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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May 13. 2019

일본어 '알다(分かる)'에 대한 짧은 생각

안다는 말에 왜 나눌 분(分)이 들어갈까?

얼마 전, 일본 주재 공무원인 남편과 일본에서 살다 온 후배로부터 웃기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어가 서툴렀던 이 친구가 일본어 分かる(와카루)를 붕카루..라고 발음했다는 건데요. 후배 말로는 나눌 분(分)자가 들어 있어서 붕카루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저도 일본어는 잘 몰라서 처음엔 웃음 포인트를 못 찾았었는데요. 마침 집에 일본어 전공한 사람이 있어 물어보니 와카루라는 말이 아주 초보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붕카루라고 읽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웃기는 거라는군요.


한참을 실없이 웃다보니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다는 말에 왜 나눌 분(分)이 들어가는 걸까요?


일본어 分かる(와카루)는 알다, 깨닫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영어의 understand와 비슷한 맥락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합니다.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등 언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분들은 많습니다. 문화심리학에서도 언어는 심리경험을 매개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고 있지요. 하지만 언어와 심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은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언어사용은 오랜 옛날부터 관습화되어, 누구에 의해, 언제부터, 왜 그런 말을 쓰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언어분석은 상당부분 연구자의 해석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와카루(分かる)라는 말이 가진 문화심리학적인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선, 일본어로 깨닫다, 이해하다, 알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에 나눌 분(分)자가 들어있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알다'는 개념은 '나누다(分)'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안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한자 나눌 분(分)은 칼 도(刀)와 여덟 팔(八)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말 그대로 칼로 조각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누어 주다', '떨어져 나가다', '구분(별)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가 파생되는데, 이 중에 구분(별)하다는 의미가 '알다'와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물을 구별해서 명백하게 하는 것을 분별(分別)이라고 하는데, '모호한 것을 나누어 다르게 만들면' 분명(分明)해집니다. 구분을 지으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고 구분하여 알게 되는 것도 그중 하나죠.

나누어 명확해지는 것들의 예는 신분(身分)이나 직분(職分) 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계급과 직책을 나누어 자신과 타인의 역할을 분명히 해 왔습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조직과 제도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고 또 소멸되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일본인들의 '앎'이라는 개념에는 이 구분(分)이라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알다'라는 말에 나눌 분(分) 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다가 일본인들의 이러한 인식이 드러나는 예를 하나 찾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심리학 용어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몇 군데 재미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self의 번역어입니다. 한국에서는 self를  스스로 자(自)에 몸 기(己)를 써서 '자기(自己)'라 옮기지만 일본에서는 몸 기 대신 나눌 분(分)을 써서 '지분(自分)'이라 합니다.

자신의 몸(己)이나 구분되는 자신(分)이나 다른 이들과 다른 '나 self'를 뜻하는 것은 같습니다만 기(己)와 분(分)의 사용은 분명 다릅니다. 한국인들이 self를 나라는 '몸을 가진 개체(己)'로 본다면 일본인들은 나를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존재(分)'로 파악한다는 뜻이겠지요.


이때 '구분된다'는 뜻은 타인과 별개로 독립적(independent)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interdependent)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등으로 구분된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인 자기의 성격도 관계 안에서의 개체성(주체성)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에게 있어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것들과 구분하여 명확히 하는 것일 터입니다. 그러고보니, 일본인들은 모든 것이 분명하게 구분된 상태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기 마련이죠.


무대와 관객이 분명히 나눠진 전통극이나 혼네와 다테마에로 나눠진 대인관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직업의식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에게서 불분명하고 애매한 것, 잘 모르겠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보려니까 일본문화의 더 많은 현상들이 이런 틀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해당 사례들은 다음 글에서 흥미 위주로 좀더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우리말 '알다'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국어사전에 보면, '의식이나 감각으로 느끼거나 깨닫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깨닫다'의 어원은 '깨다'와 '알다'의 합침말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째 설명이 돌고 도는 느낌입니다. 이 외에도 확실친 않지만 '깨다+닿다'의 합성어라는 설도 있는 것 같은데요.


말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늘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만 그게 어디서 왔는지는 알기 어려운 법이죠. 그러나 '알다'의 뜻풀이에 나오는 '깨닫다'에서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알다'의 의미를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깨다'입니다. 깨다+알다나 깨다+닿다에 모두 '깨다'가 나옵니다. 한국인의 '앎'에는 '깨다'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뜻일텐데요.  '나누어야' 알게 되는 일본인들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깨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또 다시 의문이 생깁니다. 이러한 한국과 일본의 앎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문화에 대한 질문은 계속해서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일껏 찾아낸 답도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죠. 하지만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문화를 공부하는 매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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