폭력성인 아목(Amok),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에서 나타나는 남근이 수축해 하복부로 들어가서 죽을 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을 의미하는 코로(Koro) 등 특정 문화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25개의 정신질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의 화병(Hwabyung)과 일본의 대인공포증(Taijinkyofusho)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오늘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의존증후군과 양국의 문화심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병

화병은 조선왕조실록에서부터 기록이 남아 있는 한국의 고유한(?) 정신질환입니다.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숙종, 명성황후 등이 화병(화증;火症)을 겪었다는 내용이 전하죠.

정신의학은 화병을, 충격적인 일에서 생긴 화 또는 분노를 억제한 결과로 나타나는 만성적 심인성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소화장애와 두통 등을 유발하는 일반적인 신경증과는 달리 화병은, 답답함, 열기, 목과 가슴의 덩어리 뭉침 등의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는데요.


화병의 원인은 '분노의 억제'로 이해됩니다. 화병을 가진 분들을 인터뷰해 보면 억울한 일을 겪고, 그 화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화병 환자들이 호소하는 가슴에 걸려 있는 불덩어리는 이 표출되지 못한 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화병이 한국의 문화적 정신장애라면 화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분노와 같은 감정표현을 억제해야 하는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하겠습니다. 보통 한국을 비롯한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부정적 정서의 표현을 제한하는 정서표현규칙을 갖고 있습니다.

화가 난다고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화를 내면 집단의 조화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죠. 개인주의 문화에서 개인의 감정표현이 권장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도 집단주의 문화로 분류되는데 왜 중국이나 일본에는 화병에 해당하는 증상이 없을까요? 한국문화의 감정 억제 압력이 다른 나라보다 더 큰 것일까요? 아니면 한국인들에게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 더 많았던 것일까요? 이 지점이 보다 세부적인 문화이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화병은 그 원인이 되는 억울함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억울함은 매우 한국적인 정서인데요. 억울(抑鬱)은 보통 depression로 번역되지만 억울은 우울(depression)과는 전혀 다른 정서입니다. 우울처럼 침체되고 가라앉은 느낌이 아니라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매우 활성화된 감정이죠.


문화심리학에서는 억울함의 원인을 자신이 경험한 주관적 부당함(unfairness)으로 봅니다. 내가 겪은 피해나 불이익이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 때 한국인들은 '억울하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이 부당함이 해결되지 않을 때 억울함은 더욱 커집니다.


즉, 억울이란 부당함에 대한 지각에 덧붙여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과 분노가 추가된 감정입니다. 화병은 이러한 분노를 표출할 수 없고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을 때 발생합니다.


화병이 가부장적 문화로 의견이나 감정의 표현이 어려웠던 과거의 어머님들이나 교육수준이 낮아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들, 그리고 사회적 위치 때문에 어디에도 감정을 표출할 데가 없는 중년 남성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화병의 원인이 되는 억울함의 보다 본질적인 속성은 그 감정이 매우 '주관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주관성은 한국인들의 마음의 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한국인 마음의 특징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47).


한국인들은 내가 받아들이기에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면 억울함을 느낍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객관적인 상황이 어떤지는 중요한 게 아니죠. 따라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억울할 게 전혀 없는 사람도, 예를 들면, 사상초유의 국정농단을 저지른 최순실조차 "나는 억울하다"고 소리지를 수 있는 겁니다.

가부장적 문화와 교육수준이 낮은 이들, 그리고 이야기할 대상이 없는 중년남성들이 한국에 한정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병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정신장애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화병이 한국인들에게 유형화된 문화적 감정경험방식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대인공포증(Taijinkyofusho)

이번에는 일본의 문화의존증후군 대인공포증을 살펴봅시다. 이 정신장애의 독특한 점은 '공포의 방향성'에 있습니다. 보통 사회적 맥락에서 경험되는 공포는 사회공포증으로 분류되는데요. 이는 자신의 행동이 평가되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인공포증은 다른 이들로부터의 공포가 아니라, 내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 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대인공포증 환자들은 자신의 생김새가 체취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까봐 공공장소에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인공포증을 '가해염려형 사회공포증'이라고 하기도 하죠.


비교문화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자신을 집단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는 상호협조적 자기관(interdependent self)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유형의 대인공포증에 걸리기 쉽다고 합니다. 동양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어느 정도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정신장애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대인공포증이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의존증후군이 된 데에는 이 정신장애가 일본문화의 영향으로 일본인들에게 유형화된 일본인들의 심리적 특성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는 일본문화의 측면은 바로 메이와쿠(迷惑) 문화입니다.


일본인들은 남들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매우 강합니다. 일본의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은 이 메이와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민폐라는 개념이 일본에서는 매우 범위가 넓은데요. 일본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職分)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민폐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자신의 역할로 정해진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못하거나,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는 등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민폐이며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문화적 압력은 한국과 다른 나라들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서는 대인공포증이 문화적으로 두드러지는 증상이 아닌 이유는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과정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마음경험 방식은 대상적 자기, 즉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에서 비롯된다고 추정됩니다. 이러한 속성은 직접적 표현을 꺼리고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일본어의 표현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행동을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과 타인의 시선 등은 일본인들의 심리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기준이 됩니다. 즉, 일본인들은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극심한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을 만나는 상황을 극도로 꺼립니다. 이렇게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자기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이들을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라고 합니다. 히키코모리가 일본의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된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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