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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Apr 28. 2020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구요?

즐겁지 않으면 행복이 아닌가요?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자신이 하는 일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영표 씨의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이후인 듯한데, 이영표 씨에겐 죄송하나 이 말은 틀렸다. 구석구석 전체적으로 틀렸는데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부분도 틀렸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쪽도 틀렸다.


천재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낸 사람이다. 보통 사람의 노력으로 극복될 것 같으면 천재라는 말이 붙지도 않는다. 게다가 천재가 남들 노력할 때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천재들도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노력까지 하는 천재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건 시간낭비다.


다음,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도 한참 잘못된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 말이, 진 사람을 바보 만드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졌으면 다음엔 어떻게 하면 이길까를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즐기지 못해서 졌구나..라는 천하에 쓸데없는 자책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긴다’라는 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찝찝한 마음을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던 서장훈 씨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콕 찝어 정리를 해주셨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서장훈 씨가 한 말을 조금 옮겨보면,


“즐겨라,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 저는 세상에서 그 얘기가 제일 싫어요.

최선을 다해서 몰입하고 올인하지 않으면서 성과를 낸다? 저는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즐겨서는 최고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저는 단 한 번도 즐겨본 적이 없어요.

책임감을 느끼고 나서부터 농구를 즐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목뼈가 나가고 코뼈가 부러지면서까지 이 악물고 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기록은 없었을 거에요. 온 힘을 다 짜내서 전쟁처럼 해서 그 정도 한 거에요.”

최고가 되려면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여야 한다. 1초에 승부가 갈리는 상황에서 즐긴다는 마음이 들 수 있을까?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 사진을 본 적 있는가. 마디마디 꺾이고 튀어나온, 보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발.


물론 모든 사람이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 될 수도 없고. 그러나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이 가능할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잠깐 그 일을 해보고서는 “재밌네, 할 만하네.”라고 하면 뭐라 하시겠는가.


만약 나에게, 누군가 10분 쯤 강의를 해보고 그런 얘길 한다면 당장 손에 든 것으로 그 사람의 뒤통수를 때릴 것이다. 그 재미있는 걸 일주일에 20시간씩 해 보라고. 10분을 말하기 위해서는 1시간을 준비해야 함을 아시는가. 강단에 선다는 것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 한마디가 듣는 이의 한 학기를, 어쩌면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책임감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다.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이 뾰족하거나 무거운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어떤 일을 잘 하는 이들이 그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여유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는 인고의 세월과 피나는 노력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고 모든 것을 장악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말이다. 능력도 없고 노력도 안 하는 선수가 경기장에서 여유를 부려봤자 결과는 뻔하다.


그리고 여유롭고 즐거운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일에 애정이 없거나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사람마다 일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다. 엄숙하고 진지하게 때로는 숭고하게 자신의 일에 임하는 이들을 즐기지 못한다며 무시할 권리를 누가 주었나.


문제는 즐겨야 한다는 강박이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긴다’는 말은 가뜩이나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 사회에서 즐기지 못하는 것을 죄악시되는 분위기를 만든다. 버드런트 러셀은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현대인이 누리는 즐거움의 총량은 원시 사회에 비하면 엄청나게 커졌으나 동시에 즐거움을 반드시 누려야 한다는 의식 또한 훨씬 증대되었다고 지적한다.


행복은 주관적 기대가 커질수록 경험하기 어렵다. 예전에 비해 이미 많은 것을 즐기고 있지만 더욱더 즐겨야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 즐기고 있는 것이 즐거울 리 없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긴다’는 말은 자신의 일을 잘 하고 싶어서 밤잠 설쳐가며 공부하고 노력하는 이들이 현재의 상태를 불행으로 규정하고 덧붙여 즐겨야 한다는 죄책감까지 갖게 만드는,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강박에 불과하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은,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 시간이, 고난을 견디며 엄숙하고 숭고하게 맞이하는 그 시간이 불행이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행복은 성취 그 자체나 결과가 아니다. <해피어>의 탈 벤 샤하르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했듯이 성취에서 오는 쾌감은 곧 사라지고 허무감이 찾아온다.


그러나,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를 향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불행인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불쾌한 감정과 고통으로 점철된 것일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오해는 부정적 정서 = 불행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고통을 왜 견뎌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만 있다면 성취의 과정에서 경험되는 부정적 정서들은 긍정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를테면, 성취의 순간을 위해 지금의 고통을 (싫지만) 참아낸다..가 아니라 지금의 이 시간들은 성취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니 지금의 고통을 (기꺼이) 견뎌낸다..가 되는 것이다. 이영표 씨가 즐긴다는 말을 이런 의미로 썼다면 이 글 앞머리에서 이영표씨 말이 다 틀렸다고 했던 데 대해서 사과드릴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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