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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an 09. 2020

징징이는 왜 행복할 수 없나?

행복해지기 전에 찾아야 할 답

징징이는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 미국 애니메이션 《네모바지 스펀지밥》의 주인공 중 하나다. 바닷속 마을 비키니시티를 무대로 하는 이 만화는 해면동물인 스펀지밥과 불가사리 친구 뚱이, 오징어 징징이, 바닷게 집게 사장 등 수많은 바다 생물이 벌이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여준다. 


1999년 첫 방송을 시작한 이 시리즈는 현재까지 12시즌이 넘도록 제작되고 있으며,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거라는 고정관념에 걸맞지 않게 현대사회와 자본주 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다. (스펀지밥을 모르시는 분들 을 위한 설명은 여기까지.) 


징징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캐릭터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스펀지밥과 징징이는 돈밖에 모르는 집게 사장이 운영하는 집게리아의 점원이다. 스펀지밥은 요리사이고, 징징이는 계산대에서 주문을 받는다. 스펀지밥은 열악한 근무 조건에서도 언제나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버거 패티를 굽는 반면 징징이는 특유의 우울한 표정으로 매사에 심드렁하다. 


징징이는 현대사회의 직장인들을 상징한다. 옛말에(?) 징징이를 보고 ‘쟤는 왜 맨날 죽상이야?’라고 생각하면 어린이고, 스펀지밥을 보고 ‘쟤는 뭐가 좋다고 맨날 웃고 있어?’라고 생각 하면 어른이 된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징징이처럼 우리는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떨 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직장으로 향한다. 일하는 게 너무 행복하고 월요일이라 출근할 수 있어서 좋다는 아무 생각 없는 스펀지밥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 불행의 아이콘인 징징이가 행복해 보이는 순간이 있다. 퇴근해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유일한 취미인 클라리넷을 연주할 때다. 뭐, 패스트푸드점 캐셔라고 클래식 음악 듣기 같은 취미를 갖지 말란 법은 없지만 징징이는 일단 클라리넷에 재능이 없다. 기본적인 음정과 박자마저 무시한 징징이의 연주를 좋아해주는 건 징징이 자신과 매사에 행복한 스펀지밥뿐이다.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징징이가 행복을 느끼는 대상이 소위 상류층의 문화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징징이는 자신이 대단히 능력 있고 뛰어나기 때문에 집게리아 같은 데서 일할 사람, 아니 오징어가 아니라고 믿는다. 


집에 오면 징징이는 와인을 마시며 거품 목욕을 즐기고 분재를 가꾸고 TV로 상류사회의 우아한 생활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징징이의 행복한 시간은 거의 언제나 옆집 사는 스펀지밥과 뚱이의 저급한 취미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징징이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은 평범한 직장인인 그의 일상이 아닌 그의 생각 때문이다. ‘아비투스(Habitus)’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만든 용어로, 교육을 통해 상속되 는 무의식적 가치체계를 말한다. 

피에르 부르디외

어떤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들은 의식적, 무의식적 학습의 결과다. 이러한 가치들은 어쩔 수 없이 문화자본과 연결되는데 결국은 문화자본 을 생산하고 소유한 이들의 가치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징징이는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상 류사회의 취미와 행위 양식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의식에 받아 들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중에는 이러한 허위 의식의 결과들이 포함되어 있다. 


징징이가 찾으려는 행복은 자신의 현실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제 모습과도 동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추구하는 이상에 대비하여 현실은 더욱 남루해지고 함께하는 이들의 저급한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내가 사는 세상을 지옥으 로 만들고 나와 사는 사람들을 상종 못할 이들로 만들어 얻어 지는 행복이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라캉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다른 이들의 욕망을 욕망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바라는 것을 바라고 얻은 것들에 만족하고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에 좌절한다. 


우리는 행복하고자 하지만 왜 행복해야 하는지 모른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지만 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나답게 살기를 희망 하고 내가 발전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우리는 나답게 살기 위해 물건을 사고 나를 찾기 위해 남의 나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내 인생을 찾기 위해 집 밖을 나서고 오늘도 한 뼘 발전했다는 뿌듯함에 잠자리에 들 것이다. 이런 삶이 행복한 인생일까? 


행복하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나는 행 복하고 싶은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 상태가 되고 싶은 가? 나는 왜 그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그 전에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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