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으로 향하는 보다 적극적인 길
옛말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다. 옛말에 틀린 말 없다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물론 중이 떠나는 편이 훨씬 쉽다. 하지만 중이 절을 마음에 들게 바꿀 방법은 없을까?
행복 연구에서 이야기하는 행복해지는 방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실천이다. 몰입을 경험해라, 용서해라, 감사 일기를 써라,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져라….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으로 ‘중이 떠나’는 방식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바꿔야 할 것이 정말 나 자신뿐일까?
몇 년 전 아침형 인간이 대유행이었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자기계발을 하는 아침형 인간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슬픈 일은 이미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정신없는 직장인들이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잠을 더 줄이고 자기계발을 위해 메마른 지갑을 더 쥐어짰다는 점이다.
이런 프레임의 문제점은, 행복하지 않은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게 만든다는 데 있다. 여전히 성공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자신이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아서라고 여기고 더 긍정적이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자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하지 않은 원인은 자신의 외부에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 같은 것들 말이다. 한국 사회는 분배의 불평등, 고용 불안정, 부족한 사회 안전망, 공정하지 않은 경쟁 구도 등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감사 일기를 쓰거나 긍정적 사고방식을 갖는다고 해결될 종류가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이익을 대표할 사람에게 투표하고, 공공의 행복을 해하는 부당한 일에는 분노하고 때로는 힘을 모아서 없앨 것은 없애고 바꿀 것은 바꾸는 등 우리는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을 ‘시민’이라 한다.
시민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시민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로, 사회를 구성하고 움직여가는 주체다.
현대사회의 시민은 자유와 평등,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동시에 이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압제로부터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 또 시민들에게는 다른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 행복을 존중하고, 그러기 위해 시민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발전시킬 책임이 있다.
시민의 반대말은 ‘신민(臣民)’, 즉 누군가의 신하 또는 노예로 사는 이들이다. 신민은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믿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을 부러워하며 수동적으로 산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대치는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해주는 새 주인을 찾는 것 외에는 없다.
우리는 노예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자주와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이들을 기억한다. 왜 그들은 보장된 행복을 걷어차고 가난과 고통뿐인 삶을 선택했을까. 행복은 개인적인 측면에만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이 있다.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려면 독립운동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옳다. 뉴스 같은 건 멀리해야 한다. 뉴스에는 불쾌하고 화나는 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편함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일까?
행복 연구들은 책임 있는 시민이 되기 위해 불쾌한 감정을 이겨내고 당장의 행복과는 관계없는 어떠한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할 필요도 있다는 사실은 왜 언급하지 않는 걸까.
한국의 스님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무기를 들었다. 다른 나라의 불교에서는 찾기 힘든 현상이다. 불교는 애초에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계율을 어기고 사람을 죽이는 흉기를 잡은 이유는 중생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중이 중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중생들과 다르지 않고 중생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깨달음을 위해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깨달음의 길이요, 부처의 가르침일까. 이런 이유로 스님들은 무기를 들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초들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힘을 보탠 이들은 귀족과 사대부가 아닌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다. 그들이 평소에는 세금과 노역으로 괴롭히고 정작 위험에 닥치면 자신들을 버리는 나라를 위해 일어선 이유를 맹목적인 애국이나 파시즘으로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려고 일어난 것이다. 거대한 외세의 힘 앞에 스러질 한 줌도 안 되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내 가족, 내 아이, 내 이웃을 위해 나섰고 잊혀져 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이 자리에 서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 꿈을, 보장된 미래를, 일상의 행복을 내던진 그들의 삶을 어리석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의 삶을 불행이라 규정하는 것은 옳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